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

고마워요. 먼저 죽어줘서

by 오래피스 orapeace

안녕하세요, 김명희입니다.

오늘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혼자 살기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났을 때, 저는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남편이 보이기 시작한 거예요.

아니, 정확히는... 처음으로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40년 동안 함께 살면서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 그가 죽고 나서,

그리고 제가 자유로워지고 나서야... 보였습니다.



첫 번째 발견

어느 주말 오후였습니다.

집 정리를 하다가 옷장 깊숙한 곳에서 낡은 상자를 발견했어요.


남편의 것이었습니다.

이사 올 때 남편 회사에서 택배로 받았던 남편 물건들이었어요.

확인해보고 버리겠다는 걸 깜빡하고 오늘 발견한 겁니다.


'잡동사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상자를 열었습니다.

상자 안에는 세면도구, 슬리퍼, 회사 외투, 명함

그리고 아주 낡아보이는 두꺼운 공책이 있었습니다.


'뭐지? 일기?'


남편이 일기를 썼다는 걸 몰랐어요.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1975년 3월 15일"

우리 결혼식 날이었어요.


"오늘 결혼했다. 명희는 예쁘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재희를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됐다.

부모님이 정해주신 결혼이다. 거부할 수 없었다.

명희에게 미안하다. 내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손이 떨렸지만, 계속 읽었습니다.


"1976년 5월 2일 명희가 임신했다.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게 두렵다. 나는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명희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우리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1978년 10월 8일 오늘 또 명희를 때렸다. 술을 마시면 화가 난다. 내 인생이 억울해서.

명희는 잘못이 없다. 그런데 왜 명희한테 화를 내는 걸까?

나는 나쁜 사람이다."


"1985년 7월 20일 명희가 또 어머니한테 혼났다. 어머니가 명희를 너무 구박하신다.

말려야 하는데, 말릴 수가 없다. 어머니한테 대들 용기가 없다.

명희야, 미안하다. 너는 좋은 며느리인데, 내가 너를 지켜주지 못해서."


"1992년 3월 3일 오늘 명희가 울고 있는 걸 봤다. 화장실에서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들어가서 위로해줘야 하는데, 나는 그냥 돌아섰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저는 공책을 덮었습니다.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어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남편도... 힘들었구나'


40년 동안 제가 보지 못한 것.

남편도 고통받고 있었다는 것.


저는 남편을 미워해야 할까요? 아니면 용서해야 할까요?

아니, 모르겠어요.

그냥... 슬펐습니다.

우리 둘 다 불행했다는 게.



다시 공책을 펼쳤습니다.

마지막 장이었어요.


"이제 정년까지 3년 남았다.

재희와 약속했다. 정년하면 명희와 이혼하고 재희와 살기로.

명희한테 40년간 미안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 행복도 찾고 싶다.

명희야,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웠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남편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번째 발견

며칠 후, 시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요양원에 계시는데, 가끔 연락이 왔어요.


"여보세요?"


"...명희야?"


목소리가 약해져 있었습니다.


"네, 어머니."


"명희야, 내가... 내가 할 말이 있어."


"명희야, 나... 요즘 자꾸 생각이 나."


"무슨 생각이요?"


"너한테... 너무 못했던 것 같아서."


저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명희야, 나도 며느리였어. 시어머니한테 구박받으며 살았지."


"..."


"그래서 네가 밉지 않았는데... 자꾸 구박하게 됐어.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내가 받은 고통을, 너한테 그대로 준 것 같아."


"어머니..."


"미안하다, 명희야. 정말 미안하다."


전화 너머로 어머니가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전화를 끊고, 저는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시어머니도... 피해자였구나.

자기가 당한 대로, 며느리인 저한테 한 거구나.


40년 동안 저는 시어머니를 미워했습니다.

하지만 시어머니도... 누군가의 며느리로 고통받았던 거예요.

그 고통이 저에게 전해진 거고, 만약 지금 며느리를 봤다면... 저도 똑같이 했을지도 모릅니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 고통은 저에게서 시작된 게 아니었어요.

시어머니에게서도, 시어머니의 시어머니에게서도.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가, 며느리들이 당했던 고통.

그게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거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그 고리를 끊은 거고요.

딸에게 전하지 않기로, 며느리에게 절대 그렇게 하지 않기로, 그렇게 다짐했습니다.



세 번째 발견

큰아들이 저를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식사를 하다가 아들이 말했습니다.


"엄마, 저... 요즘 아내한테 짜증을 많이 내요."


"왜? 무슨 일 있었어?"


"회사에서 스트레스받으면, 집에 와서 아내한테 화를 내게 돼요."


"어제도 아내가 저녁을 늦게 준비했다고 화를 냈어요. 아내가 울더라고요."


저는 숨이 막혔습니다.


"아들아..."


"그리고 나서 정신을 차렸어요. '내가 아버지처럼 되고 있구나'라고."


큰아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엄마, 저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저도 모르게... 엄마 저 어떻게 해야 해요? "


"창우야"


저는 아들의 손을 잡았습니다.


"네 아버지도 그랬을 거야. 너희 할아버지한테 맞으며 컸을 거야. 그래서 어른이 되어 아내를 때린 거지."


"..."


"그리고 넌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하는 걸 보며 컸어. 그게 네 안에 각인된 거야."


큰아들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럼 저 어떻게 해야 해요?"


저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 고리를 끊어야 해. 네가. 네 아버지는 그 고리를 끊지 못했어. 할아버지한테 당한 걸, 엄마한테 그대로 한 거야."


"하지만 넌 할 수 있어. 스스로 말했잖아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다고."


"맞아요..."


"먼저, 아내한테 사과해. 진심으로. 그리고 화가 날 때마다 생각해.

'나는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 될 거야'라고."


"...그게 될까요?"


"그럼!"


큰아들의 표정이 이제서야 살아났습니다.


"엄마 고마워요"



네 번째 발견

둘째 딸이 찾아왔습니다. 이혼 후 처음 보는 거였어요.


"엄마."


딸은 많이 말라 있었습니다. 차를 마시며 딸이 말했습니다.


"엄마, 이혼하고 나니까... 이상한 걸 깨달았어요."


"뭔데?"


"제가 시댁에서 참았던 게, 엄마가 집에서 참았던 거랑 똑같더라고요."


"시어머니 눈치 보고, 남편 눈치 보고, 제 생각은 말 못 하고..."


"..."


"그게 정상인 줄 알았어요. 며느리는 원래 그렇게 사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딸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엄마가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


"엄마, 저는 평생 엄마 등만 봤어요. 엄마는 늘 아빠 뒤에 서 계셨어요.

고개 숙이고, 눈치 보고. 그게 여자가 사는 방식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저도 그렇게 살았어요.


"엄마, 왜 당당하게 사시지 않았어요?

왜 우리한테 보여주지 않았어요? 여자도 당당하게 살 수 있다는 걸?"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미안해, 혜연아. 엄마가 잘못 보여줬어. 여자는 참고 사는 거라고, 그렇게 보여줬구나."


저는 딸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엄마가 당당하게 살았어야 했어. 너희한테 보여줬어야 했어. 여자도 행복할 수 있다고.

하지만 혜연아.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너는 이제 알았잖아. 여자도 당당하게 살 수 있다는 거. 행복할 수 있다는 거. 엄마는 모르고 살았지만 너는 알았잖아. 엄마는 60살 넘어 시작했지만 넌 지금 시작할 수 있어. 그리고 나중에 네 딸이 생기면, 보여줘. 당당한 엄마의 모습을."


"흑흑 네 엄마.."

딸이 저를 꼭 안았습니다.



다섯 번째 발견

어느 날, 시장에서 장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제 이름을 불렀어요.


"명희 언니?"


돌아봤습니다.

재희였습니다. 남편이 평생 사랑했던 여자.


"...재희 씨?"


"네 오랜만이에요, 명희언니."


우리는 어색하게 서 있었습니다.

재희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저기... 커피 한잔 하실래요?"


저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습니다.

"네."



카페에 마주 앉았습니다.

한참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어요.

재희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언니, 미안해요."


"..."


"그 사람은 저의 첫사랑이었어요 언니. 원래 첫사랑은 그렇잖아요.

가슴 설레고 밤에 막 잠못자도록 가슴이 아리고 아프고...


"그렇게 그 사람과 3개월을 만났는데 갑자기 언니랑 결혼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때 마음 정리를 했어야했는데 못했어요.

결혼도 했고 가정이 있다는 걸 아는데도, 제가 계속 만나자고 했어요. 미안해요 언니.. "


재희의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저는 평생 그늘에서 살았어요. 숨어서 만나고, 몰래 전화하고."


"..."


"명절에도, 생일에도, 혼자였어요. 그 사람은 언니와 함께 있었으니까. 그게 얼마나 외로운지 아세요?"


저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저도 외로웠어요."


"그치만 오빠는 늘 언니랑 함께 있었는걸요?"


"네. 같은 집에 살았지만, 그 사람과 저는 남이었어요."


우리 둘은 서로를 바라봤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한 두 여자. 그런데 둘 다 불행했던.


"우리 둘 다 불행했네요."


"...그러게요."


"그 사람 때문에."


재희가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 사람도 불행했을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살지 못했으니까."


세 사람 모두 불행했던 거예요. 아무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재희씨, 저... 재희씨를 미워했어요. 오래."


"이해해요. 제가 언니 남편을 빼앗았으니까요."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에요. 재희씨가 빼앗은 게 아니에요."


"...네?"


"그 사람이 선택한 거예요. 저를 안 사랑하기로, 재희씨를 사랑하기로."


"언니..."


"그리고 그게 재희씨 잘못은 아니에요. 사랑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재희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카페를 나오며 재희가 물었습니다.


"언니 이제 어떻게 사세요?"


"혼자 살아요. 이제는 자유롭게."


"...부럽네요."


"이제는 재희씨도 재희씨를 위해 사세요. 죽은 사람 기다리지 말고."


재희가 웃었습니다.


"그럴게요."


"안녕히 가세요, 재희씨."


"안녕히 가세요, 언니"


우리는 악수를 했습니다.




그날 오후, 저는 남편 산소에 갔습니다. 봉분 앞에 앉아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 일기를 봤어요. 당신도 힘들었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45년을 산 거.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말이에요... 나도 힘들었어요. 정말로."


저는 눈물을 닦았습니다.


"당신 일기를 읽고, 이해는 됐어요. 당신도 피해자였다는 거. 부모님이 정해준 결혼, 거부할 수 없었던 거. 당신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의무 때문에 나랑 산 거."


"이해는 돼요. 하지만... 용서는 안 해요."


"당신이 날 때린 것, 무시한 것, 그건 당신 선택이었어요. 당신이 불행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권리는 없어요."


"당신 어머니가 나를 구박할 때, 당신이 막아줄 수 있었어요. 당신이 스스로 화가 날 때, 참을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안 그랬어요. 쉬운 길을 택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저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당신한테 고마워요. 당신이 먼저 죽어줘서."


"만약 당신이 정년하고 나한테 이혼하자고 했으면... 나는 그때도 거절했을 거예요. 용기가 없어서."


"하지만 당신이 죽으니까, 나는 선택할 수 있었어요. 계속 그렇게 살 것인가, 아니면 새로 시작할 것인가."


"그래서 고마워요."


저는 일어섰습니다.


"이제 그만 갈게요. 다시는 안 올 거예요. 더 이상 당신한테 매여 있고 싶지 않아요."


"당신도 이제 편히 쉬세요. 그리고 나도... 내 인생 살게요."


뒤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여러분. 저는 모든 걸 잃고 나서야 보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을 잃고 나서, 남편도 피해자였다는 걸 봤습니다.

시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나서, 시어머니도 고통받았다는 걸 봤습니다.


아이들과 멀어지고 나서, 제가 아이들한테 잘못된 걸 보여줬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나서, 사랑받지 못한 제 인생을 봤습니다.


그리고 모든 역할을 잃고 나서야, 진짜 '나'를 발견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잃고 나서야 볼까요?


생각해봤습니다.


가지고 있을 때는, 그게 너무 가까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 거예요.


남편과 함께 살 때는, 남편의 고통이 보이지 않았어요. 제 고통만 보였죠.

시댁 식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들의 아픔이 보이지 않았어요. 제가 당하는 것만 보였죠.


하지만 거리가 생기니까,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어요. 전체가 보였습니다.


40년 동안 저는 미워했습니다.

남편을 미워했고, 시어머니를 미워했고, 제 운명을 미워했어요.


되돌아보니, 그 미움 속에서는 제 삶을 바꿀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미움을 저를 갉아먹고, 저의 미래를 어둡고 증오심에 가득차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내려놓고 나니, 미움이 증오심이 조금씩 사라졌어요. 그리고 미움이 사라진 자리에, 이해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아, 그 사람도 힘들었구나.' '아, 그 사람도 선택할 수 없었구나.'


사람들은 말해요.


"명희씨, 남편 절대 용서하지 마세요"


저는 말해요.


"용서 안해요 대신 놓아줬어요."


용서는 상대를 위한 거예요.

'너의 잘못을 용서해줄게.'


하지만 놓아줌은 나를 위한 거예요.

'이제 더 이상 너한테 매이지 않을게.'


용서는 못 해도, 놓아줄 수는 있어요.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모든 걸 놓아주는 순간, 진짜 자유가 찾아옵니다.





여러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글이 여러분의 하루에 작은 위로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구독하시면 다음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전 05화혼자 살기, 진짜 자유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