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이 빛나는 영화
1
당시 건너편 건물에서 공부를 하던 고등학교 동기가 한 명 있었는데
우리는 가끔 만나서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곤 했다.
어느 날엔가 내가 당시 활동하고 있던 만년필 관련 카페에
대해 잠시 언급했고 이야기를 듣더니 그 친구가 이 영화를 언급했다.
2
나도 본 영화고 인상 깊었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도무지 만년필과는 연상이 안되서 찾아 봤더랬다.
주인공이 대학원생 시절에 지도교수가 자기 제자를 교수회관
같은 곳을 슬쩍 보여준다.
마침 어느 노교수의 자리로 다른 교수들이 다가온다.
그들은 자신의 만년필을 그 노교수 앞 탁자 위에 올려 놓으면서
존경의 표하는 한 마디씩을 전한다.
그러면서 저렇게 되고 싶지
않냐고 자극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
내 기억이 맞다면 배경이 프린스턴 대학일 것이다.
아마 그 대학 교수회 전통인 것 같다.
3
나에게는 다소 울적한 분위기로 기억되는 영화다.
개략적인 나머지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천재성을 인정받고 대학에 왔지만 성과물이 없어
정신적 고통이 상당했던 주인공.
어느날 친구들과 들른 바에서
상대 여성들과 짝을 지어 즐겁게 지내려면
어떤 전략을 구사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훗날 '균형이론'이라 불리는 이론의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시켜 논문으로 제출하고 지도교수의
찬사와 함께 졸업하게 된다.
이후 직장도 잡고 결혼도 하게 되지만 대학 내내 시달렸던
스트레스로 인해 보이는 허상과 과대망상 때문에 본인과
가족들은 힘든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지인들의 도움으로 프린스턴으로
돌아와서 연구생활을 하는데
66(67?)세에 이르러 노벨경제학상 후보에 오르게 된다.
4
영화에서 하이라이트는 여기 즈음이다.
노벨경제학상의 후보로 선정되고 나서
위원회 측 사람이 그에게 찾아오게 된다.
그가 노벨상을 받을 만큼 정상인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둘은 교수회관에서 차를 마시며 자신이
노벨상 위원회에서 왔노라고 밝힌다.
주인공은 이내 눈치를 채고 자신이 그 상을 받을 만큼
정상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 왔느냐고 묻는다.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스스로
아직도 환영이 보이고 미쳤다고 말한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흐르는 중에 건너편에서 어떤 노교수가 와서는
자기 양복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그의 앞에 내 놓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당신이 여기 있어서 영광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여기 있는 게 좋습니다.
라고 말해 준다.
그러더니 그의 존재를 알아본 교수들이 차례로 와서
자신의 만년필을 주인공 앞자리에 내 놓는다.
그러면서 다들 존경의 한 마디씩을 한다.
전동 휠체어를 탄 어느 교수가 와서
자기 만년필을 내 놓고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가는 장면도
꽤 인상적이었다.
자신이 학생이었던 시절
지도교수가 보여주었던 그 장면이 자신에게
그대로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이 장면을 본 위원회 사람은 감동받은 모습을 보이며
동시에 결정했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화면이 바뀌어 주인공이 노벨상 시상식에서
연설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자신은 잘 몰랐지만 젊은 시절 그가 만들었던 이론이
현재 경제학이나 여러 과학 분야에 널리 적용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5
사람마다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만년필은 학자에게 분신이자 자존심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 물건을 다른 이에게 준다는 것은 학자로서의 최고의
존경을 표하는 게 아닐까?
다시 본 이 영화에서 최고의 소품이자 영화를 빛나게 해 주는
물건으로 만년필을 주저 없이 꼽고 싶다.
만년필이란 소재 때문에 이 영화를 다시 돌아 본 후
<뷰티플 마인드>라는 이 영화를 앞으로는
비운의 천재 이야기가 아닌
'만년필이 빛나는 영화'로 기억하게 될 듯하다.
영화에서도 언급이 되지만 그 때까지 경제학은 아담 스미스가 주창한
각자 개인이 최고의 행복을 추구할 때 사회는 최고의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존 내시는 구성원들 간의 전략을 통해 모두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다른 해법이 있다는 것을 보였다.
그 거이 '내쉬 균형'이며 게임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15년 5월 26일에 영화의 주인공인 존 내시는
교통사고로 부인과 함께 사망하였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삽화를 그리고 싶은 분은 연락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