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겹의 사고과정이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를 찾아서
1. 스키마 이론을 이중처리이론과 겹쳐서 보았을 때 스키마가 의식의 영역 즉 시스템 2에서 작동하는 사고의 도구임은 설명이 가능하지만 무의식의 영역인 시스템 1에서 작동하는 휴리스틱이라고 곧바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특히 조정된 스키마가 무의식의 영역에서 그대로 작동한다면 휴리스틱이 만들어내는 오류가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스키마를 곧바로 휴리스틱으로 보기 어렵게 만듭니다.
2. 오히려 스키마가 의식의 영역에서 무의식의 영역으로 넘어가기는 하는 것인지 조차 완전히 명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의식과 의식의 영역이 이어져있다는 확인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두 영역이 완전히 별개의 것이고, 상호연결성이 전혀 없다면 무의식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생각의 도구를 어떻게 다듬을 것인가 하는 점에는 전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노력은 무의식의 영역에 닿을 수 없으니까요.
3. 두 겹의 사고과정에 대한 연결성의 실마리는 의외의 곳에서 발견됩니다. 조지 밀러(Miller)는 인간의 인지 과정을 컴퓨터의 정보 처리와 유사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컴퓨터가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에 제한이 있는 것처럼 인간이 한 번에 기억할 수 있는 정보의 양에도 제한이 있을 것으로 보고 이를 알아내고자 했습니다. 당시에 새로운 분야였던 정보이론을 심리학에 적용해 보려는 시도였던 셈입니다.
4. 밀러는 피실험자들에게 문자, 숫자, 단어를 무작위로 제시하고 각 항목을 순서대로 기억한 후 곧바로 회상해 낼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면서 제시하는 항목의 수를 점차 늘려나가면서 회상해 낸 항목의 수와 정확도를 측정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5~9개 정도의 항목을 기억해 냈고 그 중간값인 7개에서 한 두 항목 정도의 가감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냅니다. 이것이 마법의 수 7이라 불리는 인간의 단기기억용량입니다.1)
5. 밀러는 같은 실험에서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합니다. 제시되는 문자를 묶어 단어로 만들거나 단어를 그룹화하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개별 문자나 단어를 더 많이 기억하고 더 쉽게 회상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159216371945 같은 일련의 숫자를 1592-1637-1945처럼 몇 개의 덩어리(Chunk)로 묶는 방식이며 이것을 청킹(Chunking)이라고 부릅니다.
6. 청킹의 과정은 피실험자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가공해야 하므로 의식의 영역인 시스템 2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스키마의 활용과는 확연히 다른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보를 수용할 때 스키마를 사용한다면 정보 사이의 맥락이 고려되어야 하지만 청킹의 경우에는 무작위 한 숫자를 ‘맥락 없이’ 단순히 몇 개의 덩어리로 뭉쳤을 때에도 단기기억용량이 향상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7. 하지만 청킹이 스키마와 완전히 동떨어진 인지의 유형은 아닙니다. 주어지는 정보를 맥락에 맞게 뭉치는 경우 훨씬 강력하게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허버트 사이먼(Simon)과 윌리엄 체이스(Chase)의 체스 기억 실험이 잘 보여줍니다. 체스 전문가의 탁월한 능력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의문을 품었던 사이먼과 체이스는 전문가와 비전문가에게 체스 경기가 중반 정도 진행된 상태의 말의 배치를 5초 정도 보여주고 이를 기억하도록 했습니다.2)
8. 실험결과, 비전문가는 말의 위치를 4~8개 정도를 기억한 반면에 전문가는 대략 20~25개 정도를 기억해 냈습니다. 이런 차이는 비전문가가 말의 배치를 개별적인 위치정보로 기억하려고 했던 반면에 전문가는 말의 배치에서 공격과 방어의 수순을 발견하면 이를 하나의 청크로 인식하여 전체적인 배치를 3~4개의 청크로 묶어 기억했기 때문으로 밝혀졌습니다. 말의 배치를 공방의 과정이라는 맥락을 통해 기억했다는 점에서 스키마가 활용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3)
9. 체스 전문가는 시합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공방의 수순을 4~5번의 말의 이동으로 묶어 하나의 청크를 만듭니다. 이 청크는 게임의 맥락 속에서 전략적 의미를 가진 하나의 패턴으로 인식되어 스키마에 통합되는 것이죠. 이 단계는 시스템 2의 영역입니다. 체스에 숙련될수록 이 패턴에 익숙해져서 인식이 자동화되어 5초라는 극히 짧은 시간에도 패턴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청크는 시스템 1의 영역으로 넘어갔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0. 특히 체스 전문가가 말의 배치를 기억할 때 오류를 일으킨 경우를 살펴보면 청킹이 휴리스틱에 관련되어 있음이 잘 드러납니다. 전체적인 게임의 구조는 유지하지만 전략적으로 유사한 위치로 대체하여 배치를 기억하거나 이동의 수순에서 의미적으로 연관된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는 대표적인 휴리스틱 오류인 가용성 휴리스틱4)과 대표성 휴리스틱5)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오류가 청킹 단위로 일어난다는 점이 휴리스틱과 청킹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입니다.
11. 이처럼 청킹이 시스템 1과 시스템 2의 양쪽에서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두 시스템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두 시스템이 완전히 별개라면 한쪽에서 발견되는 정보처리방식이 다른 쪽에서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우니까요. 따라서 시스템 1의 휴리스틱이란 시스템 2의 ‘스키마의 파편’ 또는 ‘불완전한 스키마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2. 즉 어부의 통발(휴리스틱)은 무의식에서 사용되는 독립적인 도구가 아니라 의식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생각의 도구인 투망(스키마)의 일부가 물에 잠겨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처럼 통발이 투망의 반영이라면 투망을 올바로 관리하는 것으로 통발을 관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만약 투망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그 일부가 물에 잠겨있어도 물고기를 제대로 포획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김유신의 말이 기생집으로 향했던 것은 김유신이 기생집에 지속적으로 드나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투망(스키마)을 어떻게 다듬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다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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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eorge A. Miller <1956, The Magical Number Seven, Plus or Minus Two: Some Limits on Our Capacity for Processing Information, Psychological Review>
2) Chase, W. G., & Simon, H. A. <1973, Perception in chess. Cognitive Psychology>
3) 같은 실험에서 이동규칙을 무시하고 체스말을 무작위적으로 배치한 경우에는 비전문가와 전문가가 유사하게 4~8개 정도만 기억했습니다.
4)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 오류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사례를 과대 추정하는 오류를 말합니다.
5) 대표성 휴리스틱(Representativeness Heuristic) 오류는 특정 사례가 전형적인 범주의 특성을 대표한다고 판단하는 경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