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를 앞두고 잇(IT)문학도가 되다

태초에 Hello World가 있었다

by 잇문학도

누군가가 그랬다. 퇴사는 연애의 이별과 같다고. 다른 점은 차이기보다 찰 때가 많다는 정도? 회사가 이별 유도를 할지는 몰라도, 보통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건 직장인 쪽이다. 나 역시 그랬다.


회사와의 연애는 으레 그렇듯 맹목적이고 불타는 사랑으로 시작했다. 나 역시 그와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가치관에 반했고, 그가 꿈꾸는 미래를 곁에서 성심성의 껏 돕고 싶었다. 그가 말 뿐인 허풍쟁이라는 걸 알 게 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꼬박꼬박 돈은 잘 벌어왔으니까.


하지만 어디 돈 만으로 사랑이 완성되겠는가? 그의 이기적인 행동은 점점 심해졌다. 능력 대비 목표만 높았고 연말이면 히스테리를 부렸다. 불만이 있을 때마다 네가 이상해서 그런 거라는 가스라이팅은 그의 특기였다. 반발하는 나에게 “회사에서는 법보다 사규가 더 중요해”라는 리더의 말은 결정타였다. 나는 이별을 준비했다.


내가 변한 건지, 회사가 변한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었다. 헤어질 생각에 과거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니가 월급은 많이 안 줬어도 참 많이 챙겨줬는데.. 출장이랑 연수도 보내줬는데.. 그리고 이렇게 헤어지면 그동안 너한테 투자한 내 청춘과 시간은 어떻게 되는 거니?


하지만 회사는 비혼주의자였다.

나와 평생 함께 할 생각이 없었다. 40대 중반의 선배들이 하나 둘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내 또래도 마찬가지였다. 난 우리 조직의 13번째 퇴사자였다. 1년에 10명 넘게 퇴사를 해도 회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댄디하고 멋졌다. 새 애인은 어디서든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나간다고 아쉬워하는 것도 잠시


감사하게도 아내는 나의 선택을 지지해줬다. 이과 여자인 그녀는 제대로 된 계획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뭘 하고 싶은데?” 그녀의 질문에 나는 답했다.

“이제 나를 공대 남자라고 불러줘. 문과는 잊고 빅데이터를 공부할 거야”

나는 그때 이 대답이 얼마나 깊이 없는 말인 지 알지 못했다.


2020년 3월은 총선을 앞두고 있었고,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한창 유행이었다. 어수선하고 회사도 나 하나에게 큰 관심을 가질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거기에 조직에 대한 실망과 정년퇴직이 불가능한 시한부 미래, 독립에 대한 오랜 열망, 삼박자가 맞아떨졌다.

퇴직 서류를 출력하고 팀장님과 면담을 했다. 재택근무인데 사무실로 찾아가겠다는 말에 이미 눈치를 챈 기색이었다. 날씨가 좋은 금요일 오후, 사무실에서 내 통보를 듣던 팀장님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근데... 나도 4월에 그만둘 생각이에요..” 팀장님은 14번째 퇴직자였다.


처음으로 코로나 덕을 봤다. 면담은 축소됐고 절차는 일사천리였다. 누구에게 맡길 것 없이 후배의 도움을 받아 후다닥 처리했다. 날짜를 계산해 회사 복지 포인트를 탕진했다. 코로나19 때문에 만나게 될 사람도 없으니, 혼신의 힘을 다해서 퇴사 메일을 썼다. 버전은 두 가지 였다. 공식 메일과 친한 이들에게 보낼 개인 메일. 링컨과 마틴 루터킹에 빙의되어 명문을 써내려나갔다. I have I dream...


나오기 전까지는 당당하다 / 출처. MBC 무한도전


언젠가 모두는 퇴직을 하고 조직을 떠난다. 나는 좀 더 빨리 했을 뿐이다. ‘다시 회사원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진심으로 다짐을 했다. 조직에 들어가 월급을 받지 않고, 스스로 경제활동을 해야 진짜 독립이라 생각했다. 편협한 사고일지라도 가슴 뛰는 생각이었다.


남은 연차를 퇴직 날짜에 맞춰 몰아 쓰고 도서관을 갔다. 메일을 보내자 평소에 친한 선후배들에게 전화가 밀려왔다. 하지만 한 통도 받지 않았다. 첫 날 만큼은 방해 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코로나로 텅 빈 한낮의 도서관은 소설 속에 등장할 풍경이었다. 평소에 찾아가던 인문사회와 문학 코너를 지나 프로그래밍 도서가 모인 곳으로 몸을 옮겼다. 그곳에서 가장 깔끔해 보이는 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몇 장을 넘기자 눈에 띄는 문장이 보였다. 문장은 다른 책에도 있었다. 아니, 모든 책의 서문을 차지했다.


Hello World를 출력해보겠습니다.

print(“hello world”)


반갑다. 헬로 월드.

드디어 레벨 1 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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