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외면했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재희와의 만남이 자꾸만 떠올랐어요.
'우리 셋 다 불행했어.'
'내 인생에 인연은 왜 이렇게 어긋났을까?'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어머니는 날 사랑했을까요?
"명희야, 네가 아들이었으면..."
어머니가 저한테 제일 많이 하셨던 말.
딸이라서 실망한 표정.
어머니는 아들을 원했고.
저는 딸로 태어났습니다.
우리의 인연은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어요.
평생을 아들로 태어났어야 했던 저는
가장 많은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어야 했던 어머니였지만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저의 인연은 어긋나 버렸던 겁니다.
아버지는 늘 집에 안 계셨습니다. 항상 술집에, 도박장에.
"아빠!"
학교에서 상 받고 뛰어간 날.
"아빠 안 계신다."
어머니의 차가운 말.
아버지에게 나는 없었던 거예요.
관심 밖의 존재.
우리는 한 집에 살았지만 남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잔인한 가해가 있을까요?
오빠는 똑똑했어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그런데 저는 오빠가 싫었습니다.
부모님은 오빠만 보셨으니까.
그런데 오빠는 20대에 오토바이사고로 죽었어요.
나는 오빠에게 한 번도 따뜻한 말을 못 했습니다.
"오빠, 미안해..."
너무 늦은 사과.
닿을 수 없는 사과.
상처 가득한 마음이
결국 나를 엄습해옵니다.
"이기적인 년"
결혼 첫날밤부터 알았어요.
남편은 다른 여자 이름을 불렀습니다.
"재희야..."
잠꼬대였지만 알 수 있었어요.
남편이 다른 여자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45년을 함께 살았지만.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본 적이 없었어요.
그는 재희를 봤고.
나는... 나는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내 모습만 봤습니다.
차라리.... 내 모습이 아니라 그 때 남편을 보았더라면...
그래서 남편한테 한 번이라도 화를 내거나 부부싸움을 하면서 서로 진솔한 대화 한 번이라도 나눴더라면...
지금보다는 덜 비참했을 겁니다.
딸 아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던 사람.
그런데 딸도 날 떠났버렸죠.
"엄마, 나 미국 갈 거야."
"그 위험한 곳엔 왜 가려는 거야?"
"거기 가서 성공하고 올거야. 엄마는 나를 이해 못 할 거야. 엄마 인생이랑 다르니까."
저는 딸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딸도 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인연은 뭘까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인연이 있으면 만난다."
"인연이 있으면 이어진다."
그런데 내 인생의 모든 인연은 어긋났어요.
만났지만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었지만 함께가 아니었어요.
다음 날, 머리가 복잡해서 순자언니와 바닷가 근처 카페에 갔습니다.
“언니 오랜만에 바다보니까 너무 좋다”
“응 나도. 저기 바다 수평선 봐. 너무 예쁘다”
“그러게…”
언니와 나는 카페의 큰 창문에 담긴 멋진 바다 수평선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어요. 그러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아 어쩌면 우리는 모두 바다 수평선이구나. 평행선은 영원히 만나지지 않잖아.
어머니와 나,
아버지와 나,
남편과 나,
딸과 나..
아무리 옆에 있어도. 가까이 있어도.
우리는 평생을 한 방향을 보며 서로의 옆에 있었지만,
사실 서로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평행선이었구나."
어머니도 날 원했을지 몰라요.
딸을 사랑하고 싶었을지 몰라요.
그런데 나는 어머니에게 다가가지 않았어요.
남편도 나를 사랑하려 했을지 몰라요.
재희를 잊고 싶었을지 몰라요.
그런데 나는 남편에게 상냥하게 대하지 않았어요. 늘 맞지 않으려고 잘못하지 않으려고만 애썼었죠.
딸도 저를 이해하고 싶었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딸에게 내 마음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어긋난 게 아니었어.'
혼자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다가가지 않았던 거야.'
'서로를 볼 용기가 없었던 거야.'
인연은 어긋난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외면했던 거예요.
상처받을까 봐.
거절당할까 봐.
이해받지 못할까 봐.
그날, 평화로운 밤이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그게 내 인생이었구나."
어머니는 완벽한 엄마가 아니었어요.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사랑하는 남편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게 어때서요?
그들도 상처받은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본인이 받은 상처를 나에게 줄 수 밖에 없었던.
저도 완벽한 딸이 아니었어요.
완벽한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완벽한 엄마가 아니었어요.
나도 상처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용서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어머니는 어머니 방식으로 날 사랑했어요.
아버지는 아버지가 할 수 있는 만큼 했습니다.
남편은 남편이 줄 수 있는 걸 줬었겠죠.
딸은 딸이 할 수 있는 만큼 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요.
우리 모두가.
최선을 다했던 겁니다.
인생 살다보니
기쁜 날도 있었어요.
슬픈 날도 있었습니다.
화난 날도, 외로운 날도, 행복한 날도.
실수도 했고.
후회도 했고.
사랑도 했고.
미워도 했습니다.
그게 다 내 인생이에요.
한 조각도 빼놓을 수 없는.
"고마워요."
창밖을 보며 말했습니다.
"어머니, 고마워요. 날 낳아줘서."
"아버지, 고마워요. 가족을 먹여 살려줘서."
"오빠, 고마워요. 함께 자라줘서."
목이 메여옵니다...
"여보, 고마워요. 45년을 함께해줘서."
"딸아, 고마워. 내 인생에 와줘서."
"재희 씨, 고마워요. 나를 돌아보게 해줘서."
나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고마워, 명희야."
"살아줘서."
이제는 알아요.
어긋난 인연은 없었습니다.
다만 각자의 길이 있었을 뿐.
완벽하지 않은 인생을.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을.
완벽하지 않은 나를.
다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는 거예요.
"명희씨!"
계단 아래서 누가 부릅니다.
이웃 할머니예요.
"같이 시장 갈래요?"
"네! 가요!"
나는 신발을 신었습니다.
가방을 들었어요.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오늘도.
인생은 계속됩니다.
어제와는 다른 나로.
조금 더 자유로운 나로.
조금 더 평화로운 나로.
그렇게.
나이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