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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아주 많지만 아무도 날 몰랐으면 해

익명에서만 날 보여줄 수 있어

by 잇문학도
엄마도 옛날에는 익명으로 활동했어

20년 전 PC실명제를 도입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가입할 때, 실명 인증을 하지 않았거든요. 가짜 아이디라는 개념도 없을 때라 바리케이드 없이 쏟아져 나오는 좀비떼처럼 온갖 이야기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카오스가 탄생한 것이죠.


PC실명제가 잘 도입된 후 내친김에 정부와 정치권은 인터넷 실명제 도입을 주장했습니다. 글을 쓰거나 댓글을 달 때도 본인 인증을 해야 하는 충격적인 제도인데요. 2012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사라졌습니다. 얼굴을 가릴 자유와 권리를 되찾았죠.


현재 2024년 대한민국의 인터넷 자유 지수는 66점이랍니다. 높진 않죠


우리는 온라인에 우리의 생각과 이미지를 남길 때, 이름을 내걸지 않습니다. 지금 쓰는 브런치도 마찬가지죠. 대신 우리는 스스로 만든 아이디와 닉네임을 씁니다. 힙하고 근사한 활동명을 만드는 건 자기 브랜딩의 시작이 되었고요.


고정된 닉네임 없이 익명으로만 활동할 수 있는 플랫폼도 급증했습니다. 본인 이름으로 글을 쓰는 곳은 단체 카톡방 밖에 남지 않았죠.


하지만 사진이 진심인 걸


우리는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에서 더 자유를 느낍니다. 그리고 내 이름을 버릴 때 ‘나’ 더 잘 드러낼 수 있죠. 우리는 주어진 의무나 기대를 모두 접고 자유롭기 위해 기꺼이 익명이 됩니다.


익명화 + 초개인화 = 부캐?

온라인에서는 아주 작은 주제를 가지고도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고슴도치를 사랑하고 키우는 사람들을 어떻게 쉽게 만날 수 있겠어요. 옛날 화폐 수집가 같은 사람들도요.


게임 플랫폼인 스팀, 다양한 동호와 애호로 이루어진 온라인 카페도 이와 같습니다. 비슷한 정치적 성향과 사회 관심사로 뭉친 커뮤니티, 대학 기반 에브리타임처럼 좀 더 급진적인 익명 플랫폼도 있습니다. 회사를 다닌다면 기업 뒷담화가 모여 있는 블라인드도 필수죠. 우리는 다양한 공간에서 여러 종류의 가면을 쓸 수 있습니다.


SNS에서는 익명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실험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부캐(부캐릭터)라고 하죠. 한 개의 게임 계정으로 여러 캐릭터를 만들어, 동일한 게임을 다르게 즐기는 데에서 비롯한 말입니다.


요즘은 게임처럼 다른 캐릭터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직장인들의 재택근무와 정시 퇴근이 일상화되면서 이러한 시도가 늘어났죠. 부캐를 보고 본 캐릭터(원래 직업이나 이름 등)를 유추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부캐는 또 다른 삶이자, 다른 자아거든요.


익명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을 것 같지만 오히려 자신을 더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형태가 '부캐'고요. 프라이버시가 과잉인 지금 시대에 역설적으로 프라이버시를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익명으로 하는 자기 어필이라 볼 수도 있겠네요.


본캐일 때도 이토록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긴하죠


부캐는 성공의 아바타가 되기도 합니다. 임상춘 작가는 최근 넷플릭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받고 있는 '폭싹 속았수다' 뿐만 아니라 '동백꽃 필 무렵', '쌈, 마이웨이' 등을 집필한 대작가입니다. 임상춘이라는 이름은 필명입니다.


그분은 성별도, 나이도 없는 작가가 되고 싶다며 모든 시상식도 불참했죠. 우리는 그가 누군지 모릅니다. 어쩌면 장사에 별 관심없는 우리 집 앞 편의점 사장님이나 묘하게 트렌드에 빠삭한 옆자리 부장님일 수도 있어요.


드라마화 1순위인 웹소설 작가들도 대부분 필명을 사용합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작가들도 많습니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작가 산경은 무역회사 직원이었고, '전지적 독자시점'의 작가 '싱숑'은 '싱'이 쓰기 시작한 소설을 '숑'과 함께 쓴 작품입니다. 2인 작가죠. 우리는 이들의 얼굴도 배경도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고요.




작가님 본캐가 초등학생이라면 바로 투자하세요

부캐로 성공한 사람들에게 더욱 감탄하고 부러워하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부캐’ 열풍이 '본캐'에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대체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디서 오게 된 걸까요?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 우리는 '부캐'를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은 것 아닐까요. 그러니 자수성가한 '부캐' 성공인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는 거죠.


시대의 명언이 되었습니다. 류승수 선생님.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광광 울었다

2008년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리먼 브라더스' 몰락을 예언했던 '미네르바'라는 필명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남긴 글은 경제학 교수뿐만 아니라 수 많은 사람들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정부는 그의 글로 20억 달러의 외환 방어비용이 발생했다며 미네르바를 체포하기에 이릅니다. 검찰은 그가 경제학 학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30대, 전문대 졸업자, 무직자"라고 공표하죠.


미네르바의 실체가 밝혀지기 전 사람들의 행동이 재미있습니다. 한 위원은 '미네르바 자술서'라는 글을 쓰면서 스스로 미네르바인 척 이야기했고, 허경영은 미네르바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며 50대 금융 엘리트라고 소개했습니다. 미네르바의 정체가 밝혀지자 모두 입을 다물었지만요. 어떤 사람들은 30대의 전문대 졸업 무직자인 미네르바가 가짜라며 그를 폭행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이라면 어땠을까요? 익명으로 활동한 미네르바가 우리가 상상한 '본캐'와 다르다고 욕했을까요? 아니면 오롯이 혼자만의 노력으로 지식을 쌓고 미래를 예언한 그를 현자 '부캐'라고 보았을까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온라인 사이코패스와 중립기어

익명 세상은 확실한 득과 실이 있습니다.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하고 스트레스도 해소하며,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어필할 수도 있다는 점이 '득'이죠. 과거의 인생 궤적을 버리고 오로지 진검승부를 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진검승부에서 이긴 이들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올라온 사람들보다 추앙받습니다. 약자의 반란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차곡차곡 구독자들을 모아서 성공한 대형 유튜버들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죠.


물론 등장하자마자 백만 유튜버가 된 용접공 강동원씨도 있습니다


익명은 우리의 자아상을 위축시키기도 합니다. 익명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너무 보정하거든요. 진짜 정체성은 혼미해지고, 댓글 하나, 악플 하나에 우리 자의식은 과잉되거나 위축됩니다.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이 지나치게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문제군요. SNS에서는 누구보다도 솔직하고 개성적이지만 대면에서는 보여주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죠. 온라인 소통 능력이 대면 소통 능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SNS에서는 부계정으로 비도덕적인 언행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이들도 있습니다. 눈살 찌푸려지는 댓글의 상당수는 프사(프로필 사진) 없는 아이디인데요. 익명 계정을 하나 만들어서 평소 말하지 못할 것들을 배설하며 스트레스를 풉니다. 물론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이 방법은 스트레스 해소에 그리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나쁜 감정의 표현은 자신의 기분도 지속적으로 나쁘게 하거든요.


이는 온라인 탈억제 효과(Online disinhibition effect)라고 합니다.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느끼는 구속력이 부족한 것을 말하는데요. 직장이나 학교처럼 실제 생활에서는 절대 말하지 않을 말을 온라인에서 쉽게 말하고, 온라인이 그 발언에서 더 안전하다고 느끼는 거죠.


나는 채,채팅형 인간입니다


사회적으로도 당연히 득과 실이 있습니다. 이름이 없는 만큼 다양한 의견을 표현할 수 있고 민주적인 소통이 확대되었죠. 익명성 덕분에 사회적 발언이 자유로워지고, 공익적 목소리가 커졌죠. 직장인 익명 앱인 블라인드를 통해 폭로된 LH공사의 내부비리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고발되고 있는 각종 불법행위도 이제는 전 국민들에게 쉽게 알려집니다. 세계적인 ‘미투 운동’과 ‘기업 내부 고발자들’도 이와 비슷한 공익 행동이죠.


취재가 시작되자..

모두 알고 계시겠지만 사회적인 '실'도 많습니다. 악성 댓글, 사이버 괴롭힘, 가짜 뉴스 확산이 AI시대에 더욱 문제 되고 있죠. 책임 없는 발언과 허위 정보 확산의 위험도 존재하고요. 레딧, 디시인사이드, X(구 트위터)에서 가짜 뉴스가 빠르게 퍼지는 이유도 익명성 때문입니다. “내가 쓴 글, 내가 한 말이 아니야”라고 발뺌하기도 좋거든요. 이러한 점 때문에 매번 익명의 발언의 신뢰성이 낮아지고 사회적 논의도 왜곡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종종 어떤 사안과 이슈에 대해 '중립기어'를 둡니다. 떠도는 정보와 익명의 주장을 모두 믿을 수 없다는, 아니 믿었다가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지혜죠. 비록 온라인이라도 양심적이고 합리적 판단을 하고 의견을 표현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반성적 자정작용이라고 할까요.


익명이 기본 모드인데 바꿀 수도 없습니다

익명의 이득과 손해는 개인과 사회 모두에 있습니다. 이득을 늘리고 손해를 줄이는 것은 당연하죠. 하지만 어느 쪽이 더 많은지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익명의 시대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거든요.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고 숨길 자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욱 강하게 그 자유를 요구합니다.


이러한 익명의 시대에 우리는 진짜 ‘나’를 찾았을까요. 분명 '나'라를 존재를 말할 수 있는 플랫폼이 많아졌습니다. 우리가 활동하는 모든 온/오프라인 플랫폼을 통합하면 더욱 풍부한 나를 드러낼 수 있죠.


나는 생명공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면서(대학교), 기타리스트이고(유튜브), 웹소설 칼럼을 쓰며(브런치), 환경에 관심이 많은 보수주의자이고(X), 열렬한 맨유 축구팬일 수도 있습니다.(커뮤니티)
더불어 레즈비언(Threads)일 수도 있고요.


지금 시대의 우리는 완전한 익명도, 완전한 실명도 아닌 ‘하이브리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들은 익명의 이득을 누리면서도, 신뢰성을 유지하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오프라인은 '갓생'을 살며 빠듯하게 관리하고, 부캐로 온라인 정체성을 만드는 게 '힙'한 게 된 지 오래입니다. 그 과정에서 개인주의자들의 세상은 점점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인데요? 3줄 요약

과거 PC실명제가 위헌으로 폐지되며 본격적인 익명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현재는 닉네임과 '부캐'로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게 일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익명성은 개인과 사회에 양면적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익명의 세상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입니다.

SNS와 다양한 플랫폼에서 익명과 '부캐'를 통해 자기표현과 성공을 거두는 사례가 많아지고, 온라인 정체성과 오프라인 정체성이 혼합된 '하이브리드 정체성'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의 다양성은 더욱 늘어났습니다.





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0/22/2015102201498.html

https://www.asiae.co.kr/article/2023071814091414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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