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에 따라가야 마음이 편하거든요
트렌드는 매번 바뀌고 있을까
서울대 김난도 교수님은 트렌드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2009년부터 2025년까지 총 17권의 책을 냈습니다. 매년 발간되는 이 책은 '트렌드'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대한민국 대표 서적입니다. 2009년도 첫 트렌드 코리아에는 "I am so Hot, 난 너무 멋져"라는 트렌드가 담겨 있습니다. 집단주의 문화가 약해지고 개인 미디어가 확산된다는 내용이에요.
2009년도는 이전보다 개인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더 솔직해졌다도 합니다. 필사적으로 능력을 계발하고 많은 정보도 손에 쥐려고 했고요.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 취향을 고급화하고, 평범한 순간에도 평범하기를 거부하는 게 2009년의 대표 트렌드 중 하나였습니다. 2025년 트렌드를 2009년으로 잘못 쓴 것 아닐까요?
매년의 트렌드는 존재하고, 조금씩 그 양상이 변하지만 커다란 방향은 어느 순간부터 한 곳을 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개인'의 부상입니다. "무슨 당연한 소릴? 인간은 이기적이고 원래부터 개인이 중요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니에요. 일류의 역사 속에서 '개인'을 생각하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왕이나 가문이나 신에 비하면 한 명의 인간은 바람 속의 티끌 수준이죠.
트렌드의 커다란 방향은 크게 두 갈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는 나를 더 뚜렷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트렌드, 다른 하나는 그러면서 동시에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 하는 트렌드죠.
개인이라는 점이 더 크고 강하게 색을 발하고 있고, 동시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선을 그으며 연결되고 있죠. 이는 우리의 복합적인 심리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물건이 나를 보여주거든요
브랜드나 물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한때 뽀글이로 열풍이 불었던 파타고니아도 '환경에 관심이 있는 나'를 보여주는 브랜드였죠. 저도 페트병으로 만들었다는 오묘한 색의 파타고니아 티를 가지고 있는데요. 좀 비싼 옷이었는데 두 번 정도 건조기에 돌리니 금방 닳아버렸습니다. 애초에 옷이 아니라 페트병은 입었던 거라고 생각하니 슬픔을 이겨낼 수 있었어요. 환경보호로 살린 거북이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했습니다.
요즘은 브랜드 자체보다 나의 취향과 감각을 보여주는 제품인가가 중요합니다. 쿠팡만 들어가도 내가 '원할만한' 것을 잔뜩 추천해 주잖아요. '이 브랜드는 나를 대변하는가?'보다 '이걸로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가?'가 더욱 중요해진 것 같습니다.
패션, 뷰티, 식음료과 문화 생활 전반이 모두 개인 맞춤형으로 변한지 오래입니다. 나만의 개성을 만드는 것도 수월해졌죠. 항상 소지하는 휴대폰 악세사리부터 맞춤형 케이크와 커스텀 음료. 조립 키보드는 이제 예술의 영역이 되었고요. 다양한 스몰 브랜드들도 등장해 처음보는 브랜드와 상품들도 많아졌습니다.
이런 소비 가운데는 SNS가 있습니다. 이제는 없이 못 사는 유튜브, SNS 인스타그램, 숏츠의 틱톡까지. 로그인해서 들어가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취향을 분석해서 나만의 콘텐츠를 추천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콘텐츠가 아니라 상품을 추천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신가요?
다국적 전자상거래 기업인 쇼피파이(Shopify)의 보고서에 의하면 2024년 Z세대 쇼핑객의 55%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51%는 틱톡을 통해 구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인기가 죽어가고 있는 페이스북은 작년 대비 26% 감소한 20%에 머물렀지만요. 인기 좋은 SNS는 이제 멋진 온라인 마트가 되고 있습니다.
2021년 맥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기업이 나를 개인으로 인식하고 나의 관심사를 알기를 기대한다", "개인화된 커뮤니케이션과 제품을 제공받길 원한다"에 각 72%, 71%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합니다. 사람들도 이미 나의 취향과 정보를 캐가는데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쇼핑의 슈퍼스타인 무신사, 올리브영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신사는 스타일별 코디를 제공하고요, 올리브영은 화장품 색소 시장에서 개인화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점점 강해지면 강해졌지 약해질리는 없습니다.
개인화를 제공하지 않는 유통 브랜드는 다이소 밖에 없겠군요. 모든 것이 다 있으니 어떤 면에서 개인화 아닌 개인화네요. :)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우리를 잘 보여줄 수 있게 된 걸까요? 나만의 제품과 맞춤형 서비스로 나는 남과 다른 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걸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개인화된 소비를 하면 할수록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로 분류되고 맙니다. 당신의 추구미는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두둥
수 많은 우리의 욕망을 상품의 다양성이 따라가지 못하는 측면도 있죠.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다른 사람을 따라서 소비하고 있는 우리의 취향입니다. 어느새 나도 결국 비슷한 것을 소비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죠.
나랑 같은 사람 여기 여기 붙어라!
최근 자주 언급되는 심리학 용어로 FOMO(Fear of missing out)가 있습니다. 나만 대세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세상의 흐름에 나만 제외되고 있다는 공포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유행에 뒤처지는 것 같은 거죠.
"나는 개인주의자지만, 트렌드는 꼭 따라가야 한다."라는 말도 이런 불안감에서 일부 비롯되죠. 인기 있는 전시회나 한정판 팝업 스토어, 기한이 정해진 페스티벌은 여전히 긴 줄을 서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약 전쟁도 치열하고요. 한정판 예약은 나훈아 은퇴 콘서트도 예매한 저에게 패배의 맛을 맛보게 한 무서운 곳입니다.
사람들이 몰리는 특별한 경험은 한 편으로 매우 대중적인 경험입니다. FOMO는 상품이 아니라 나만 못해보는 경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요. 경험은 상품처럼 소유하는 것이 아니기에 한정판이 없습니다. 단지 좀 기다릴 뿐이죠. 하지만 경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왜 우리에게 불안함을 줄까요?
우리는 소비와 경험을 좀 나눠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비는 우리를 개성적으로 만들지 못하지만 경험은 진짜 나만의 것입니다. 진짜 나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죠.
귀여운 인형을 골라 가방에 다는 것은 소비가 아니라 나의 안목을 보여주는 경험입니다. 그리고 이 경험은 가방에 인형을 다는 트렌드, 공동 경험이 됩니다.
공동경험은 인증 문화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사람들과 인증이 되는 순간 트렌드는 새로운 사회적 연결고리가 됩니다. 마치 강하게 반짝이는 점이 다른 점들과 선으로 연결되는 것과 같죠.
SNS 인증 문화는 다른 시공간에 있는 개인이 연결되는 문화입니다. 그리고 이는 곧 유대감을 만들어냅니다. 나는 다르지만, 나만 다른 것은 아니라는 안정감도 주죠. 혼자서 한 행동이 함께하는 느낌으로 확장됩니다.
결국 우리가 트렌드를 소비하는 방식은 단순한 경험을 넘어 온라인에서의 소속감으로 이어집니다. 독서 인증, 운동 챌린지, 저속 노화 식단 공유도 모두 이런 이유가 이면에 있죠. 점차 우리의 소비는 소유에서 경험으로 이동합니다. 에리히 프롬이 이야기한 소유냐 삶이냐가 비로소 상식이 된 것 같네요.
이제 소속감과 공동 경험을 줄 수 없는 단순 소비의 세상은 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트렌드가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든다
예전에는 지역, 학교, 직장이 관계의 핵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관심사와 취향이 관계의 핵심이죠. 내가 소속된 곳에서도 나와 관심사와 감각이 다르다면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트렌드는 나와 같은 감각을 가졌는지 확인하는 좋은 기준입니다.
이제 유대감을 느끼게 만드는 공동 경험은 누구나 보는 천만 영화가 아닙니다. 재개봉하는 20만 독립영화가 공동 경험을 만들어냅니다. 대중적인 것이 이전보다 작은 단위로 쪼개집니다. 명량은 내가 누구인지 보여줄 수 없지만 '이터널 선샤인' 재개봉을 보러가는 나는 나를 뚜렷하게 보여줄 수 있죠. 누구는 그것을 팬덤이라고 부르고 누구는 취향, 누구는 커뮤니티라고 부릅니다. 뭐라고 부르던 예전보다는 작은 소모임입니다.
MBTI를 좋아하는 사람의 모임이 아니라, '인프피(INFP) 감성을 가진 대학생'이 우리가 기대하는 공동 경험이자 트렌드고요. '카공족(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프릳츠' 카페를, '알레그리아' 원두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트렌드와 연대감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때로는 세대와 지역, 국가와 성별을 초월합니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평균적 개성의 시대
트렌드는 개인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집단을 형성하는 과정의 일부입니다. 집단은 소비를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자본주의에서는 기업의 이익을 위해, 경제의 순환을 위해 집단화에 도움이 되는 트렌드를 지속적으로 만들고요. 소유와 경험이요?
이제는 기업들도 해당 제품이 소유가 아니라 경험을 제공해준다고 마케팅합니다. 팬덤을 만들고 소비자들의 커뮤니티를 생성합니다. 트렌드를 따라야만 하는 압박은 결국 집단적 소비를 형성하고 경제를 돌리게 만들죠. 자본주의 논리의 기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트렌드가 꼭 자본주의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닙니다. 조선시대에도 유행이 있었을 거에요. "이번에 유행하는 갓 구했소? 차양이 진짜 크고 훌륭하던데.. 지금 주문해도 반 년은 기다려야 한다 합니다"라든가, "요즘 누가 상투를 그걸로 묶소? 말총으로 묶어야지. 참 촌스러운 양반일세"라든가 말이죠.
정리하자면, 소비는 우리를 개성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준다고 마케팅하지만, 그닥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 않습니다. 소유한 것으로 개성을 찾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같은 것을 소비하는 평균적 개성에 도달하고 맙니다. 그것을 알 게 된 우리는 소유가 아닌 경험으로 소비를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속하고 싶은 집단을 내가 선택할 수 있고,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 기회도 생기거든요. 우리는 개성을 원하지만, 그만큼 타인과 연결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공존하니까요. 내가 속하고 싶은 곳을 선택할 때 우리는 진짜 개인주의자가 됩니다.
그래서 무슨 말인데요? 3줄 요약
트렌드의 큰 방향은 이제 바뀌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를 보여주는 것과 집단이 만들어지는 트렌드로요.
나를 잘 보여주기 위한 소비 트렌드가 대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소비만 하게 되면 평균적 개성에 도달하고 맙니다.
소비가 소유가 아닌 경험에 맞춰질 때 커뮤니티가 탄생합니다. 우리는 트렌드를 통해 누군가와 연결되고 새로운 집단에 소속되게 됩니다.
https://www.tm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3
https://www.20slab.org/Archives/38606
https://economist.co.kr/article/view/ecn20240910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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