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 로맨티시즘

inevitable.

by 이븐도




아, 그러니까 연애 하라고.

연애.






주토피아 2를 봤다. 합동 근무를 빙자한 닉과 주디의 초거대 스케일 데이트 구경. +1 하자면, 주디의 최종 남자친구 찾기.. 가 될 뻔했던 것.

로맨스의 0번째 공식? 불균형. 비관적인 한 명과 긍정적인 한 명, 정서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궁핍한 쪽과 아닌 쪽. 달아나는 쪽과 쫓는 쪽. 시소처럼 높낮이가 달라 흐르기 쉽고 채우기는 더 쉬운 것. 모든 방식의 난기류, 혼란, 파열, 충격. 그리고 그 불협화음의 연속을 교류라는 이름 아래 감내하는 것. 언제까지? 상대가 내 앞에서 더 이상 반짝이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시점 너머까지. 아무튼 둘은 연애 중이다. 연애.


이브날 밤을 지난 성탄절 새벽. 쪼끔 추웠다. 별이 엄청 잘 보였다. 23000원을 주고 중간에 나와 버린 4DX 아바타3 속 풍광보다 더 멋진 하늘을 봤다. 잠시 서서 고개를 쳐들고 이쪽 저쪽으로 틀며 별인지 인공위성인지 모를 것들을 셌다.




그리고 연애를 해야 하나 떠오르는 순간. 그렇게 하늘이 너무 예쁠 때. 이런 걸 나란히 보려면, 랜덤 중에 랜덤일 기상상황과 내 근무요건을 고려할 때 대체 몇 번의 달리기를 함께해야 하는 건지 궁금했다. 대체 누굴 어떻게 만나야 이런 걸 한 번씩 보고 웃을 수 있을까. 소개팅으로 상대를 이십 번쯤 서로 고르고 나면? 동호회에 들면? 아니면 지나는 사람 아무나 붙들고 여자친구 있으세요 묻기? 사실 그런 발상조차 얼마 못 뻗어갈 정도로 좋다. 그 순간이 그렇다. 아, 누군가와 이걸 아무 말 안 하고 같이 보고 또 달리면 좋겠다, 고 생각하는 때.


적당히 영하로 떨어진 기온, 아주아주아주 짙은 남색인 하늘. 사실 엄청나게 오래전의 순간이 지금에 닿은 거라는 저 빛들이 춥고 깨끗하게 보이는 장면 속에 선 감각. 카톡으로 사진을 찍어 보내는 걸로는 아까운 그 차게 반짝이는 시간.






며칠간 병원 생각을 안 했다. 좋았다. 이럴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가 놀라웠다. 나는 병원이 과연 내 인생관이나 일상에 얼마나 스며 있는지 궁금해졌다. 지긋지긋했다. 죽고 사는 사람들, 안 보고 싶은 장면들. 일은 일인데 말이야. 데이, 이브, 나이트 근무가 끝나면 다 잊어야 하는 거. 근데 그게 돼? 사원증만 처박아 놓는다고 그게 될 리가. 그러니까 사실은 생각 자체를 안 했다는 게 맞다. 유익했다.


나 포함 입사 동기 네 명이 모인 단톡방은 얼마 전 나솔방이 되었다. 나만 솔로 방이라는 뜻이다. 가장 최근에 남자친구가 생긴 그녀는 데이트를 한다. 데이트. 영화관이 열 개는 깔려있을 성남을 벗어나 굳이굳이 분당에서 한 시간은 넘게 떨어진 용산 CGV에서 시간을 보내는 거. 물론 혼자 말고. '그' 사람과. 그리고 그들은 데이트 일화들에 말을 얹는 내게 묻는다. 넌 연애 안 해? 말하자면 화제 전환용 안부 인사.




주디와 닉은 내내 서로에게 묻는다. 우리가 잘 맞는 파트너인지 아닌지를. 그들 스스로도 알듯 둘은 정반대다. 파트너?사실 그 단어 아래서조차, 본색을 드러내기 직전까지의 그 녹색 니트를 입은 재벌집 아들내미가 주디와 더 잘 맞는다. 주디는 에너지와 행동력은 있지만 자본이 없고 기복이 심하다. 그 스파이 고양이는 어쨌든 돈이 많다. 안정적인 성향을 보이는 대신 아이디어나 신념은 강하지 않다. 주디를 서포트하기에 딱이다. 록.. 앞잡이였지만.


그러나? 주디는 정작 그와 함께 있을 때는 파트너가 어쩌니저쩌니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정황상 누가 봐도 주디는 정서적 회피형에 매 언행이 비꼬기의 연속인 까칠한 닉보다는 그와 잘 맞는데. 커플 뭐 이런 거 말고, 임무 수행에 있어서도 그와 더 시너지를 내기 좋다. 그러나 둘은 그러지 않지. 대신 하나도 안 중요한 물건이며 순간마다 서로를 떠올려 그걸 또 둘 사이의 추억으로 만든다. 논리보다 마음이 먼저 가 있는 사이. 이래도, 사귀는 게 아니야? 그래놓고 서로 사랑한다고 장난을 친다고? 귀여웠고 재밌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잘 해라, 그렇게 다른 서로를 열심히 이해하라고. 그 사랑이 유효할 때까지.






친구가 생일 선물로 뉴이스트 앨범을 줬다. 정규 2집. 제목이 로맨티사이즈. 아이돌 곡들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이거 누구 생각하면서 썼을까 또는 불렀을까. 그 곡의 실제 작사가든 그 파트를 부른 멤버들이든. 나는 사물함에 들어 있던 그 앨범을 뜯을 수 있기를 고대하며 섬망의 한가운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할아버지들을 향해 팔자에도 없는 수련회 교관마냥 일어나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 하지 말랬죠, 누구님, 뭐가 어쩌고.. 를 고압적인 목소리로 반복했다.


그 밤을 그렇게 버텼다. 그 기억이 고마워 그녀의 사물함에 간식거리를 넣어 두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사내연애를 하는 것 같다는 메신저를 며칠 후 보내왔다. 자기야 내가 광교에 방 세개짜리 집 살 수 있게 노력할게 요새 신혼 특공 잘 나온대, 하면서. 셋은 고사하고 한 칸짜리 방 관리비에 벌벌 떠는 나한테. 동시에 생각했다. 얜 연애 안 하나. 근데, 연애가 별건가. 이런 쓸데없는 짓도 다 그런 거나 매한가지지.





연애, 연애라. 해야지. 언젠가는. 동기들은 모두 소개팅으로 상대를 만났다. 한 명은 정말 결혼이 하고 싶어서, 한 명은 그냥 남자친구와 헤어져서, 한 명은 또 결혼이 하고 싶고 마침 또 남자친구와 헤어져서. 결혼. 하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하고 싶었던 사람인 것 같은데.


이번 주에 새로 입원한 할아버지는 본인의 양 팔이 침대에 묶여 있다는 걸 자각할 때마다 그 옆의 아내에게 고개를 돌려 말한다. 내려가기만 해봐, 죽었어. 집에 가기만 해봐, 칼로 찔러버릴거야. 끌러달라고, 끌르기만 해봐, 목을 졸라 버릴 거야. 이래라 저래라 지랄하는 나 대신, 내 옆에서 그에게 죽을 떠먹여 주고 물병을 채워 주는 아내에게 그렇게 말한다. 80세인지 80킬로그램인지 헷갈릴 정도로 힘이 좋았다. 아팠다. 세 번 연타로 맞는 거. 머리는 자갈치 과자처럼 벗겨진 노인네 힘이 이렇게 좋을 일인가 생각했다.




기저귀를 하고 있어 화장실에 갈 필요가 없다는 걸 한 시간에 열 번은 말하고, 다른 환자의 병상에 가 있으면 그새 어떻게 침대를 탈출해 후들거리는 다리로 바닥에 우뚝 서 있는 그를 보고 빽 소리를 지르는 내게, 아내는 그를 아기같이 대해자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그렇게 말한다.

아니, 어머니. 잠깐 나가 계세요. 저한테는 말씀 이렇게 안 하시잖아요. 김이철님, 말 예쁘게 하세요. 왜 아내분한테 그렇게 말씀하세요. 네?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아, 끌러 달라고요, 그러니까. 안 할 테니까. 끌러 달라고, 내가 죄인이야? 죄인이냐고? 집에 가기만 해봐, 칼로 확.. 이철님! 아, 아가씨한테 그랬어, 내가? 아니잖아! 무슨 상관이냐고!


소변줄이며 주삿줄 할 것 없이 모든 걸 빼버린 입원 첫날의 소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주 중인 그의 아내를 그래서 나는 억지로 휴게실로 몇 번이나 내보냈다. 내가 더 듣기 괴로웠다. 아파서, 나이 들어서 저런 거지만 그래도. 있는 힘 없는 힘 다 끌어낸 눈빛으로 소리치는 그런 말. 나도 아니고, 저 사람한테 하는 말. 아내. 보호자. 부부. 서로 보호자가 된 이들. 결혼을 지나온 사람들.






과연 로맨스가, 연애가, 사랑이 뭘까 생각했다. 내게 교양 운운하며 눈이 돌아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죽고 싶다며 징징대던 장년의 환자는 아내가 갈아온 뭔가를 내내 창가에 방치했다. 누구님, 이거 보호자분이 아까 가져오신 건데, 안 드실 거예요? 버릴까요? 아, 여편네. 맛대가리도 없는 거만 가져온다니까. 신질환 때문에 그런 거 아시잖아요. 아, 그럼 냉장고에 이거라도 꺼내 드릴까요? 드실래요? 이건 당뇨용이라 드셔도 되는데. 안 먹어요, 골라 와도 꼭 이런 걸 사와. 돈 아깝게. 하여튼, 돈 쓸 줄도 모르고.. 그리고 그의 아내는 매일 매일 그런 걸 집에서 고르고 갈아서 이고지고, 는 아니지만 착실히도 배달하고 안 먹은 걸 회수해 갔다.


먹어야지, 드셔야 기운이 나요, 서방님. 네, 환자분. 들으셨죠, 이거 병원밥 안 드시니까 굳이 가지고 오신 거잖아요. 빨리 퇴원하시라고. 근데 왜 하나도 안 드세요. 안 먹기는, 그거는.. 그냥 애정 표현이지. 내 애정 표현이야. 애정이요? 그리고 웃는다. 아내까지 둘이. 애야, 아직 애 같죠, 하면서.






잠깐의 반짝임이 지고 나면 감내하는 시간이 남는다. 전남자친구는 애완견에 대한 추억과 그걸 가족들이 함께 묻어준 기억을 눈을 글썽이며 전했지만, 어딘가의 주차장에서 미친 듯이 짖는 개를 보며 저런 건 찬물을 확 부어 버려야 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의 여동생과 어릴 적에 실제로 그랬더니 동네 강아지가 아주 조용해졌다는 일화를 덧붙이면서.


감정과 현혹과 상황이 눈을 가리는 순간의 집합. 나는 그 때 혹은 그전부터 그와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아주 늦게 헤어졌다. 좋아하면 사귀고, 사귀다 보면 결혼하고, 남이 아닌 사이가 되고. 빛났던 게 인공위성인지 정말 그 멀리의 별인지 모르는 채 마냥 즐거운 시간들.

늘 생각했다. 내가 결혼하게 되는 상대는 내가 이혼으로 헤어져야 할 유일한 상대라고. 틀린 말은 아니잖아. 연애의 종착지는 결혼인가? 그래야 하는 게 맞았다. 너무 많은 게 존재하는 세상, 불완전한 인간 둘. 시간이 흐르면 드러나는 것들. 제도로 묶어놓지 않으면 어떻게 서로에게만 성실할 수 있을까. 성실. 엉망으로 늙어 버린 서로를 보면서도 로맨스 이후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느라 바쁜 이들. 그의 아내가 그랬다. 원래 그랬어요, 이 양반. 애야, 애. 집에서도. 내내 듣고 살았어, 암시롱 않아요. 아아. 네네.




로맨스.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것. 아바타 3가 그 대단한 풍경과 그래픽에도 지루했던 이유. 그 인물, 그 캐릭터여야만 하는 이유가 안 보여서. 못 찾겠어서. 얼굴에 빨간 칠을 한 부족들과 주인공 무리 중 누가 싸움에서 이기는지보다 그 개개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쿼리치와 그 부족장 여자가 이어지는 것 같았는데, 도대체가 안 궁금한 걸. 파란 피부에 팔다리 길어 섹시한 그 생명체들이여야만 흘러가는 스토리가 아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건 참 어렵구나 생각했다. 주토피아 달리.


기후 장벽과 뱀의 선조 주토피아의 존망보다 그걸 해결해 나가는 여우와 토끼를 보는 게 즐거워서. 왜냐면? 둘은 연애를 하고 있으니까. 그 성격, 그 외모, 그 특성. 그런 서로가 아니면 안 되는 상대를 앞에 두고 펼쳐지는 당신과 나의 이야기니까. 연애. 재밌는 거잖아. 하지만 언제까지 재밌을까, 둘은.


물론 그건 애니메이션이지. 그들은 늘 젊고 건강하고 예쁘고 잘생긴.. 캐릭터들일 것이다. 연인이 아니며 훌륭한 동료라는 경계 안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교류하는. 누군가의 아내며 아버지며 보호자라는 책임은 없어도 되는 존재들. 연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하고 싶은 게 맞는 건지, 그게 데이트인지, 정말 결혼 상대자가 될 수 있는 누군가를 골라낼 그 과정인지를. 나는 나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걸. 함께 별을 보다 하얀 입김을 뚫고 달리는 순간은 찰나.





한편으로는, 해야 할 것 같기도. 안 늙기 전에, 더 추해지기 전에, 알 수 없는 흐름들이 나 또는 누구인지도 모를 상대를 덮치기 전에, 가능한 많이 만나 즐거운 기억을 쌓아야 할 것 같기도. 그 디즈니 캐릭터들과 달리 현실 인간의 로맨스는 길게 늘어섰을 그 세월 앞의 미끼나 다름없지만.



예를 들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는 나무 데크 위에 멈춰 서서, 별 더 많이 찾은 사람이 제로콜라 사기, 같은 걸 20번쯤 하는 거. 그렇게 단지 당신과 함께여서 즐거운 차갑게 달콤한 일화.

결말이 어떻든 상관없는 사건들의 집합.


상상만 해도? 얼마나 재밌고 로맨틱해.

정말 그렇긴 하잖아. 연ㅡ애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