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우정이 끝나는 순간
여러분, 안녕하세요. 김명희입니다.
벌써 남편 죽고 혼자 산 지 벌써 3개월이나 되었네요.
작은 원룸이지만 나름 아늑하게 꾸몄어요. 혼자 사는게 편하고 자유로웠으나 가끔씩 밤에 집에 있다보면,
온 세상이 너무 조용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날은 사무치게 외로워서 조금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사람이 그리웠어요.
그 날 저녁, 저는 오랜만에 휴대폰 연락처를 열었습니다. 가족들 이름, 병원, 가게 이름, 아이들 선생님...
그리고 몇 명 안 되는 이름들.
"이 사람들한테 전화할 수 있을까?"
손가락이 멈췄습니다. 20년 넘게 연락 안 한 고등학교 동창. 10년 전 번호를 바꿨다는 중학교 친구. 결혼 초기에 잠깐 알았던 아파트 이웃.
모두 과거의 사람들이었어요.
다음날 아침, 창밖을 보니 예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걸 봤죠.
교회 가는 사람들인 것 같았어요.
'부럽다.'
솔직한 마음이 그랬어요. 교회가는 사람들이 부러웠죠. 종교가 있으면 매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외롭지 않을 것 같았어요.
'예전처럼 다시 성당에 가볼까?'
전에는 엄마와 함께 성당에 다녔는데, 결혼하고 나니 시간도 체력도 여유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나가지 않게 됐거든요.
그래서 저는 근처 성당을 찾아봤어요. 그런데 뭔가 이상함을 느꼈죠.
'나는 신을 찾는 게 아니라 사람을 찾고 있잖아...'
종교를 믿는 척하면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게 모순처럼 느껴졌죠.
저는 소파에 누워 천장만 바라봤죠.
'나... 이렇게 외로운 사람이었나?'
시간이 많아지면, 생각나는 것들도 많아지는 법입니다.
저는 용기를 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제일 친했던 영숙이한테.
"여보세요?"
"영숙아, 나 명희야."
"...명희? 김명희?"
"응, 맞아."
"세상에... 몇 년만이야?"
"한... 30년? 어떻게 지내?"
영숙이를 만났습니다. 들어오는 영숙이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영숙아!"
"명희야!"
우리는 서로를 꼭 안았습니다.
"명희야, 잘 살았어?"
"응..."
"자식들은?"
"셋 다 잘 컸지. 너는?"
"나도 둘 다 결혼했어."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우리는 한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어요.
자녀 이야기, 남편 이야기, 돈 이야기, 최근 다녀온 여행, 건강 이야기 등... 겉으로는 편하게 웃고 떠들었지만, 뭔가 어색했어요.
대화가 자꾸 겉돌기만 하고, 예전처럼 속마음을 나누는 느낌은 아니었죠.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어요. 이제 예전처럼 다시 친구가 될 수는 없다는 걸요. 30년 동안 쌓인 시간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예전엔 그렇게 함께 있는 게 당연했는데, 이젠 함께 하기 2시간도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힘들더라고요.
"명희야, 오랜만에 얼굴보니 너무 좋았어. 나 이제 곧 남편 올 시간이라 우리 다음에 또 만나자."
"응, 나도 너무 반가웠어. 잘 가. 또 연락하자"
하지만 우리 둘 다 알고 있었어요. 이게 마지막일 거라는 걸.
집으로 가는 길, 버스 창밖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친구란 게 뭘까?'
예전엔 친구가 영원할 줄 알았어요. 학창시절 그 뜨거운 우정이 평생 갈 줄 알았죠. 하지만 아니더라고요.
결혼하면서, 아이 낳으면서, 각자의 삶을 살면서...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영숙이는 여전히 직장을 다니고 있었어요. 출근길 지하철, 명함을 건네고 받고, 회의와 미팅으로 가득한 삶이었죠. 저는 30년을 주부로 살았어요. 아침 식탁, 집안 청소, 화장실과 빨래 냄새, 저녁 반찬 걱정으로 채워진 시간들이었죠.
"작년에 남편이랑 스페인 다녀왔어. 사그라다 파밀리아 정말 장관이더라."
영숙이의 말에 저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나는 요즘 손주 돌보느라 정신이 없어. 그래도 애들 웃는 얼굴 보면 피곤한 줄 모르겠더라고."
영숙이는 해외여행 간 이야기를 했고, 저는 손주 돌보는 이야기를 했어요.
영숙이의 남편은 대기업 임원이 되어 있었어요. 저는 이제 남편 없이 혼자가 되었죠.
카페 테이블 위, 영숙이의 가방이 눈에 들어왔어요. 어디서 본 듯한 로고, 연예인들이 공항에서 메고 다니는 그런 가방이었죠. 저는 잘 모르겠지만 명품백이 틀림없었어요. 제 무릎 옆에는 시장에서 1만 원에 산 튼튼한 에코백이 놓여 있었죠.
우리는 서로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고 있었어요.
저랑은 너무나도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 영숙이를 보며 생각했어요. 대단하다고, 멋지다고.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고, 당당하게 세상을 누비는 모습이요.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죠.
하지만 우리의 대화는 어딘가 어긋났어요. 영숙이는 제 손주 이야기를 들으며 "힘들겠다"고 했고, 저는 그의 여행 이야기를 들으며 "좋겠다"고 했어요. 서로의 삶을 부러워하면서도, 우리는 서로의 삶을 이해하지는 못했죠.
같은 시대를 살아온 두 여자였어요. 그러나 우리가 걸어온 길은 전혀 달랐죠.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길에서 무언가를 얻었고, 무언가를 잃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날, 우리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요.
대화 중간중간 침묵이 흘렀어요. 예전 같았으면 침묵조차 편했을 텐데, 이제는 그 침묵이 불편하기만 했어요.
'뭘 얘기하지?'
30년 동안 쌓인 서로의 삶이 너무 달랐으니까요.
집에 와서 옛날 사진첩을 꺼내 봤어요. 수학여행 사진, 졸업 사진, 스무 살 생일 사진... 사진 속 우리는 정말 행복해 보였어요. 앞으로 평생 함께할 줄 알았던 그때. 하지만 이제는 알아요. 그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날 밤, 순자언니한테 전화해서 물었어요.
"언니. 언니도 옛날 친구들 만나면 어색해?"
"당연하지. 할 얘기도 없고."
"왜 그런 걸까?"
"사람은 변하니까. 그리고 그게 자연스러운 거야."
언니의 말이 위로가 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더 슬퍼지더라고요.
옛날 생각이 났어요.
'영숙아, 우리 평생 친구하자.'
'그래, 명희야. 우리 우정 변치말자.'
스무 살 때 했던 약속들. 진심이었던 그 말들. 하지만 인생은 우리의 약속을 지켜주지 않았어요.
며칠 뒤, 저는 결심했어요.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야겠다.'고요. 과거에 매달려 봤자 돌아오지 않으니까.
지금의 나와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나야겠다고.
동네 문화센터에 요가 수업을 신청했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김명희라고 해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박은주예요. 같은 동네 사시나 봐요?"
"네, 5단지에 살아요."
"저도요! 우리 같은 반 하면서 친하게 지내요."
은주씨는 저랑 비슷했어요. 나이도 비슷하고, 손주 있는 것도 비슷하고. 남편 은퇴한 것도, 요즘 무료한 것도. 억지로 과거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어요.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 편하게 있을 수 있었죠.
"명희씨, 우리 수업 끝나고 커피 한잔 할래요?"
"좋아요"
이상하게도, 은주씨와 이야기할 때는 마음이 편했어요. 어떤 이야기를 하든 공감이 되었고, 비슷해서 대화 자체가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4시간을 수다를 떨었어요. 서로 많이 웃었고요.
은주씨와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했어요.
'친구는 영원하지 않구나. 시기마다 필요한 친구가 다르구나.'
20대엔 20대의 친구가 필요하고, 30대엔 30대의 친구가 필요하고, 지금은 지금의 친구가 필요한 거였어요.
영숙이와의 우정이 끝난 게 아니에요. 그냥... 그 시절의 우정이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거죠.
그날 밤, 일기에 썼어요.
영숙아, 미안했어 그리고 그 시절 나와 친구해줘서 고마웠어. 우리의 20대는 정말 아름다웠어. 하지만 이제 나에게 맞는 친구가 필요해.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기를.. 언젠가 우리 또 만나면 그때는 서로 편하게 웃을 수 있기를..
친구가 사라진 게 아니었어요. 그냥 시간이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 거였죠. 그리고 그게... 인생인 것 같아요.
여러분. 나이 들수록 친구가 사라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인생이 바빠지고, 관심사가 달라지고, 살아가는 방식이 바뀌니까요. 60대에 새 친구를 사귀는 건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아요. 오히려 이제는 진짜 친구를 사귈 수 있어요. 허세 부릴 필요 없이, 솔직하게. 비교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요즘 은주랑 매주 만나요. 도서관에서 책도 보고, 공원도 산책하고. 별거 아닌 이야기를 나누지만, 누군가가 나와 함께해 준다는 게 참 행복해요. 은주는 제게 30년 우정의 역사를 묻지 않아요. 저도 은주의 과거를 캐묻지 않고요. 우리는 그냥, 지금 이 순간을 함께 살아가요.
"명희씨, 다음 주에 뭐 해요?"
"아무 계획 없는데요?"
"그럼 우리 등산 갈래요? 날씨 좋을 것 같은데."
"좋아요"
이렇게 가볍게 약속하고, 가볍게 만나요. 부담도 없고, 기대도 크지 않아요. 하지만 그게 더 편해요. 그게 더 오래가는 것 같아요.
가끔 영숙이 생각이 나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잘 살고 있을까. 하지만 연락하진 않아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이제는 알거든요.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고,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여러분. 제가 좋아하는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은 이렇게 말했어요. "인생의 길 위에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법은 앞만 보고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과거의 친구를 붙잡으려 애쓰지 마세요. 과거의 우정을 되살리려 힘쓰지 마세요. 그 시간에,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더 소중히 하세요. 지금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함께하세요.
나이 들수록 친구가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나이 들수록 필요한 친구가 달라지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이제 저는 압니다. 우정은 영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그 순간이 진심이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오늘도 은주에게 문자를 보냅니다.
"은주야, 내일 시간 돼? 우리 떡볶이 먹으러 가자."
"좋아 몇 시에 만날까?"
별것 아닌 대화. 별것 아닌 관계. 하지만 이게... 지금 제게 가장 소중한 우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