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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X <바람이 분다>– 이소라

천금 같았던 추억이 담겨져 있던 머리 위로 바람이 분다

by 박소형

어릴 적 사진 한 장의 배경에서 배우자의 어린 시절 모습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당시엔 서로 모르는 사이었는 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시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에 보이지 않는 운명의 실로 연결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흐릿한 배경에 불과했던 사람이 현재 내 삶에 점점 중요한 실존으로 자리 잡게 되어 단순한 우연이 인연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운명론을 믿고 싶게 만들었다.


김금희 작가의 소설 <경애의 마음>이 바로 그렇다. 주인공 경애와 상수에게 각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친구 은총을 공통분모로 과거에 흐릿한 배경과 같은 존재였지만 서로의 시간이 따로가 아니라 함께 흐르는 사이가 되어가는 이야기다.



경애와 상수는 같은 미싱 회사에 다니고 있었지만 다른 부서에 근무하다가 같은 팀원이 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어 오피스 소설인가 했다. 그러다 경애가 회사의 부당한 구조조정에 항의하기 위해 삭발하고 파업했던 과거의 이야기가 나와 노동 소설인가 싶었다.



파업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끝나버린 게 경애가 파업기간 동안 일어난 성희롱을 노조 측에 항의했기 때문이라는 내용을 보고는 여성 소설이었구나 했다. 1999년에 실제로 일어났던 인천 호프집 화재 참사에서 절친 은총을 잃고 살아남은 경애의 힘든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사회적 사건을 주제로 한 연대 소설이었구나 싶었다. 경애의 전 남친 산주의 배신과 결혼 그리고 결혼 후에도 지속적인 만남으로 흔들리는 경애의 마음을 보면서는 연애소설 같기도 했다.



한 편으로는 음악 소설인가 싶기도 했다. 이 책에는 팝송, 가요, 베트남 노래까지 17곡의 음악이 나오는 데 찾아오며 챙겨 듣는 재미도 있었다. <경애의 마음 play list>라는 유튜브 영상이 따로 있을 정도다.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경애와 산주의 만남과 헤어짐을 따라가다 보니 이 노래가 떠올랐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예전에는 이 노래는 그저 슬프고 우울한 느낌이 전부였다. 그런데 나이 탓인지, 계절 탓인지, 책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엔 음악을 들을 때 음만 들었다면 요즘은 가사에 집중한다. 가사를 중심으로 듣다 보니 이 곡은 마치 경애의 마음 같았다. 특히 2절이 그렇다.


이소라 작사 <바람이 분다>



소설 속 경애의 마음에서 이 노래를 듣다 보면 차갑게 돌아서서 다른 이와 결혼한 산주의 모습이 떠오른다. 경애에게 산주와의 사랑은 비극이었고 산주와 경애의 마음은 같지 않았고 서로 다른 감정과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이별은 경애의 의지에 상관없이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지지만 세상은 아무 일 없이 흘러간다. 경애의 삶은 완전히 무너지고 변화했는데도 말이다. 경애에게는 산주와의 시간이 천금 같았던 추억이었지만 그저 과거일 뿐이고 찬 바람만이 현실을 자각하게 해 준다. 발표된 지 20년이 넘은 이 노래의 가사는 한 편의 시였다. 이소라는 가수인 줄만 알았는 데 시인이자 철학자였다.



다시 소설로 돌아와서 또 다른 주인공 상수는 부와 권력을 갖고 있던 전 국회의원 아버지 덕분에 미싱 회사에 취업한 낙하산이지만 부조리한 세상에 휘둘려서 살아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인물이다. 능력은 없지만 회사에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도 하고 베트남에 파견을 나가서도 정당한 방법으로 영업을 한다. 상수는 자신이 언니인 척 <언니는 죄가 없다>라는 연애 상담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우연히 경애의 연애 상담을 해주고 회사에서 마주 보는 경애를 안타까워한다.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강변북로를 혼자 달려 돌아올 수 있잖습니까.
건강하세요. 잘 먹고요. 고기도 좋지만 가끔은 채소를,
아니 그냥 잘 지내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
p176


상수의 영업팀 유일한 팀원이었던 경애, 상수의 절친 은총이 좋아했던 여자친구 경애, 나쁜 남자 산주와의 만남을 밀어내지 못하는 경애. 그녀를 바라보던 상수의 마음에 경애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결국엔 경애와 상수 사이에 있던 인연의 퍼즐이 밝혀지면서 듣지 못한 서로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끝이 난다.


<경애의 마음>을 끝까지 찬찬히 들여다 보고 나니 우리의 삶은 여성(혹은 남성)이면서 노동자이면서 오피스에 근무하면서 연애도 하면서 음악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마치 이 소설 속 경애의 삶처럼. 경애와 상수가 깊은 대화를 나누며 마무리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은 비로소 서로의 흐릿한 배경 속에서 걸어 나와 자신들의 인연을 마주 보게 되었다. 차가운 세상 속, 그들은 이제 서로의 마음을 덥히는 따뜻한 바람이 되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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