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따라 걷다, 창덕궁에 닿다.
처음 역사를 공부할 때는 역사적 사건들의 인과관계가 흥미로웠다. 그러나 이제 역사를 강의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역사적 배경을 품은 유적지와 건축물은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며 인간의 삶을 묵묵히 바라본 역사의 증인들이다. 한 사람의 과거를 알면 그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깊어지듯, 문화유산의 역사와 맥락을 이해하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안의 가치와 아름다움이 새롭게 다가온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역사를 알고 보면, 전통문화가 낯설고 지루한 것이 아니라 선조들의 정성스러운 마음이 깃든, 우리 삶과 연결된 이야기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일까. 강의 중에 내가 느낀 감흥을 전달할 때마다 큰 즐거움을 느낀다.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눈을 반짝이며 안타까운 역사에 한숨을 짓고,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공감대를 나누는 순간, 나는 뿌듯함을 느낀다. 쉬는 시간에 다가와 “선생님 덕분에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알게 됐어요.”라며 인사를 건네는 아이들, “이제야 그 가치를 알겠다.”고 말하는 분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 나는 이 땅에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또 역사를 전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이런 나의 마음들을 모아 이번 독서 모임에서 유홍준 작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서울편 1>을 선택하였다. 이 책을 함께 읽고 서울 나들이를 떠나면 즐거운 시공간을 함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책은 크게 종묘, 창덕궁, 창덕궁 후원, 창경궁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에 나온 네 곳을 다 가면 좋겠지만 체력과 시간을 고려해 창덕궁과 창덕궁 후원 두 곳의 관람을 목표로 2주에 걸쳐 독서 모임을 진행했다.
그런데 1부 종묘편을 읽은 선배님들이 모두 유홍준 작가의 필력에 반해 종묘도 꼭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특히 서울에 사시는 분들은 그동안 종묘를 ‘노인들의 쉼터’쯤으로만 생각해왔음을 부끄러워하며, 종묘로 당장 달려가고 싶다고 했다. 마침 그 주 주말이 11월 첫째 주 토요일이라, 종묘에서 추향대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 선배님들이 다녀오셨다. 깊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종묘 정전에서 거행된 제례의 사진과 영상을 공유해주셔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종묘와 제례를 집에서도 감상할 수 있었다. 월대 위에서 펼쳐진 제례의 장엄함과 경건함에 감동했다는 선배님들의 이야기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나 또한 내년 봄, 춘향대제를 꼭 보러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일주일 후, 드디어 책을 완독하고 창덕궁과 후원을 찾았다. 운 좋게도 독서 모임 일정이 코리아 그랜드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과 겹쳐 창덕궁 입장이 무료였다. 그러나 후원 관람은 사정이 달랐다. 온라인 예매가 치열해 모두 실패했지만, 서울 선배님들이 새벽부터 현장에 나가 줄을 서 주신 덕분에 후원 입장권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비 예보가 있었는데, 이날은 놀랍도록 맑고 따뜻했다. 행운의 여신을 우리 편으로 만든 기분이었다.
창덕궁에 도착하니 가을이 절정이었다. 청명한 하늘 아래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돈화문을 더욱 빛나게 했다. 창덕궁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려 건물이 남북의 일직선 축을 벗어나 배치되어 있다. 진선문과 인정문을 차례로 지나 도착한 인정전은 왕의 즉위식과 외국 사신 접견 등 국가의 공식 행사가 열리던 곳으로, 전통적인 천장의 봉황무늬와 어좌는 그대로지만 근대식 커튼과 전등이 더해져 묘한 시대의 공존을 보여준다.
숙장문을 지나면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빈터와 함께, 저마다 다른 형태의 지붕들이 시선을 끈다. 청기와를 얹은 선정전은 본래 왕의 편전이었으나, 순조가 정조의 혼전으로 사용하며 중앙에 복도각이 세워졌고, 이후 희정당이 편전으로 바뀌었다. 순종 시기에는 외국 손님을 맞이하는 접견실로 사용되며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는 필로티 구조로 개조되어, 마치 호텔 입구 같은 인상을 준다. ‘대통을 이을 왕자를 낳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은 대조전은 왕비의 생활 공간으로, 내부의 자개 소파가 눈길을 끌었다. 세자가 공부하던 성정각에는 정조가 직접 쓴 ‘희우루’ 현판도 걸려 있다.
후원 관람 시간이 되어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 프랑스 건축가가 말했듯 ‘한국의 전통 건축은 건물이 아니라 풍경’이라는 표현이 실감났다. 단풍과 어우러진 후원의 자연스러운 조화는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유홍준 교수님 말씀처럼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 규장각, 주합루, 영화당이 마치 거실의 가구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숙종 때 조성된 애련지와 정조의 친필이 새겨진 존덕정도 돌아보았고 불로문은 아쉽게도 금이 간 채 보호 중이었다.
후원을 나와 낙선재로 향했다. 헌종의 사랑으로 만들어지고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가 마지막까지 머물러 조선왕조 왕손들이 창덕궁와 인연을 맺은 마지막 공간이었던 낙선재를 마지막으로 창덕궁을 나왔다.
아름다운 가을날, 아름다운 창덕궁에서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은 오래도록 내 마음을 따뜻하게 다듬어줄 것이다. 역사는 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 안에도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오늘의 내가 어제의 시간을 만나 한층 깊어진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