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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 Oct 24. 2017

비자림과 사려니

제주일기

[제주일기]

2017. 08. 12. 

10. 비자림과 사려니 


  비자나무 숲. 각 나무들이 가지고 있는 웅장함과 건실함도 매력적이지만 나무들 사이의 공간, 어우러진 가지들, 흙길, 숲의 향기와 분위기를 알게 되면 비자림 자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맑은 날, 비오는 날, 흐린 날. 세 차례 방문했는데 항상 달랐다. 숲은 고정된 무언가가 아니라 매순간 움직이는 자연이었다.


  역시 비 내릴 때가 가장 좋다. 폭우가 가랑비로 약해지자 비자림을 걷기 시작했다. 어슴푸레한 시야와 물안개, 온통 진동하는 비자나무 냄새. 뿌리와 줄기가 꿈틀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숲이 요동을 쳤다. 너나할 것 없이 굵고 거대해서 보통 세월을 산 것이 아니겠구나 싶었다. 양 팔을 벌려 끌어안아도 두를 수 없는 몸집. 절묘하게 뻗은 뿌리와 줄기, 가지들. 매끈하거나 이끼가 덮여있는 아름다운 표피. 한 눈에 다 볼 수 없어 고개를 젖혀야하는 비자나무들. 


900살 된 핸섬그랜드파파 비자나무 (feat. 비자림 해설가 선생님)


  가장 나이 많은 할아버지 비자나무가 900살인데 앞으로 100년은 거뜬히 더 살 것이라고 한다. 100년을 채 못사는 인간이 얼마나 하찮고 연약한지. 슬프거나 한탄스럽지는 않고 이상하게 유쾌했다. 인간은 무한한 존재가 아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스러지게 되어있다. 통쾌하기 짝이 없었다.


  숲을 걸으니 불규칙한 나무들에서 리듬감이 느껴졌다. 가까이 있는 나무 너머로 크게 자리 잡은 나무. 그와 손이 닿을 듯 말 듯 이웃한 나무. 자신의 자리를 알맞게 차지하면서도 사이좋게 어우러져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성이 차지 않아 만져보고 등을 기댔다. 나무가 스며들었다. 40분 걸린다는 탐방로를 2시간에 걸쳐 걸어도 아쉽기만 했다.



  사려니 숲은 다녀왔다고 하기 민망하다. 입구에서 30분 정도 본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서귀포에서 구좌로 넘어가기 위해 1118번 도로를 타고 가던 중, 숲의 기세가 바뀌는 지점이 있었다. 평범한 숲이었는데 갑자기 위로 곧고 높게 뻗은 빽빽한 삼나무 군락이 나타났다. 붉은오름에서 물찻오름 쪽으로 들어가는 ‘사려니 숲길 입구’였다. 일렬로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는 것을 보니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인 것 같았다. 졸참나무, 서어나무, 단풍나무 등 천연림과 인공으로 심은 편백나무, 삼나무로 이루어진 것이 사려니 숲길이라고 하니 숲의 가장자리였던 것이다.


  삼나무 숲 한가운데. 나무의 끝이 하늘을 뒤덮어 어둑어둑한데도 짙은 녹색과 고동색의 나무가 강렬했다. 검붉은 흙과 어우러져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멧돼지가 나오니 조심하라는 표지판. 멧돼지뿐만 아니라 신화 속에 등장할 법한 늑대나 사슴, 곰이 나타날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두렵고 무서운 것이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다른 곳을 가던 길이었기에 입구에서만 조금 보고 나왔다. 뒤돌아 나오는 발걸음이 무척 아쉬웠다. 숲에 이토록 끌리는 이유는 왜일까. 생태학자가 되고 싶었던 오래전 꿈을 떠올리면서 숲 해설가로 사는 것은 어떨까,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들을 했다.     


2017. 08. 1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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