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물건은 체크아웃시 꼭 확인하자.
새벽 7시 30분, 나는 눈을 뜨자마자 다급히 리셉션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틀 전에 묵었던 나폴리 호스텔에 전화해서 내가 두고 온 바버 재킷이 있는지 물었다. 그런데 우선 이메일로 연락해달라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답장을 언제 줄지도 모르는데 이메일이라니. 일단 제발 옷이 그대로 남아있기를 바라며 옷의 디테일을 적은 메일을 보냈다. 갈색 카라에 짙은 녹색, 상표는 바버. 그리고서 초조하게 답변이 오기를 기다렸다. 자켓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람. 게다가 다음 행선지에 대한 고민도 해야 했다. 만약 나폴리에 옷이 없다면 (눈물을 삼키며) 그냥 예약한 교통편으로 포지타노-살레르노-로마 순으로 이동하면 된다. 그런데 만약 옷이 있으면 로마로 가기 전에 나폴리에 들러서 옷을 찾고 다시 로마로 가야 했다. 포지타노에서 나폴리까지 가장 빠른 길은 여기 올 때와 반대로 버스를 타고 소렌토로 간 다음 기차로 나폴리까지 이동하면 되었다. 그렇게되면 한국에서 예약해놓은 살레르노행 배편과 살레르노-로마 기착권은 무용지물이 돼버리지만, 나는 나의 소중한 바버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호스텔에서 답변 메일이 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메일을 조심스레 열어봤다.
Hi there,
Yes we found your jacket on the 5th floor! :) ?
Are you coming to take it??
-Berry-
나도 모르게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젯밤 무료 국제 전화 앱을 내려받고 난리법석을 떨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 나는 재킷을 나폴리에서 찾기만 하면 된다. 메일 답변으로 감사의 인사와 함께 호스텔 직원에게 로마에 있는 숙소로 재킷을 보내줄 수 있는지 문의해봤다. 그런데 그건 불가능하니 직접 찾으러 오거나 페덱스 픽업 서비스를 이용하라고 했다. 픽업 서비스도 괜찮아보여서 페덱스 이탈리아 고객센터로 전화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 홈페이지에 회원 가입을 해야 픽업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고 해서 그냥 직접 나폴리까지 가기로 했다. 아침부터 요란 법석을 떨다 보니 8시 30분에야 조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조식은 챙겨 먹었다.) 숙소에서 체크아웃한 뒤 소렌토로 가기 위해 SITA 버스 정류장을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가다가 또 문제가 생겼다. 분명 내가 내린 버스 정류장이 숙소 근처였는데 도저히 보이질 않았다. 마음은 급한데 길까지 잃어버리니 거의 공황 상태가 돼버렸다. 3g는 느려 터져서 지도 검색도 잘 안 되고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아까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려니 정말 심리가 무너져내렸다. 이럴 바에 그냥 조금 돌아가긴 하지만 예약해놓은 살레르노행 배를 일단 타고 거기서 나폴리로 올라가는 기차를 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황급히 손목을 시계를 확인했다. 배 출발 시각은 10시, 현재 시각 9시 40분. 18킬로 캐리어를 끌고 산 중턱에서 해안가 부두까지 20분 안에 도착해야 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캐리어를 들고 수많은 포지타노 골목의 계단을 허겁지겁 내려가기 시작했다. 캐리어가 무거워 오른팔과 왼팔을 번갈아가며 들었고 이마에선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욕이 절로 나오는구나. 하...**."
무사히 9시 55에 항구에 도착했다. 살레르노행 배를 기다리는 인파들 사이에서 숨을 헐떡이며 티켓 오피스에서 예약 내용을 보여주고 표를 받았다. 10월 중순의 태양은 여전히 강렬했고 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이탈리아 남부라서 그런지 아직 날씨가 꽤 따듯하다. 페리는 시간에 맞춰 도착했고 10분 정도 더 기다리다가 포지타노 항을 출발했다. 살레르노까지 이동하는 동안 배 2층에 앉아서 아말피 해안의 아름다운 절벽과 마을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잠시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면서 새벽에 일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개고생한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 옷 하나 두고 왔을 뿐인데 하필이면 바버 재킷이라 버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아.....**."
배가 항구에 도착했다. 나는 부리나케 캐리어를 끌고 정착장에 내렸다. 빠른 걸음으로 부둣가를 빠져나오니 바로 공터가 보였다. 일단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 구글맵을 켰는데 이게 웬일인가. 내 위치에서 살레르노 역까지 도보로 11시간이라고 표시됐다. 이탈리아에서 3g가 잘 안 터져서 그런가. 앱을 끄고 재실행을 해봤는데도 결과는 여전히 도보 11시간이었다. "응? 뭐지?" 다시 구글맵을 자세히 쳐다봤다. 이럴 수가. 내 위치는 살레르노가 아니라 아말피였다. 갑자기 또 심리 상태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도착지를 착각하고 한 정거장 먼저 내린 것이다. 살레르노행 배인데 아말피를 들렀다가 가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또다시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부랴부랴 부둣가까지 뛰어갔다. 다행히 내가 내린 배는 아말피에서 출발하는 손님을 다 태운 상태에서 출발하지 않고 있었다. 내 생각엔 거의 출발 직전이었는데 멀리서 누가 다급하게 뛰어오니까 잠시 멈춰있었던 것 같다. 땀이 또 삐질삐질 흐르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배에 들어오니 아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외국인 부부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잘못 내렸다는 몸짓을 보여주니 서로 씩 웃음을 내보였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나는 다시 한 번 안도의 한숨 대신 욕을 내뱉었다. "하.......**....** ***(큰일 날 뻔했다)."
20여 분을 더 갔을까. 이번엔 진짜 살레르노 항구에 도착했다. 구글맵으로 몇 번이고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틀림 없었다. 항구에서 살레르노 역까지는 도보로 5분이었다. 시계를 보니 12:29분 로마행 열차 시간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일단 역 안에 직원에게 살레르노에서 로마행 기차를 타고 가다가 도중에 나폴리역에 내려도 되느냐고 물어봤는데 가능하다고 했다. 정말 다행히었다. 그럼 이제 남은 문제는 나폴리 역에서 옷을 찾고 나폴리-로마 구간 열차를 끊는 일이었다. 표를 사기 위해 트란 이탈리아 예매소에 줄을 섰다. 내 앞에는 고작 5명 정도 서 있었는데 정말 한참이나 기다려야 했다. 한국과 유럽의 차이점은 한 사람이 표를 사는 데 걸리는 시간이 훨씬 길다는 것이다. 한국은 인터넷에서 미리 정보를 다 알아본 후에 ~행 몇 장이요 이런 식으로 바로바로 표를 구매하고 빠지는 편인데 유럽 사람들은 사전 정보 없이 여기에서 하나하나 다 물어보고 사는 것 같다. 내 앞에 한 부부도 열차표 하나 사려고 거의 15분을 직원을 붙들고 앉아있었는데 정말 답답할 노릇이었다. 우리나라에선 사람들이 뒤에 줄 서 있는데 매표소 직원이랑 15분 동안 이야기하고 있으면 분명 엄청난 눈초리를 감내해야만 할 것이다. 드디어 30분 넘게 기다린 끝에 내 차례가 왔고 나폴리 로마 구간 권을 끊은 다음 열차 플랫폼으로 갔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바버가 있는 나폴리 가리발디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도착 시각은 오후 2시였고 나폴리에서 로마로 가는 열차는 3시 출발이었다. 나는 여기서 숙소까지 갔다가 다시 오는데 1시간이면 충분할 줄 알고 3시 로마행 열차를 끊었는데 사실 그게 아니었다. 우선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지하철역으로 뛰어갔다. 이미 10분이 흘렀다. 거기다 지하철 간격이 무려 7분이었다. 1분 1초가 소중한데 시간은 계속 흐르고 지하철은 안 오니 슬슬 똥줄이 타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타고 숙소 근처 지하철역에 내리니 2시 20분이 넘어갔다. 캐리어를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낑낑거리며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간다음 숙소까지 달렸다. 그리고 며칠 전 봤던 죽음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 카운터에 도착했다. "옷 찾으러 왔어요!!!" 직원이 활짝 웃으며 주황색 봉투 하나를 건네줬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바버 재킷과 꼼데가르송 셔츠까지 들어있었다. 알고 보니 셔츠도 두고 왔던 것이었다. 이 옷 두 개만 합쳐도 50만 원이 족히 넘어가는데 정말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시간은 2시 35분, 로마행 열차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25분, 여기서 나폴리 가리발디역에 3시까지 도착할 수 있을까. 정말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다. 나는 운명을 하늘에 맡긴 뒤 또다시 캐리어 손잡이를 꼭 쥐었다. 이 빌어먹을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조차 없어서 7층에서 1층까지 캐리어를 들고 뛰어 내려갔다. 포지타노부터 아말피, 나폴리까지 이 무거운 걸 끌고다니며 종일 계단을 오르내리고 뛰어다녔더니 팔과 다리가 당기기 시작했다. 땀은 비 오듯 쏟아졌고 지하철역 플랫폼까지 내려갔을 때는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마침 지하철이 딱 출발 직전 문이 닫히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마지막 남은 힘으로 전속력으로 가리발디역 지하철에 탑승했다. 시간은 숨을 고를 여유도 없이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기차 플랫폼으로 뛰었다. 그리고 출발 2분 전, 겨우 로마행 열차에 탈 수 있었다. 아까 막판에 지하철을 놓쳐버렸다면 아마 나는 열차표를 다시 끊어야 했을 수도 있다. 정말 오늘 하루 운동을 제대로 했다. 군대 있을 때 받은 유격 훈련 이후 이렇게 정신적 신체적 압박감을 느껴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으니 정말 욕이 절로 나왔다. "하.........** ** *** *** ** ****..."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로마 테르미니 역. 시간은 어느덧 오후 4시 30분이 넘어갔다. 듣던 대로 테르미니 역 근처는 치안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길 위에 노숙자들과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불법 체류 흑인들이 많았다. 숙소로 가는데 왠 할머니 노숙자가 길 위에서 그대로 볼일을 보는 모습을 보고 또 심리 상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로마 숙소는 또 찾기 어려운 곳에 있어서 길거리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체크인했다. 정말 힘든 여정이었다. 정말 오늘 하루는 다 포기하고 그냥 숙소에서 쉴까 했지만 이왕 로마에 왔으니 잠깐이라도 구경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숙소에서 가까운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이었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기 전에 간단한 짐 검사를 마쳤다. 여기가 어떤 성당인지 네이버 백과사전을 참고해가면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도움이 많이 되었다.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로마 4대 대성당 중 하나로 예수님의 말구유 중 일부가 성물로 모셔져 있는 곳이었다. 로마에서 처음으로 들어가 보는 성당이라 굉장히 설레었다. 대성당 내부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굉장히 화려한 모습이 펼쳐졌다. 아름다운 부조들과 벽화, 모자이크 장식들이 내부를 가득채웄다. 장엄하고 경건한 분위기에 순간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건축물을 보고 소름이 돋은 건 처음이었다. 특히 중앙 제단 아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태어났을 때 놓였던 말구유 일부가 보존되어있었는데 정말 책에서나 보던 이야기가 현실로 느껴져서 신기했다. 한참을 돌아보다가 Fassi라는 젤라또 가게로 갔다. 점심도 굶은 상태였는데도 가야하만 했던 이유는 리조, 피스타치오 맛이 유명한 로마 3대 젤라또집 중 하나가 숙소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 모습을 보니 역시 꽤 유명한 듯했다. 리조는 쌀로 만든 젤라또인데 이번 여행에 손에 꼽을 정도로 맛있는 젤라또였다. 그리고 나는 다음 목적지인 산 조반니 우유라 노 대성당으로 향했다. 산 조반니 대성당 역시 로마 4대 대성당 중 하나로 전 세계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는 성당이어서 교황의 좌(의자)가 있다. 또한, 교황의 첫 공식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성당 지붕과 성당 내부에 12 사도의 석상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웅장했다.
성 지오반니 성당을 나오니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왠지 여기선 식사 동행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유랑 게시판에 저녁 동행글을 올린 남자분과 성 지오반니 성당 근처에서 만나게 되었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였는데 무슨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물어보진 않았지만, 현재는 일을 그만두고 몇 달째 장기 여행 중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들은 여행 조언 중 몇 가지 좋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는데 크게 공감이 된 부분은 여행 첫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단 도시를 쭉 둘러보면서 계획을 구상하는 것이었다. 어디에 어떤 명소가 있고 어떤 곳이 가보고 싶은 곳인지, 주변에 마트나 괜찮은 카페, 음식점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물론 일정이 짧은 사람에겐 해당하지 않는 내용이겠지만) 남은 여행에 참고할만한 조언이었다. 맛있게 기분 좋은 식사를 마치고 근처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표를 사려고 했는데 동전이 없어서 역무원한테 잔돈 좀 바꿔달라고 했는데 귀찮다는 듯 그냥 타라고 손을 휘적거렸다. 불친절한 사람은 어디든 존재하는 법이다. 테르미니 역에 내려서 이탈리아 자판기 커피에서 커피 한 잔을 빼 들고 숙소로 돌아갔다. 자판기 커피라도 역시 이탈리아 커피는 맛있었다.
저녁 9시가 넘어서 도미토리 숙소에 도착하니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자고 있었다. 조심조심 샤워 도구를 챙겨서 방을 빠져나왔다. 포지타노에서 넓은 방을 혼자 독차지하다가 갑자기 도미토리에 오니 불편한 구석이 많았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 이불 속에 들어가고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길고 긴 하루가 끝났다. 정말 육체적 정신적 리소스를 방전해버렸다. 나는 스스로에게 맹세 하나를 했다. 로마에서는 절대 옷을 두고 가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