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힌남노' 무사 소멸 기원
제주에 살지 않으셨죠? 이번 태풍 역대급이 될 거 같은데요
임시 백수(라 쓰고 코드스테이츠 수강생이라 읽는다) 세 달 차인 나는 매일 같은 스터디 카페에 출근하고 있다. 두 달간 카페로 출근하다 보니 이제 조금 사장님과 내적 친분이 생긴 기분이지만 평소에는 카페 사장님과 대화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사장님이 카페 창문을 닫으며 나에게 말을 거셨다. 제주 토박이 말이 기상청보다 더 무섭잖아요!
사장님은 제주 토박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 사장님, 언제나 단정하게 머리를 묶고 계시는 여자 사장님 둘이서 제법 큰 스터디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두 분은 과연 제주 토박이일까 아니면 나 같은 제주 이주민일까 혼자서 궁금해했었다. 오늘 그 궁금증이 풀렸다.
남자 사장님은 열어둔 창문을 닫으며 "제주에 살지 않으셨죠?"라고 말을 거셨다. 내가 그렇다고 답하니, "저는 제주 토박이인데요, 이번 태풍 역대급이 될 거 같은데요. 심상치 않네요."라고 말했다.
아, 정말요? 아니, 제주 토박이라는 사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이제야 좀 겁이 났다. 사실 기상청 예보가 틀리기를 내심 바랐거든. 사장님은 태풍을 오래 봐온 만큼 이번에는 뜨내기 태풍과 확실히 다른 거 같다는 뉘앙스로 말씀하셨다.
사장님은 이럴 땐 무조건 집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장님은 "대형 태풍 왔을 때 못 보셨죠?"라며 "진짜 간판, 슬레이트 이런 게 바람이랑 맞물려서 회오리 친다"라고 말했다. 옛날 초가집 시절부터 말씀하시며(?) 육지는 얼깃설깃 초가집을 만들어 놓지만 제주는 태풍 때문에 촘촘하게 똬리를 틀어 만들었다고 말이다. 그 초가집 위에 슬레이트 같은 걸 얹어 놨었는데 그게 바람에 휘몰아쳤다고.
그러면서 "육지 태풍 생각하시고 이럴 때 나들이 가시는 분도 있는데 그런 간판이나 슬레이트에 맞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럴 땐 집에 있어야 해요"라고 덧붙이셨다. 그런데 사장님... 사장님도 저도 지금 집이 아니라 이 카페에 있는 거 아시나요...?
이 말을 듣자 생각나는 태풍 몇 개가 있었다. 2020년 태풍 제8호 바비, 제9호 마이삭, 제10호 하이선이 그것이다. 특히, 당시 마이삭이 역대급 태풍이 될 것이라는 기상청 예보가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마이삭은 위력을 떨치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이렇게 상세히 기억하냐고? 당시 나는 에너지환경부 기자로 기상청에 출입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기상청이 내심 틀리기를 기대했던 나는 제주 토박이 사장님의 말을 듣고 덜컥 겁이 났다. 이번 태풍 힌남노가 역대급 태풍인 것은 기정사실인가요...? 정녕 이 녀석 무사 소멸될 수는 없나요?
부산에 계신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제주도 괜찮냐고. 갑자기 제주에서 생활하게 된 둘째 딸이 걱정되셨으리라. 아, 원래는 오늘 육지로 가려고 했는데 오늘은 일이 있어 화요일로 비행기를 바꿨어요. 그러자 아빠는 화요일에 태풍이 가장 심한 거 아니냐며 걱정하셨다.
내 속마음은 '그러게요, 사실 저도 언제가 좋을지 모르겠어요... 이번 추석에 육지로 나갈 수 있을까요...? 저 이렇게 제주에 갇히는 걸까요...?'였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부디 힌남노가 무사 소멸하기를,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내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