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티 도그
뒷문으로 딱 나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버튼을 눌러 내렸더니 맞은편 병동이었다.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처럼 남의 병동을 가로질러 이제 진짜 남의 병동이 된 복도를 걸었다. 찬우의 근황이 궁금했다. 살이 빠진 채 뚱한 표정으로 앉아 초록색 색연필을 손가락으로 돌렸다. 너 왜 폼 잡아? 하고 싶었다. 남들이 웃었다.
동기에게 야 나 눈치 보느라 밥도 못 먹어, 했더니 냉장고에 핫도그 있다고 했다. 찬우의 엄마가 나를 반가워했다. 나도 반가웠다. 당연히 찬우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대신 일단 싱글싱글 웃어댄 내 앞에서 색칠공부 학습지만 쳐다봤다. 하기 싫어요, 왜. 나한테 이거 하라 그러면 난 하루에 백 장도 할 수 있어. 야, 찬우는 하기 싫대잖아. 그치? 아냐. 나도 하기 싫어. 나 기억나, 찬우야? 했더니 한 번 더 고개를 꾸벅해 안녕하세요. 이게 뭔데, 숙제? 네에. 그리고 한숨. 하고 싶은 거만 할 순 없어. 나도 그래. 일하기 싫고 그 병동이 잔뜩 싫어 도망 온 주제에 그 말을 했다. 아, 역시 T야. 찬우야. 이 선생님은 절대 좋은 말 안 해줘.
근데 뭐 좀 어때. 사는 건 원래 그런 같잖은 일을 아닌 척 반복하는 건데. 기분이 좋았다. 인사를 더 주고받고 엘리베이터를 다시 탔다. 높고 높고 조용하고 사람이 더 많은 곳.
표를 진짜 결제했다. 돈을 좀 아끼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아빠를 호출했다. 떡국을 해 달란 말에 엄마아빠는 역시나 뭘 잔뜩 챙겨 현관에 등장했다. 계획을 말했다. 18일부터 21일까지야. 갈 거야, 나. 이후에는 같이 대구 가자. 할아버지 뵈러. 그리고, 나 돈 모을 거야. 일단 그 때까진 안 그만둘 거야. 내년 10월 지나면 엄마 명품가방 사 줄게. 그냥 지론 같은 거였다. 사치품은 장유유서. 나의 명품보다는 엄마의 것 먼저.
엄마는 나보고 결혼하냐, 그때? 라고 했고 아빠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딱 1년이었다. 그러면 이 떡국은 기념일 푸드인 셈이었다. 케이크처럼. 둘다 하얀 탄수화물이니 그게 그거.
왜 그렇게 빡빡하게 그래. 그런 거 아냐. 아, 그거 아니야. 진짜 아니었다. 정말 아닌지 뭔지는 어쩌면 나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지만 일단 아니긴 했다. 그냥 그러기로 했어. 꼭 작년 일 때문은 아닌데. 그리고 뭔 결혼, 그거랑 별개야. 근데 엄마, 프라다는 나일론 주제에 왜이리 비쌀까. 했더니 엄마는 너보다 내 돈이 더 많으니 필요 없다고 했다. 나 이만큼 모았고 그 때까진 될 거야. 그랬더니 엄마아빠는 무슨 투자사 이야기를 했다. 나머지 금액까지 피싱범에게 넘기지 않아 남은 저축액. 아빠 앞으로 들어가 있는 돈. 보이스피싱이 있던 날과 그 적금 또는 예금이 만기되는 날. 갈 곳 없어진 내 것.
왜 취직도 안 된다는데 호황이야? 그거랑은 달라. 엄마도 옛날엔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엄마아빠는 다행히도 재미를 좀 본 것 같았고, 사실은 좀 예전부터 그런 것 같았다. 나한테 그랬다. 이러이러한 흐름이 있었는데 그 땐 우리가 너넬 키우느라 바빴다. 그 때 다른 사람들은 다 집 사고 그랬다. 그러니까 너도 해야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 돈의 가치는 상대적인 거잖아. 나 빼고 다 벌었는데 나는 그대로면, 난 번 게 아닐 텐데. 알겠다고 했다.
비행기표는 정말 이르게 살수록 싼 거였다. 2주 전인가 조회한 것보다 비쌌다. 만들어두기만 하고 쓸 일이 없던 여권. 숙소와 티켓값. 엄마, 나 돈 모으기로 한 건데 좀 그런가? 가지말까, 그냥? 가. 가도 돼. 카페같은 데 많더만. 공부해. 잘 알아보고 가. 그리고 할아버지한테 안 가도 돼. 왜.
하도 얼마 안 남은 남의 할아버지들을 줄창 보다 보니 진짜 그게 언제일지 모르는 내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언제 가실지 모르지 않느냐는 말은 삼켰다. 아빠는 너무 가벼운 표정으로 그랬다. 생각해준 거로도 고맙고, 너는 신경 쓸 필요 없어. 아빠도 못 알아보는데 니가 가는 게 무슨.
놀러 잘 갔다오고 월요일에 거기 전화나 해봐. 잘 먹고. 난 늘 부채감 같은 게 있었는데. 아빠의 의중은 항상 알 수 없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도 울지 않던 날과 그 표정의 합. 해석의 단서가 없다. 그럼 다이소 가서 사와야겠네, 를 말하는 듯한 표정이라.
4월 스케줄 신청은 애저녁에 끝났는데 언니의 정보로는 양요섭 솔로콘서트가 4월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5월 스케줄을 얼마 후면 신청받겠지. 아빠 전역이 언제지? 했더니 5월이라고 했다. 엄마는 올 필요 없다고 했고 아빠는 오길 바라는 눈치였다. 오지 마, 뭐하러 와. 집에서 쉬어. 그리고 너 이제 6월부턴 월세 못 준다, 했다. 엄마아빠는 월세의 반이 조금 넘는 금액을 보내줬었다. 언제 끝나나 늘 궁금하긴 했다. 아, 전역과 동시에 컷. 근데 기분이 좋았다. 그 말과 동시에 해방감이 들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웃음이 비죽비죽 나왔다. 왜지. 그걸 빌미로 엄마아빠가 뭘 바란 적은 전혀 없는데.
한 달간 좀 배고프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가서 뭘 하든 재미있을 테니까. 돈을 써서 자극을 갈구할 필요가 없어졌다.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다. 그럼 이제 진짜 내 혼자 힘으로 사는 거잖아. 엄마아빠는 내가 태워먹은 압력솥 바닥을 복구시키고 냉장고 안팎을 다 채워놓고 떠났다. 맛있는 그릇 가게, 로 맛있을지 모르겠는 그릇들을 보러.
사람 심보가, 사실은 내 심보가 너무 고약하다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해준 게 얼만데, 안 해 준다니까 기분이 좋다는 건 대체 뭘까. 이젠 진짜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그 생각의 기전은 뭘까. 사실 나는 아주 엄마아빠에게서 독립할 생각은 없는데.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할 거고 아직도 압력솥을 안 태우는 법을 모르겠는데. 엄마의 시범을 따라 영상까지 찍었지만, 이 솥을 가지고 있은 지 2년을 다 채워가지만 추를 똑바로 세워놔야 한다는 걸 어제서야 알았는데.
근데 그래도 나 진짜 독립했다. 좋다. 이제 더 맘껏 짜증내고 원하는 대로 굴 수 있어서 좋다. 징징대고, 울고, 성질을 부리고. 정말 그냥 사고 싶은 걸 사 주고. 냉장고의 반찬과 밥과 엄마아빠가 눈높이에 맞춰 알려준 것들과 엄마가 튼튼히 꿰매 주고 간 코트 단추들과 아빠가 다 닦아 주고 간 집의 먼지들을 빼면, 진짜 내 멋대로 살 수 있다.
최고다.
다같이 멀쩡할, 언제까지 멀쩡할지 모르는 인생들의 상대적으로 멀쩡할 날들. 진짜 혼자다. 내 돈과 내 인생.
언제든 자유로이 기생할 수 있는 탈부착 혼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