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알약 Oct 09. 2024

하나만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

작은 동그라미군의 이야기

1. 여기에 종이 한 장이 있습니다. 이 종이는 하얀 스케치북 같은 질감을 가진 종이입니다. 아니, 그 종이는 모니터의 스크린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혹은 그저 머릿속에 캔버스 하나를 떠올린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하나의 평면이 있으면 됩니다.


2. 이 종이는 가장 바깥 부분, 통상 외곽선이라 부르는 경계의 끝을 가집니다. 하지만 이 사고실험에서 그 외곽선은 우리의 인식의 지평선일 뿐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무한히 확장할 수 있지요. 종이는 수학적으로 하나의 유클리드 평면인 셈입니다. 따라서 떠올린 종이의 외곽선이란 그저 그 평면의 일부를 보여주는 창(프레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3. 이 종이 위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분명 종이가 있는 데도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종이의 면만 보일 때 우리는 보통 아무것도 없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지금은 아리송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곧 이 말의 의미를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으니 일단 넘어가기로 하죠.


4. 이제 까만 크레파스를 들고 종이의 한가운데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르는 선을 하나 그립니다. 이 분할선은 종이를 상하로 나눕니다. 분할선은 종이의 상부와 하부라는 ‘구역을 분할하는 경계선’이 됩니다. 드디어 위쪽과 아래쪽이 등장했습니다. 단지 선을 하나 그린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상단과 하단이라는 영역1)이 생겼습니다.


5. 이것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상부만 존재할 수도 없고, 하부만 존재할 수도 없다는 뜻이죠.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지요. 종이만 있을 때는 종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이 상태를 ‘하나의 종이’로 인식한다는 것은 종이의 외곽선을 기준으로 종이와 이외의 배경으로 ‘구분’했다는 것입니다. 즉 종이의 안과 밖(배경)이라는 두 개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하나만’ 있는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6. 만약 종이의 외곽선이 무한히 확장하여 인식의 평면을 가득 채운 경우에 그 종이는 배경으로써의 허공이 되는 것이며, 이 허공의 존재를 인식하는 중에는 그것이 없는 경우를 상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있다(존재)는 상태는 항상 없다(비존재)는 상태를 전제하는 것입니다.2)


7. 이렇게 하나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 하나 자체에 주의를 기울인다고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경계선의 반대편에 의식을 집중함으로써 그곳에 있는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곳에 있던 존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전의 한 면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때에는 그것이 앞면임을 알지 못하다가 뒷면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순간 원래 보고 있던 것이 앞면임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만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8. 그럼 종이를 조금 멀리 놓고 프레임을 키워보죠. 크레파스로 그렸던 선은 원래의 프레임 크기에 맞춰져 있어서 프레임을 늘리니 창을 꽉 채우지 못하고 작아졌습니다. 경계선은 직선이 아니라 선분이었습니다. 이 선을 휘어보죠. 적당히 구부려서 양쪽 끝을 이어 붙입니다. 드디어 작은 동그라미군이 등장했네요.


9. 종이 위에 아까의 상부와 하부는 사라지고 대신 동그라미의 안과 동그라미의 바깥이 생겼습니다. 동그라미의 테두리는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선이 되었습니다. 동그라미군이 꼬물거리네요. 이 녀석은 하나의 세포로 이루어진 박테리아였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오른쪽으로 뻗어있는 가늘고 기다란 꼬리도 하나 보이네요. 편모형 단세포 박테리아였나 봅니다.


10. 녀석이 파르르 떠는군요. 어디가 아픈 걸까요? 아, 물결에 흔들리는 거였네요. 종이의 평면은 알고 보니 수면이었습니다. 워낙 작은 크기라서 조그만 물결에도 둥실거렸던 것뿐이군요. 이제 고개를 들고 조금 멀리서 바라보면 작은 동그라미군은 세포로써 수면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11. 즉 동그라미군의 세포막은 자신과 세계를 가르는 기준선이며, 내부와 외부를 쪼깨는 분할선이고 또 주관과 객관을 나누는 구분선인 셈입니다. 이 세포막은 동그라미군에게 마치 작은 감옥과도 같습니다. ‘살아있는 채로는 그 경계선을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고, 설령 그 일부가 떨어져 외부로 나간다 하더라도 그 조각이 지닌 생명의 불꽃은 곧 꺼지게 될 테니까’3) 요.


12. 이렇게 ‘있다’는 항상 그것과 대비되는 것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

1) 데이터 기술체계인 온톨로지(Ontology)에서는 이것을 도메인(Domain) 또는 개체(Entity)라 부를 수 있습니다.

2) 붓다의 가르침 중에서 ‘무’란 이 배경조차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3) 미시마 유키오, 전공투와의 대담에서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주관과 객관을 가르는 절대적 경계선의 의미를 잘 포착해 낸 표현입니다.


이번 글에서 ‘작은 동그라미군’을 통해 감각수용체의 최소 단위를 개념화하고 이후의 글에서 ‘생각의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들을 하나씩 쌓아 올릴 예정입니다. 또 한편으로 이것은 우화입니다. 작은 동그라미군은 단세포 박테리아로 등장했지만, 우리 몸의 감각세포 중 하나일 수도 있으며 한 사람의 개인이거나 하나의 공동체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더 나아가 하나의 개념일 수도 있습니다. 작은 동그라미 군으로 표상되는 다양한 것들이 그 경계선으로 인해 무엇과 무엇으로 나뉘는지 고찰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이전 04화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존재'가 전제하는 속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