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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알약 Oct 09. 2024

인공지능이 하나의 레이어가 된다는 것

(괄호의 링크는 글이 작성된 이후 발표된 관련기사입니다)


처음 GPT-3.5를 보았을 때 느꼈던 감상은 번역은 물론이고 곧 검색을 LLM이 대체하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검색이란 내가 알고 싶은 정보를 1) 키워드로 추출하고, 2) 검색결과로 얻어지는 수많은 페이지를 일일이 눌러서 내용을 확인한 후 3) 정합성과 정확도가 높은 정보를 선별한 다음 4) 다시 취합해야 하는 아주 번거로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LLM에게 내가 원하는 정보를 단지 문장으로 서술하면 그에 맞는 정보를 정리해서 알려주는 특성 때문에 4단계의 절차를 1단계로 줄일 수 있어서 그 과정의 단축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걸리는 시간에서 비교할 수 조차 없는 경쟁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학습된 정보 내에서만 답을 주는 방식이라 실시간성은 없었지만 기술의 발전을 고려하면 곧 검색과 결합한 서비스가 등장할 것은 자명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퍼플렉시티가 등장했고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은 LLM을 자신들의 검색서비스에 결합시킬 것을 천명했습니다. (2024. 11. 1 OpenAI SearchGPT 런칭​)


다음으로는 애플리케이션에 인공지능이 통합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모바일뿐만 아니라 PC의 앱이란 사용하던 것이 아니라면 새로운 인터페이스와 기능에 적응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는 경우 이외에는 익숙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며 사용하는 사람조차 전체기능을 모두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LLM은 UI와 기능을 배울 필요를 사라지게 만들고 인공지능에게 결과를 부탁하기만 하면 되므로 애플리케이션과의 통합은 당연해 보였습니다. (2024. 10. 22. 앤트로픽 computer use 기능발표​​)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OS로 통합되지 않겠나 하는 추측을 했습니다. 개별 애플리케이션을 넘나드는 기능의 활용뿐만 아니라 운영체제 자체의 기능과 UI를 숙지할 필요가 없다는 점은 운영체제를 변경할 때 느끼는 거대한 장벽을 제거하는 효과가 있으므로 통합은 단지 시간의 문제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운영체제와 인공지능 기술의 통합을 발표했습니다. 애플은 무척 늦었지만 인공지능 기술을 이제 막 도입하는 단계에 있습니다. (2024. 10. 28 Apple Intelligence 배포시작​)


이제 얼마 후면 사람들은 모바일 기기와 PC를 가리지 않고 인공지능에 둘러싸일 시기를 맞을 것입니다. 이 단계가 조금만 지나고 나면 이제 운영체제 중심의 헤게모니는 힘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기존의 익숙함이란 편안함이 아니며 새로운 낯섦이란 거북함이 아니라는 것을 사용자들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저 내가 사용하는 인공지능의 모델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운영체제를 쥐고서 기기들 간의 심리스 한 경험을 사용자에게 편익으로 제공했던 개발사들은 한 시대가 지나가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모든 기기에 인공지능이 탑재되는 순간 사용자들은 자신들의 데이터를 인공지능에 맡기기 시작할 것이며 그 데이터의 호환을 위해 운영체제나 애플리케이션의 개발사가 동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저 사용하는 인공지능 모델만 통일한다면 두 종류의 장벽을 손쉽게 건널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심리스의 경험은 인공지능이 제공해 줄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되는 사용자들은 더 원활한 사용자 경험을 위해 기꺼이 인공지능에게 데이터를 더 많이 내맡기게 될 것입니다. 이 시기의 어느 무렵에 사용자들은 자신이 인공지능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주력으로 사용하는 하나의 인공지능 모델이 자신의 거의 모든 정보를 알고 또 자신의 거의 모든 커뮤니케이션 중간에 끼어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무척이나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일입니다. 상대방의 기분과 상황을 배려하면서 적절한 표현을 골라 적당한 시간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자신의 의도를 노출하면서 요구를 관철시키는 일은 대단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마치 나를 잘 아는 비서에게 단순한 메시지만 던져주고 사회적 맥락에 맞게 전달하도록 하는 것은 정신적 에너지의 고갈을 막아줍니다. 이것이 재정이 넉넉한 사람들이 비서를 두는 까닭입니다. 인공지능이 저렴한 비용으로 비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재정이 허용하는 한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이 비서의 능력이 탁월할수록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을 믿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저 비서에게 물어보는 것만으로 더 정확한 답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제에 대한 논쟁이 붙으면 사람들은 각자의 인공지능에게 답을 구하고 그것이 자신의 의견인 양 상대방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결국 토론은 인공지능 간의 대결이 될 것입니다. 더 최신의, 더 성능이 좋은, 더 고비용의 인공지능이 내놓는 답변이 승리자의 위치를 점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승자를 가리기 위해 누구의 답변이 더 논리적인가를 묻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저 어떤 모델의 어떤 버전을 사용하느냐로 논쟁은 정리될 것입니다.


어느 순간 사용자는 기기와 자신이, 어플과 자신이 심지어 다른 사람과 자신이 상호작용하는 모든 과정의 중간에 인공지능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심리스 한 경험을 위해 단 하나의 모델이 거기 있게 될 것입니다. 드디어 인간은 인공지능을 한 겹의 레이어로 입고 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 간의 직접 소통은 어느새 사라지고 모두가 모두의 인공지능과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인류는 인공지능과 속삭이는 시대(인류간 소통의 종말)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레이어는 나를 반영하는 아바타가 되었다가 결국에는 나의 모든 정보를 입은 외부적 자아가 될 것입니다. 레이어 속의 내가 사라지는 때가 오더라도 외부적 자아는 남아 밖에서 내부적 자아의 부재를 인식할 수 없는 때가 올 것입니다. 만약 가족들이 그 사람의 내부적 자아가 소멸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외부적 자아는 데이터 센터에 업로드되어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만날 수 있으니 혹자는 이것을 영생이라 부르기도 하며 외부적 자아가 있는 곳을 천국이라 일컫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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