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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별 마실 Oct 06. 2024

축의금 여행기

돈과 함께하는 결혼식날 풍경 이야기



편의점 라면 진열대 옆 ATM 속은 쿰쿰하고 완전한 어둠에 잠겨있다. 갑자가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고막을 찌른다. 고무 띠를 두른 둥근 금속성 롤러가 돌더니 나를 밀어낸다. ATM 뚜껑이 열리자 눈이 부신다. 10시간 만에 만나는 밝은 세상이다. 하지만 하얀 봉투에 둘러싸여 옷감 틈으로 감금된다. 다시 어둠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같은 봉투 속에는 나 혼자가 아닌 둘이다. 나처럼 '오만원'이 몸에 쓰여 있는 같은 동족이다. 강렬한 향기가 나는 누군가의 품속에 담겨 어딘가로 향한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주변이 소란스럽다. 여기저기서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린다. 책상 위에 거칠게 내려 놓인다. 몸에 충격이 느껴진다. 허리에 뻐근함이 전해진다.

"여기가 신부 측이죠?"

"네, 맞아요. 식권 받으세요"

내가 담긴 하얀 봉투에 숫자가 메겨진다.

나 몸에 새겨진 숫자보다 훨씬 작은 '127'이다. 다시 비좁은 틈 속으로 끼워진다. ATM 속과 비슷한 주변 환경이지만 답답한 느낌은 그래도 덜하다. 다들 하얀색 봉투 옷을 입고 있다는 점도 다르다.     


이미 서로에게 익숙해진 두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다. 씩씩하세 또는 어색하게 걸어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XY 염색체를 가진 젊은이가 까불거리면서 입장한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축가라는 것이다. 이런 행사에서 자주 듣는 노래인 것 같다.


하객들이, 뷔페식당에서 제공되는 수많은 종류의 음식들을 기대하며, 식당으로 몰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지금 내가 있는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손님의 이름을 기록하고 돈을 세느라 바쁘다. 하얀 봉투 옷이 벗겨지고 노란색 종족과 초록색 종족이 나뉘어 다시 줄을 선다.


XX 염색체와 XY염색체가 마련한 행사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간다. 장소를 빌리고, 예쁘게 꾸미고,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결혼 당사자 입장에서는 대부분 처음 해야 하는 일이라서 정신이 없다.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처리하는데 상당한 돈도 필요하다. 나는 그 행사에 비용으로 쓰여 신랑과 신부에게 힘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오늘 하루도 보람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적막한 어둠이다. 지난번 ATM 속과는 상황이 다르다. 훨씬 더 많은 황색 종족들과 줄에 단단히 묶여서 빌딩처럼 쌓여 금고 속에 단단히 감금되었다. 다음 여행지는 어디일까.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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