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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편해요

친한데 묘하게 불편해

by 잇문학도
적당한 거리는 얼마일까요

누군가와 가까이 앉을 수 있는 건 특권입니다. 아무나 그럴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사회적 거리라는 말이 있죠. 이걸 못 지키는 사람은 항상 우리에게 부담을 줍니다.


인류학자 에드워드홀 교수는 이런 거리를 단계로 나누었는데요. 1단계인 친밀한 거리는 46cm 이내의 거리를 말합니다. 스킨십이 가능한 거리예요. 서로의 입냄새도 느낄 수 있고요. 2단계인 120cm 이내 거리는 경계심이 없는 친구나 직장 동료의 거리를 말하고요. 그 이상은 공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회적 거리입니다.


이건..너, 너무가 까워요 태민씨..


코로나19 이후 우리는 신체적 거리에 예민해졌습니다. 거리두기로 친구도 200cm 밖에 떨어져 있어야 했죠. 예전과 달리 지하철에서의 기침소리는 우리를 곤두서게 만듭니다. 마스크는 선택이지만 일상이 되었고요. 이제 아무나 우리 몸 가까이로 올 수 없습니다.


친밀함을 표현하는 육체적 거리가 있듯 우리에게는 심리적 거리도 있습니다.

우리를 대학교 입학생, 새내기라고 생각을 해보죠.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동기들이 모이는데요. 우리는 사람들의 호불호나 상황을 보면서 친구를 만들어 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다가옵니다.


이 친구는 46cm 이내로 들어 와서는 "너 자기소개 때 탁구 좋아한다며?! 나도야!!. 탁구 취미인 사람 흔치 않은데 반갑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이 친구가 보통 텐션이 아님을 깨닫죠. 그때부터 이 친구는 밥도 같이 먹자고 하고 계속 어딘가를 같이 가자고 합니다. 하루는 탁구 동호회를 갔다 왔다고 하니 자기도 그 동호회에 들겠다고 합니다.


친구는 매일 학교에 왔냐고 묻고 매일 만나자고 합니다.


매일 얼굴을 마주치니 왠지 불편해진 우리는 친구와 점점 마주치는 시간을 줄입니다. 학교도 늦게 가고 SNS 답장도 조금씩 늦고요.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친구에게 장문의 문장을 받습니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서운하다는 내용이죠. 이미 경험하신 이야기일까요?


왼쪽 분노와 오른쪽 실망의 문자 폭탄


과거나 지금이나 친밀감은 인간관계의 원동력이죠. 하지만 동시에 불편함도 만듭니다. 각자 기대하는 심리적 거리감, 심리적 선이 다르기 때문인데요. 이건 몸의 거리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저는 외향형 내향인입니다

'히키코모리'라는 단어에 익숙하신가요? 은둔형 외톨이라고도 하는데요. 가족을 포함해 사회적 교류를 끊고 방 안에서만 지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마음의 병이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짐작하죠.


비슷하지만 다른 '코쿠닝'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누에가 고치를 짓는 것처럼 친한 사람이나 가족을 중심으로만 사는 사람들입니다. 활동반경을 줄이고 소위 '방콕'과 '집밥'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죠. 코로나19가 창궐했을 때는 우리는 일시적으로 코쿠닝족이 되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국민정신조사가 되어버린 MBTI는 알고 계시죠? E형(외향형)보다 I형(내향형)들이 MBTI에 더 열광했습니다.


우선 검색량에서부터 차이가 보이는데요. 검색 전문업체 리스닝마인드 조사에 따르면 MBTI 상위 검색은 모두 내향형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인프제 감성, 인프피 애인 특징 등이 한동안 유행처럼 번졌던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예상 가능하죠.


I형들은 MBTI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와 같구나 하고요. 심지어 I형(내향형) 호소인들도 등장했습니다. 수많은 E형들이 자신도 방콕하는 집순이고 조용하고 코지하다며, 혼자있을 때 에너지를 얻는다며 주장했죠.



관계맺기에 적극적이지 않고 혼자의 안락함을 선호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코로나로 시작한 육체적 부담, 심리적인 부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친밀한 관계가 무엇인지, 감정적으로 가까운 관계는 어느 정도 거리인지, 각자의 기준으로 재정의한 것 같습지다.


내 마음에 침범하지 마세요

모르는 사람이 바싹 가까이 앉는 것과 멀리서 내 휴대폰을 보는 것 중에 어떤 게 더 불쾌하신가요?


둘 다면 최악이지만요


보통 친밀한 사이가 아니면 휴대폰을 보여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잠깐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는 것도 결심이 필요하죠. 왠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거든요. 휴대폰은 거의 모든 취향과 생각이 담긴 디바이스니까요. 물론 강제로 오픈당하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만..아앗


적당한 돈을 주고 사회적 교류가 거의 없는 직업, 돈을 정말 많이 주지만 감정 노동을 해야 하는 직업이 있다면 어떤 걸 선택하시겠어요?


아마도 이렇게 물으면 “대체 얼마나 주려고 하길래, 감정노동이야?”라며 입에 침이 고일 수도 있겠네요. 교류가 없는 직업은 그럴 수 있겠다 싶은데, 감정노동은 엄청난 보상 아니면 쉽지 않겠다는 마음이 먼저 듭니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 감정노동을 직업으로 선택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죠. 그러나 예전보다 우리는 그들의 고됨에 동감하고 분노합니다.


그 쿠폰 못 쓴 사람이 나야..


소비자 갑질과 자영업자의 고통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갑질에 대해 공감하며 분노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중고교 교사들은 학생과 학부모를 대하는 감정노동을 기피합니다. 실제로 담임을 포기하는 현상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 신고수는 2019년 2천여 건에서 2023년 1만 여건으로 수직 상승했습니다. 이제 직장에서 누가 괴롭히고 괴롭힘 당하는지 관심을 갖는 세상이죠


우리는 점점 일상에서 감정적 소모를 줄이고자 합니다. 그러니 통제 가능한 관계를 맺고자 하죠. 내 허락 없이 생각과 감정에 관여하는 정서적 침범도 거부합니다. 설사 경제적 대우가 좋더라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나만의 방을 가지고 싶어요

형제가 많던 시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방을 갖는 게 꿈이었습니다. 이들은 핵가족이 되면서 자신의 방을 갖게 되었고, 이제는 1인 가구가 대체하고 있습니다. 내 방을 2개 이상 갖게 되는 사람들이 생겨난 거죠. 방부자들입니다.


변화는 주택에서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식당에서도 나 혼자 테이블을 쓰고, 나 혼자 차를 몰고, 나 혼자 호텔룸 전체를 이용하죠. 혼자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혼자 여행(혼행)에 대한 수요는 2018년 2.5%에서 2020년 4.8%로 증가했습니다. 상승세로 짐작할 때 지금은 10%가 넘을 것 같아요. 여행 플랫폼 트리플의 데이터로는 2024년 여행자 중 9.1%가 혼자 여행을 떠났습니다. ‘혼자 럭셔리‘ 세상입니다. 푸짐한 1인 세트도 많아졌어요.


역시 미국은 옳게 된 나라입니다


일할 때도 공유보다 분리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공유 오피스는 한 사무실을 나눠 쓰는 게 본질이죠. 이처럼 정해진 자리가 없이 자유롭게 앉아서 일하는 핫데스크 시스템을 도입한 기업도 많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공용공간과 개인공간이 명확히 나뉩니다. 내 자리에 와서 말 거는 일이 사라지죠. 애초에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요. 나의 독립성을 보장받습니다.


가정에서의 변화도 있습니다. 최근 포스코이앤씨는 수면 패턴이 다른 딩크족을 위해 수면 공간을 분리하는 평면도를 제공했습니다. 부부가 잠을 따로 자는 거죠. 1인 가구를 위한 초소형 주택도 등장하고 있고요. 공간도 점점 개인화되어 갑니다.


디지털로 친밀감을 만듭시다

전화 공포증(콜 포비아)을 알고 계신가요? Z세대부터 밀레니얼 세대까지 글로벌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인데요. 영국 소비자 사이트 USwitch조사에 따르면 18~34세 응답자 25%는 전화가 와도 받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음성 메시지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반도 되지 않고요.


왼쪽이 저입니다. 진짜로요.


국내 알바천국 설문에서는 40% 이상이 이런 콜 포비아를 겪는다고 하네요. 영국 노팅엄 칼리지는 전화 공포증 세미나도 개설했다고 합니다. 꼭 한 번 들어보고 싶은 수업이군요.


반면 SNS에서 우리는 이전보다 많은 사람들과 친밀감을 느낍니다. 좋아요를 누르면서요. 이른바 디지털 친밀감인데요. 소셜미디어를 통한 관계맺기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하시는 대중적인 행동입니다. 어렵지도 않아요. 팔로우하면 되거든요.


나의..리얼 친구들...


온라인 공간이 오프라인보다 더 편한 소통 방식이 되었습니다. 메시지·SNS에서의 교류는 내가 직접 조절이 가능하거든요. 항상 연결되어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대답도 의무가 아니죠. 진정한 자유공간입니다.


우리는 관계를 선택하고 싶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데 선택권을 원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그런 마음이 들 때, 내가 원하는 방식과 공간에서 친밀감을 느끼고 싶은 거죠.


그래서 우리는 디지털 세상과 우리를 동기화합니다. 휴대폰만 쥐고 있으면 우리는 온라인 세상에 계속 접속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학교나 회사를 가면 내가 만나는 사람을 선택할 수 없지만 SNS는 다르거든요.


우리는 친밀함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선택권을 원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때에만 연결되고, 원하지 않을 때는 단절될 수 있는 자유요. 심리적 거리? 내 마음대로 정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때때로 '부담이 느껴지는 아는 사람'보다 '디지털로 만나는 모르는 사람'이 더 편합니다. 그곳에서 나는 더욱 자유롭고 뚜렷해집니다.



그래서 무슨 말인데요? 3줄 요약


물리적·심리적 거리 유지에 민감해지면서, 관계맺기를 신중하게 선택하는 경향이 생긴 것 같습니다.

감정적 부담과 사회적 피로도를 피하고 싶어하고 디지털 공간에서의 친밀감이 선호되고 있고요

결국 우리는 친밀함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원하고 있습니다.





https://kr.listeningmind.com/case-study/mbti-keywords-trend/

https://www.asiae.co.kr/article/2024011215053102259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4082821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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