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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 Aug 24. 2018

벌써 일 년

2018-08-24

  제주에서 인천으로 돌아온 지 일 년이 되었습니다. 제주에서 한 달여 동안 지냈는데 떠나게 한 힘은 무엇이었고 다시 돌아온 힘은 또 무엇이었는지 되짚어 보고 싶어 글을 남깁니다. 제주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자발적 백수’라는 부제로 열편의 짧은 글을 썼습니다. 스물아홉 살 때 아버지 신장이식을 해드려야 하는 상황에 처했었는데 그 일로 우울증이 심각해져 갖은 방식으로 난리를 부리다가 서른 살의 여름, 회사를 그만 두고 제주로 떠났습니다. 제주에 정착을 할까라는 생각도 적당히 하면서. 그 당시에는 미래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과 같이 있는 것이 너무도 힘들어서 일단 현실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생각뿐만 아니라 하늘이 노래지는 경험이나 구체적인 상상, 울고 소리 지르기 등등 이상행동을 반복하다 자연스럽게 ‘아, 나는 지금 여기를 떠나야 하는구나.’ 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좋지 않은 상태에서 요양을 하러 간 것이라 ‘제주일기’가 그렇게 발랄하고 즐거운 분위기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마흔 명이나 되는 분들이 구독해주셔서 정말 놀랐고 감사했습니다. 여행 콘텐츠라서 가볍게 보기 좋으니 구독해주신 것일 테지만. 저에게는 우울과 분노의 한 가운데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찾기 위한 발악이었습니다. 우울한 것은 우울한 대로 드러내고 즐거운 것은 즐거운 대로 드러내어 조금이라도 제 존재가 여기 있음을 알리려 한 것들이었습니다. 말로는 죽고 싶다 죽고 싶다 해도 저는 제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끝까지 놓지 못한 것이 글쓰기였습니다. 글로써 저라는 총체를 완벽히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글은 아주 오래전부터 저에게 친숙한 표현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독자가 한 분 한 분 늘어날 때마다 좋아요 한 번 눌러주실 때마다, 사랑을 하나 더 받는 기분으로 행복해했습니다. 나라는 사람이 어느 날 어느 시에 이런 일들을 했고 어떤 생각과 느낌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있구나. 내가 완전히 혼자는 아니구나. 라면서요. 관종입니다.

  작년 8월 말에 인천에 돌아와서 2017년의 하반기는 지옥으로 보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지내다보니 우울증이 가시지를 않고 오히려 더 심각해졌습니다. 가족들과 부딪칠 때 분노를 있는 그대로 가족들에게 표현한 경우가 많았는데 ‘나를 세상에 내놓은 것이 당신들이니 당신들이 다 책임져라’ 이런 어린애 같은 심정으로 악다구니를 쳤습니다. 악다구니를 치면서도 양심의 가책은 단 한줌도 안 들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 너무도 심각한 착한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어디서나 모범적이었고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했고 부모님 은혜에 감사한다는 편지를 부모님께 수시로 썼었습니다. 도대체 그 때의 나는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가지만.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착한 딸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공부한다고 부모님께 성질부리며 집에서는 내가 왕인 것처럼 행동했으니까요. 공부에 방해되는 것에 전부 성질을 부리면서요. 아버지는 항상 집에 늦게 들어오셔서 별로 부딪치지는 않았는데 어머니가 공부 잘하니 그래도 된다는 식으로 다 받아주셨기 때문인 걸까. 응석받이로 큰 것일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랬으면서 왜 나는 나 자신을 효녀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것도 의문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얻으려 어쩔 수 없이 열심히 하면서 그 반동으로 생기는 분노나 화를 그것을 시킨 사람들에게 표출했던 것일까,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면 부모님이 나에게 공부를 잘 하라고 그렇게 많이 압박을 줬는지 되돌아보면. 

  폭력을 사용하여 압박을 심하게 주었습니다. 공부를 알아서 하게 된 중학교 이후에는 그러시지 않았지만 초등학생 때 어머니는 매를 들면서 공부를 시켰고 우울증이라는 심리적 협박수단으로 말을 듣게 만들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집안일이든 회사일이든 그 어떤 것도 전부 손에서 놓고 침대에만 하루 종일 누워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에 대해 내가 어떤 방식으로 반응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무엇이든 열심히, 내가 더 잘 해야만 돼’ 라고 했던 것은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더욱 구체적인 상흔을 남겼습니다. 386세대의 가장에게서 아주 흔하게 보이는 모습인데, 가족들을 때리지는 않았지만 가벼운 알코올중독으로 퇴근하고 돌아오면 집안 세간을 전부 부수고 가족들을 자신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했었습니다. 아버지를 무서워하면서도 분노나 비웃음, 반항, 안타까움, 사랑 같은 것들도 한 데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공부를 점점 잘하자 고2 가을 쯤, 아버지는 저보고 서울대를 들어가지 못하면 자신이 확 죽어버릴 것이라는 협박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불에 덴 듯 이게 뭐지? 했지만 아버지의 협박이 저의 심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10년도 넘게 지난 지금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는가에 아버지의 목숨이 달려있다는 생각에 아버지를 살리기 위한 행동, 도를 지나친 공부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서울대에 못 간다고 아버지가 정말 죽을까? 그건 말도 안 된다며 반항할 만 했는데. 워낙 여려 충격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그런 방식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나는 너무도 여린 성격이었습니다. 과격한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고 거짓말도 다 들통이 났었고, 그 흔한 욕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아버지의 협박에 그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 협박을 내면화 했습니다. 내 목숨에 다른 사람의 목숨이 엮여있다는 주입된 믿음에 나 자신은 내팽개치고 일단 다른 이의 목숨부터 구제했습니다. 내팽개쳐진 나는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어디든지 파편화되어 살고 싶다고 악다구니를 썼겠지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에 가긴 갔는데 서울대는 못 갔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자살하지 않으셨고요. 

  대학에 갔을 때는 지난 고생 다 잊은 것처럼 새 출발 하는 것 같았습니다. 성인이 되어 비틀비틀 걸어도 재미있게 대학생활 하고 사회인으로 잘은 못해도 그래도 열심히는 하고 있었습니다. 10년이 흐르고, 아버지가 신장 이식을 받아야 하는 상태가 되자 묵혀있던 문제가 터져 나온 것입니다. 아버지 신장 이식을 해 드리는 일이 분명, 장기를 뗘내는 일이니까 무섭고 힘든 일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그 일로 왜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드는가. 차라리 신장을 주기 싫으니 아버지와 연을 끊고 가족들에게서 도망쳐 사는 거면 모를까. 신장을 주는 대신 돈을 달라고 해서 죽을 때까지 일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던가. 그런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었는데 나는, 신장 한 쪽을 뗘낸 다음에 살아갈 자신이 없다. 그냥 죽어버리자. 이런 방식으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신체 건강에 자신이 없어서였을까요. 내 몸을 끔찍이 여기는 사람이라 그랬을까요. 일견 맞는 말입니다. 여린 마음은 여기서도 작동을 하여, 몸이 위험에 노출 되는 것들을 잘 못하거든요. 운동 신경도 거의 없다시피 하고. 

  무엇보다 고등학생 때 대학 못가면 죽어버린다고 협박한 것처럼, 아버지는 똑같은 방식으로 협박했던 것입니다. 신장 이식 안 해주면 나 죽을 거야. 라고. 실제로 자살소동도 벌이셨으니 빈 말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죽는 다는 것이 얼마나 쉬우면서도 어려운지 계속 목격합니다. 자신이 짊어진 삶의 짐을 다른 이에게 죽는다는 협박으로 해결해 달라 찡찡거렸던 것입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관계를 인질로. 아버지의 그런 면과 나의 유약한 심성이 딱 맞아 떨어져 정말 아버지에게 삶을 저당 잡힌 상태였습니다. 살기 싫은 아버지를 살게 하는데 에너지를 다 써서 우울증이 온 거였어요. 나도 살고 싶지 않아진 거였어요.  

  그래서 이걸 아는 게 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런 걸 글로 굳이 남겨서 뭘 하겠다는 건지. 아무 의미 없는, 아무 쓸데도 없는 말들만 많이 한 것 같아요. 제주에서 인천으로 돌아온 얘기로 다시 돌아오자면, 작년 8월 이후 인천에서 거의 은둔을 했는데 이상하게 사회복지사가 하고 싶어서(이전 직장이 노인요양원이었던 영향력이 큰데, 그래도 노인보다는 아동, 청소년 쪽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컸습니다. 아마, 벗어나지 못한 나의 상처를 사회복지사라는 행위를 통해 치유하고 싶었던 것이겠죠) 사이버대학으로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를 했습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기까지 한 학기 정도 남겨두고, 2018년 들어오면서 아동들과 만날 수 있는 일을 찾아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알바라는 말은 뭔가 싫으니 프리랜서라고 합니다. 일을 시작한 것은 돈이 급해져서 이기도 하고, 뭔가 에너지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극소수의 친구들만 만나고 은둔했던 작년과 비교해서 말이에요.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에너지가 조금은 생겨서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일을 잘 하기 위한 노력에 정신을 팔았고 또 짧은 연애도 살짝 했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현저하게 줄었습니다. 상반기까지는 가끔 했었는데 여름 들어오면서는 아예 사라졌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해야지’ 해서 하고, ‘하지 말아야지’ 해서 하지 않게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병처럼, 불가항력으로 왔다가 슬그머니 나가는 것 같습니다. 작년 12월 세상을 뜬 샤이니 종현씨 생각을 종종 합니다. 암이나 그 밖의 병으로 죽는 것처럼 자살은 마음의 병으로 맞이하는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읽다가 말긴 했는데, 작년에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을 봤었어요. 우울증은 빠져나오기가 너무도 어렵습니다. 

  우울의 원인이 아버지라면, 아버지가 잘 살든지 말든지 이제 신경을 끄고 나 잘 사는데 신경을 쓰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제주 다녀온 이후로 마음을 그렇게 다잡은 듯합니다. 이식은 절대 안 해줄 것이다. 억하심정이 다 사라져서 아무런 보상심리가 안 드는 상태가 되지 않는 이상. 이식을 해주어야 한다는 마음은 죄책감, 나를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를 살게 해야 한다는 마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이식 해주지 않을 겁니다. 나는 내 몸뚱이 하나 제대로 건사하고 있지도 못하니까요. 이식을 해주고 삶이 완전히 망가져 요양원에 평생 누워있거나, 자살한다거나 그런 상상 속에는 나를 위해 울어줄 많은 이들의 얼굴이 있습니다. 나를 안타까워하고 보고 싶어 할 사람들. 지인들의 사랑을 인질로 삼는 짓은 안할 겁니다.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서 다른 이들에게 한껏 동정 받아 영혼의 허기를 채우려는 마음도 버릴 겁니다. 그건 자신의 삶의 짐을 타인들에게 떠넘긴 아버지가 한 짓과 같은 짓이니까요. 우선 살기 싫다 난리 버거지를 부리는 나 자신부터 슬슬 달래면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그럴 겁니다. 그러고 있습니다.  

  연재로 할 만한 괜찮은 콘텐츠가 생기면 또 올리기 시작할 것 같습니다. 그게 언제가 될지, 어떤 내용이 될지 전혀 모르지만. 브런치, 나름 아끼는 공간입니다. 사진이랑 글이랑 정리가 잘 되어 보기도 편하고 깔끔하기도 하고요. 구독해주신 분들께 감사 겸, 제 자신에 대한 정리 겸 썼습니다. 그 어떤 생명도 홀로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한히 감사합니다. 

3년 째 지켜보고 있는 나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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