[Sheet] 격자무늬 칸 속의 질서
우리는 흔히 '칸'이나 '틀'이라는 단어에서 '구속'과 '제한'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좁다란 칸이 있기에 비로소 '무질서'가 '질서'로 바뀌고, '혼돈'이 '정리'로 나아가는 경험을 합니다.
엑셀을 켜고 '새 통합문서'를 선택했을 때 마주하는 광경은 광활합니다. 엑셀의 끝까지 가 본 적이 있나요? 엑셀에는 1,048,576개의 행과 16,384개의 열, 무려 171억 개(17,179,869,184)의 셀들이 촘촘한 격자무늬 시트 위에 펼쳐져 있습니다. 이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은 취업문을 통과하고 처음 사무실 책상에 앉은 사회초년생의 마음과 닮아 있습니다. 무엇을 채워야 할지, 어디까지 가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광야 같은 풍경 말입니다.
A1 셀에 '='을 입력하는 순간, 우리는 엑셀 월드의 엄격한 질서 속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갑니다.
'='으로 시작되는 함수는 단 한 치의 오타나 오류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신입사원이 회사의 견고한 룰(Rule)에 압도되어 잠시 숨을 멈추는 찰나와 같습니다.
하지만 이내 판매액과 수량을 곱하는 수식을 입력하고 [Enter]를 누르는 순간, 매출액이라는 경이로운 결과가 산출됩니다. 회사가 제시하는 질서에 순응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명확한 결과물. 그렇게 우리는 격자무늬 칸들 속에서 조금씩 자기 자리를 찾아갑니다.
직장인에게는 흔히 세 번의 고비가 온다고 합니다. 첫 3일째 무렵 입사 전에 생각했던 회사와는 너무도 다른 회사 분위기에 "내가 정말 잘 들어온 걸까?" 의문이 듭니다. 3개월째 정도가 되면 대충 분위기는 알겠고,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하는 자신을 보고 "계속 여기 있는 게 맞나?" 하고 흔들립니다. 2차 고비를 무사히 넘겼지만 3년째가 되면 반복되는 업무가 의식되기 시작합니다. 회사 생활에 익숙해진 것 같기는 한데 경험은 쌓인 것 같지도 않고, 입사 전 쌓았던 스펙이 무색하게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아 현타가 옵니다. "과연 이 회사에 비전이 있을까?"라며 미래를 고민합니다.
이 고비들을 넘기고 나면 어느덧 171억 개의 셀들 중 상당한 칸을 자신 있게 다룰 줄 아는 숙련된 '회사인간'이 됩니다. 루틴 한 함수 몇 개를 익숙하게 쓰며 "이 정도면 평타는 친다"라고 생각할 즈음, 옆 부서 입사동기가 화려한 매크로(Macro) 기술을 선보입니다. 잠시 갈등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립니다. "에이, 이 정도면 됐지 뭐." 그렇게 우리는 변화보다 익숙함이라는 고개에 머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수식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챗GPT학습에 사용된 A100이라는 제품이 1초에 무려 312조 번을 계산한다고 하는 인공지능의 시대. 이제 코파일럿(Copilot)이 내가 만든 수식의 오류를 잡아내는 것은 물론, 더 우아하고 효율적인 방법을 순식간에 제안합니다. "아! 엑셀 너마저..."
"김 대리, 이 엑셀 어떻게 하는 거야?"라며 쉴 새 없이 질문만 던지는 차장님은 무능을 넘어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지금의 세대는 더 이상 지시와 통제만으로 이루어진 '선배 마일리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엑셀의 기초를 넘어 매크로, 파워쿼리, 그리고 AI와의 협업까지. 이제 직장인의 생존은 과거의 경력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민첩하게 '현행화(Update)'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엑셀 시트의 격자무늬는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선명한 경계선은 우리가 어떤 데이터를 채우고 어떤 수식을 걸어야 할지 알려주는 이정표입니다. 타인이 정해준 수식에 값만 대입하는 '부속품'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나만의 효율적인 로직을 짜는 '설계자'가 될 것인가. 격자무늬 시트는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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