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엄마 과학자 육아기
임신 발표도 했고
배도 나왔고
그렇지만 실험은 쭉 하고 있던 어느 날
지도 박사님이 입덧하는 내가 안쓰럽다고 고기 파티를 해주셨다.
그리고 고기를 먹으며 나에게 물었다.
"OO 씨, 출산 휴가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애는 어떻게 키우려고? "
음..... 생각하지 못한 질문 공격에 멋쩍게 웃어넘긴 뒤
그날부터 현실적인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하는지 고민을 시작했다.
먼저 출산휴가.
내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당시에는 출산휴학은 존재했다.
그러나 이러한 출산휴학은 코스웍 중인 학생에게만 해당되었다 (코스웍 : 수업 듣고 있는 상태)
고로 코스웍이 끝난 박사 4년 차인 나하고는 1도 관련 없는 이야기.....
특히나 나는 공공기관의 연구생 (학연 연구생)으로 재직(?) 중이었기 때문에 출퇴근을 연구소로 하고 있으므로, 학교 휴학 제도는 이용이 불가능했다. (뭐 해당도 아니지만...)
그래서 연구원의 내규를 이틀간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연구원에 존재하는 학생 연구원의 출산 휴가 조항을 찾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혹시 있다면...)
그리고 안타깝게도 학연 학생들의 휴가는 지도 박사의 재량에 맡긴다는 한 줄을 찾아냈다....ㅠㅠ
나의 휴가는 그 한 줄로 끝인 건가...
그 현실을 믿을 수 없어 행정팀에 전화해 문의를 해보니
학연 학생은 출산휴가가 없다는 말만 들었다.
아... 개망인가.....
음..... 학생 연구원들이 사실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는 일 자체가 드물었던 시기라 내규 조차 없던 그 시기....
쭈뼛쭈뼛 나는 이 비보를 지도 박사님께 전달했다.
그런데... 땡그리가 운을 타고났던 건지...
아니면 박사과정 중 결혼, 임신, 출산을 경험한 딸을 둔 아버지셨던 우리 지도 박사님께서 또 친정아버지 빙의를 해주신 탓인지....
가끔 내 친정아버지로 빙의해주셨던 지도 박사님은 행정팀에서 준 비보를 듣고 너무나도 쿨하게
"그래? 그럼 우리 연구소 출산휴가는 보통 며칠이냐?"
"90일입니다."
"3달 되는 거네... OO아, 너 논문 쓸 실험은 다 했지?"
"어... 논문만 치면... 다... 끝난 거긴 하죠"
"그래? 그럼 내일부터 나오지 마. 너 그냥 쉬면서 논문이나 써. 그리고 애 키우고 어때?"
라고 해주셨다;;;;;;;
너무나도 당황한 내가 "에?" 하고 되물으니,
힘들면 집에서 재택 해도 된다고... 실험실에서 무리하지 말고 논문 쓰고 싶음 집에서 논문 쓰라고 하는 거라고.
흑.... 이런 감동의 쓰나미라니... 박사님 그간 제가 자주 같이 소주잔 기울이지 않은 거 죄송해요. 조금 귀찮아서 그랬어요 ㅠㅠ 애 낳고 복귀하면 제가 박사님께서 좋아하는 파전에 막걸리 많이 먹으러 갈게요 ㅠㅠ
라는 말은 가슴속에서만 외쳤고 (그래도 박사님 존경합니다. 제 인생의 롤모델이세요.)
쿨한 지도 박사님의 배려로 내규에도 없는 출산휴가가 확정되게 되었다.
박사님은 안 나와도 된다 했지만....
사람이 양심이 있지 어떻게 그러겠는가....ㅠㅠ
내가 그렇게 철면피는 아니었던지라 깔끔하게 막달까지 일하고 애 낳으러 가겠노라 결정했다.
비하인드 스토리를 어필하면 사실 3개월 쓰고 복귀하기로 했는데, 내가 9개월쯤에 임신중독증이 오자 우리 지도 박사님은 저녁에 날 데리러 왔다가 만난 내 남편을 붙들고 내일부터 나 출근시키지 말라고. 그럼 네가 혼난다고 엄포를 놓아주셔서 얼결에 4개월의 출산휴가를 받게 되었다.
세상 어딜 가도 볼 수 없는 아름 다운 미담이지만, 이 미담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연구소 내에서 뒷말이 좀 있었다고 했다.... : 개 욕먹음)
차라리 내가 정식으로 휴가가 있는 학생이었다면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겠지만,
시스템에 점처럼 존재하던 학생 연구자였기 때문에 나의 출산휴가는 사실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었고,
출산급여 역시 정상적인 시스템에선 받을 수 없는 제도였다.
존재할 수 없는 제도를 내가 속한 팀에서 합의해주어 내가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받은 것이었다.
얼마나 말이 많았겠는가.....ㅠㅠ
자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저 제도의 배려를 받았던 나는 얼마나 가시방석이었겠는가......ㅜㅜ
없던 휴가를 만들어서 쉬었기 때문에, 누군가 안된다고 하면 다시 출근을 해야 할 것만 같아 늘 안절부절될 수밖에 없었다.
또, 나를 배려해주신 지도 박사님의 면을 세워드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서 복귀를 빨리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생겼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불편함은 내가 팀에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출산이라는 것이 주변의 배려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뼈저리게 느꼈던 시기였다.
쉬는 게 쉬는 게 아닌 그 시절...ㅠㅠ
매일같이 랩원 단톡 방에 올라오는 "언니 이거 어딨어요", "누나 이거 어딨어요", "누나 실험 이거 하라는데 노트 어딨어요?" ㅠㅠ
핸드폰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사실 쉬면 안 되는 내가 랩 후배들의 민원도 해결을 안 해주면 왠지 모르게 큰 대역죄를 짓는 것 같다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그래서 까똑을 놓지 않았다...
오죽하면 애 낳으러 가는 당일엔 나 애 낳으러 간다고 카톡 날리고 갔다;;;;;;;
대학원생이... 랩 장인 박사과정이 겪게 되는 출산휴가란... 뭐 그런 휴가였다.
작금에 와서 드는 생각은 학생 연구원들이 결혼을 한다는 전제를 깔아 경조휴가라던지, 출산휴가라던지, 육아휴직이라던지의 휴가 등이 제도화되어 있었다면 오히려 그때와 같은 부담을 느끼지 않고
온전히 아이와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곳이나 좀 학생들도 결혼을 한다는 생각을 갖고 출산휴가 내규 좀 만들어달라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대학원생은 성인입니다... 학생이지만 즈이도 결혼할 수 있어요.
애도 생길 수 있어요.
합법적 휴가 좀 주세요....ㅠㅠ
육아휴직은 어떻게 했냐고?
생각을 해봐라.. 분위기가 저런데 내가 육아휴직을 입 밖으로 내기나 했겠는가?
출산휴가도 너무나도 감사할 따름이라 머릿속에 애 낳고 빠른 복귀만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너무나도 큰 배려를 받아서;;;;;;
그리고 출산휴가도 없는데 육아휴직은 개뿔....
또 육아에 온전히 기운을 쏟기엔, 매일매일 쏟아지는 논문들이 너무 많았고,
이공계 연구의 특성상 3년 안에 실적이 필요한데 그 실적을 채우기에 육아휴직 1,2년은 내 경력을 나 스스로 단절시키는 꼴이란 생각을 했었다.
연구직의 특성상, 아침에 출근해서 오늘은 어떤 연구가 유행인지를 확인한다. (어떤 논문이 accept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유행파악 가능)
그리고 유행에 내가 지금 뒤처진 게 있는지, 내 연구에 더 접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계속해서 파악하기 위해 자리가 올라갈수록 실험은 필수고 이런 트렌드 보는 것을 위해 하루 종일 인터넷 서핑을 한다.
동향도 살펴보고, 어느 회사에서 무슨 약을 냈는지도 보고,
내가 하는 연구랑 비슷한데 망했다고 하면 같이 슬퍼해주고 (잠깐?) 그들이 슬픔을 바탕으로 나의 개선책을 만들어 내고, 이것을 또 매주 하는 미팅 때 발표를 해야 하고....
이런 현실 속에서 육아휴직으로 1년을 쉰다?
육아휴직을 쓴다는 건 나에겐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육아휴직을 지금도 고려하지 못하고 계속 일을 하는 이유 역시
순식간에 유행에서 뒤처져 감이 없는 과학자가 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실인데 어떻게 육아휴직을 쓰겠는가?
아이가 6살이 된 지금까지도 한두 달의 육아휴직이면 모를까 1년 이상의 육아휴직은 지금 꿈도 못 꾸고 산다...
아이를 키우며 저런 논문을 매일같이 읽어 감을 살릴 자신도 없고
실험을 손에서 놓고 있다가 다시 실험했을 때 대놓고 실험 감이 떨어져 있을까 봐 무섭고....
(연구직은 그래서 이직 때 쉬는 기간도 최대가 6개월이다..ㅠㅠ)
또, 기업의 경우 기업부설 연구소가 유지되기 위해 상시인원이 몇 명 이상 되어야 하는데,
벤처기업의 경우 상시인원을 최소로 유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6개월 이상의 휴직을 해서 상시인원이 빠져나가 인증이 취소될 수 도 있는 위기가 있어서 더더군다나 휴직계를 던질 수가 없다.
이러한 공백을 막기 위해 대체인력을 정부에서 제공해주고 있다.
그러나 연구직의 특성상, 6개월~1년 동안 잠깐 인력을 활용하는 것이 사람 가리키고 쓸만해지면 내보내는 꼴이라 오히려 도움이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기업에서 그 제도에 손을 뻗는 것을 어려워하기도 한다. (물론 내가 속한 연구분야의 경우다...ㅠㅠ)
어쩌면 육아휴직이란 내가 아직 도전해본 길이 아니기에 두려운 것일 수도 있다.
지금은 아이가 6살이라 유치원에서 하루 종일 놀 수 있어서 육아휴직을 고려하고 있지는 않으나,
돌봄 공백이 생기고 많은 엄마들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는 시기라는 초등학생 1학년이 되면....
나도 육아휴직을 써야겠다고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현 직장에 계속 있는 한, 현재 직위 때문에 상시 전담인력에서 내가 빠질 수가 없다는 문제가 있다.
아마도 난 계속 육아휴직은 못 쓸 거 같고, 그나마 현 상황에서 괜찮다고 생각되는 육아기 단축근로제를 육아휴직 대신 써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 중이다....
정부에서는 출산율이 떨어진다고 한다.
결혼을 안 해서 출산율이 낮다는 이야기도 한다.
길 가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
동네 아줌마, 택시 기사님, 옆집 할머니, 엄마 친구, 아빠 친구....
다들 나에게 둘째는 왜 없냐고 묻는다.
아이가 하나면 외롭다고
성격이 나빠진다고
심지어 많이 배운 사람들이 아이를 많이 낳아야 똑똑한 대한민국이 된다는 오지랖도 들어보았다.
그러나 나는 하나로 충분하다 생각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만큼 나는 나도 사랑한다.
임신이라는 것이 나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임신중독증.. 덜덜..ㅠㅠ)
아이와 나의 커리어를 맞바꾸기에, 나는 내가 하는 연구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게 재미있는 일이란 것도 안다.
아이를 사랑하지만, 지금의 위치에 오기 위해 내가 공부한 시간을 바꾸고 싶진 않다.
그 공부한 시간이 나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는 한 지금 자리에 오래 있고 싶다.
또, 지금 아이와 함께할 시간을 만들기 위해 연봉을 포기하고 있는 만큼...
둘째가 생겼을 때 내가 더 무엇을 희생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아서 내 인생에 둘째가 없다고 생각 중이다.
모든 사람들이 각각의 자리에서 아이와 맞바꿔야 하는 일들이 각자의 인생에서 큰 부분일 수 있다.
나처럼 생명의 위협일 수도, 커리어의 위협일 수도, 또 생계의 위협일 수도 있다.
그런 개인의 사정은 깡그리 무시하고
출산율이 낮아 나라의 위기이니 애국심으로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외동은 성격이 이기적이니 둘째를 낳으라고...
큰애가 외로우니 둘째를 가져야 하고,
애를 낳으면 돈을 주겠다고 말하는...
지금의 세상이야 말로 재수 없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