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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 Jun 27. 2018

제주 버스기사님들의 재치

제주일기

[제주일기]

2017. 07. - 08.   

14. 제주 버스기사님들의 재치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다보니 버스기사님들과의 만남은 필연적이었다. 제주 대중교통 체계가 2017년 8월 26일부로 바뀌었으니 이것저것 설명해봤자 쓸모없는 정보지만 버스노선이야말로 과거의 제주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창일 것이다.


  먼저 제주를 동, 서로 반을 나누어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동일주 버스, 서일주 버스가 있다. 이 버스들은 해안가를 따라 형성되어 있는 마을들을 순환한다. 그래서 관광버스가 아님에도 자연스럽게 해안을 따라 달린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다보니 20분마다, 제주 치고는 빈번하게 다닌다.


  해안에만 사람이 사는 것은 아니고 한라산 중턱으로도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제주 사람들은 한라산 중턱을 중산간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중산간 마을을 다니는 버스가 읍면순환버스다. 중산간 마을 사이사이에 펼쳐진 오름, 숲, 말 방목지, 계곡, 동굴 등 관광지들도 노선에 포함되어 있다. 이용하는 사람이 적어서 그런지 하루에 12대에서 14대 정도만 운행을 한다. 버스 배차 간격이 짧게는 1시간에서 2시간까지 벌어지기 때문에 시간표를 잘 보고 이용해야 한다.


  그 외에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해안도로가 아닌 한라산 도로로 다니는 버스들이 있다. 돌아가지 않으니 빠르긴 하지만 산을 넘어가는 길이라 경우에 따라서는 위험하다. 공항버스도 이중에 하나다. 제주시와 서귀포시 내에서만 다니는 시내버스도 있는데 이들은 뭍의 여느 도시버스와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차가 없으면 숲, 오름을 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제주 어디든 대중교통으로 다닐 수 있다.



  시내버스를 제외하고 제주에서 버스를 탈 때는 항상 행선지를 말해야 한다. 거리당 요금이 붙기 때문이다. 8월 26일 이후로 거리당 요금 개념이 사라졌다. 이제 어디를 가든 동일 요금을 낸다. 행선지를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버스기사님들과 말문을 틀 수 있었는데 아쉽게 됐다.

  버스기사님들은 외지인과 대화할 때 능숙하게 서울말을 쓴다. 내가 서울보다 더욱 표준어를 쓴다는 인천 사람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기사님들은 그 어떤 억양의 흔적이 없는 표준어를 쓰셨다. 그랬던 기사님이 내 옆에 앉은 할머니와 사투리를 마구 쏟아내며 대화 할 때의 배신감이란. 목소리 톤과 억양, 심지어 음색까지 변하는 기사님들도 있었다.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기적. 아무것도 못 알아듣겠는 제주말.



  만장굴과 비자림에 가기 위해서는 990번 읍면순환 버스를 타야 한다. 8월 8일, 평대 모살코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평대초등학교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만장굴이요.”


  아침일찍 세화에서 일 보고 들어가시는지 버스에는 대여섯 분의 할머니들이 계셨다. 송당리에서 우르르 내리시자 버스에는 나 혼자였다. 40분을 우거진 숲을 달려 만장굴에 도착했다. 일부러 버스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즐기고 떠나고 싶을 때에 맞춰 탈 생각이었다. 만장굴을 실컷 구경하고 990번을 다시 탔다.


  “비자림이요.”


  내 뒤로 중동 여행객들과 중국인 커플, 오름을 구경하려는 한국인 젊은 여자 둘이 있었다. 중동 여행객들은 김녕해수욕장에 가려고 했는데 이 버스는 그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아니었다. 세화로 가는 버스를 타고 김녕을 가자고 하면 어떡하나. 버스정류장이 하나이고 시간에 따라 버스 방향이 다르니 헷갈릴만 했다. 게다가 외국인 아니던가. 오름을 가려는 여자들도 잘못 타긴 마찬가지였다. 그 방향으로 가는 버스는 1시간 반 뒤에 온다는 기사님의 말에 승객들이 그냥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그들의 계획을 백지화 시키고 미지로 데려갔다.


  30분 정도 중산간을 달려 비자림입구 정류장에서 내렸다. 오후 4시 쯤 도착했기에 막차시간을 확인했다. 중산간은 해가 빨리 지고 버스도 빨리 끊긴다. 6시에는 나와야 할 것 같았다. 비자림 구경을 다 하고 빈번하게 오가는 택시들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평대가 가까워서 5천원이면 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비자나무열매 차를 파는 카페가 있었고 버스 시간이 30분 남아있었다. 차를 즐기라는 계시겠지. 6시, 또 990번 버스를 탔다. 평대로 갈까 세화로 갈까 고민을 했는데 서귀포로 돌아가야 하니 조금이라도 가까이 내려야겠다 싶었다.


  “세화요.”


버스의 마지막 코스인 세화읍에 들어서자 승객은 나 혼자였다.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어디서 내리실 거예요?”

  “사실 제가 동일주 타고 서귀포 갈건데 그 전에 세화에 내려서 저녁먹고 가려고요. 어디서 내려야 좋을까요?”

  “아무래도 세화시장에 먹을 데가 많겠죠?”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가씨 오늘 내 차만 세 번 탄 거 알아요?”


  깜짝 놀랐다. 아저씨와 함께 웃음이 빵 터졌다. 알차게도 구경한다며. 혼자 여행한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오늘 하루 종일 990번 버스기사님과 함께였다. 신기한 인연. 정말 감사했다며 배꼽인사를 몇 번이나 했다. 아저씨가 정류장에 내려주며 잘 가라고 인사해주셨다. 만장굴과 비자림도 좋았지만 그 중에서 990번 버스기사 아저씨가 제일 좋았다.



  8월 15일, 김영갑 갤러리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신서귀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동일주 버스를 타고 삼달교차로에서 내려 20분 정도 걸어가는 방법이 있었고 910번 읍면순환 버스를 타는 방법이 있었다. 910번 정류장은 갤러리에서 비교적 가깝긴 하지만 읍면순환답게 배차시간이 길고 빙빙 돌아가느라 시간도 오래 걸렸다. 고민하면서 터미널에 갔는데 마침 910번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동이 꺼진 버스 앞에서 타려고 기다리고 있으니 버스기사님이 슬슬 다가와 호기심 반, 놀라움 반으로 말을 건넸다.


  “어딜 가는데 이걸 타요?”

  “두모악 김영갑 갤러리요.”

  “아~ 이걸 타야지. 근데 엄청 멀어요.”

  “하하, 네, 저도 알고 있어요.”


  역시나 버스에는 나 혼자였다. 두 번째나 세 번째쯤 앉는 것을 선호하는데 맨 앞자리가 풍경을 구경하기 가장 좋다는 말을 서일주 버스기사님께 들은 터라 맨 앞에 앉았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여기셨는지 이것저것 말을 걸어오셨다.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 사람인지 대략적으로 파악하시자 거기에서 가지를 뻗어나가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쇠소깍 가봤어요? 남원은? 제주가 가볼 곳도 많고 좋아. 이시돌 목장은 가지 말고 마방지 가봐요. 거기가 제주 야생말들 방목지야. 진짜 제주 말들이지. 돈 비싸게 주고 구경하는거 그런 데는 가지 말고 도에서 관리하는 곳들, 정방폭포, 사려니, 비자림 이런데 가요. 그게 진짜 제주를 보는 거지. 김영갑도 좋아.


  중간중간 타고 내리는 마을 어르신들과 제주 사투리로 대화하는 모습도 재미있어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버스기사님과 세상만사 수다를 떨다보니 어느덧 승객은 나 혼자였다. 내릴 때가 다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류장을 확인하려는 순간, 갑자기 기사님이 버스를 세웠다.


  “여기가 김영갑 갤러리야. 멀리까지 온 거 아까우니까 이따가 이거 타고 성산 나가서 광치기 해변도 보고 가고 그래요.”


감사 인사를 하고 얼떨떨해서 내려 보니 정말 김영갑 갤러리 입구였다. 정류장도 아닌데 바로 앞에 내려주고 가셨다. 김영갑, 푸하하 김영갑이야.


  센스 있는 910번 기사님 덕분에 택시를 타고 온 것처럼 갤러리에 들어갔다. 구경을 다 하고 나오면서도 훈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오는 길, 버스 노선 때문에 헤매는 뚜벅이 여행객이 보였다. 먼저 다가가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잘 아시네요, 제주 분이세요?”

  “아니요, 저도 여행객이에요.”


제주를 사랑하는 버스 기사님들에게 사랑받는 여행객.


2017. 07. - 08.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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