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공 May 06. 2022

취업준비생으로 살아남기 03-취준생의 정신수련

발레가 나를 살릴 줄이야

 취준생에게 고정된 일정은 많지 않다. 일을 시작한 친구들과 약속을 잡을 때면 민망할 만큼 자유로운 스케줄이 가끔 밉지만 나에게도 반드시 사수하는 시간이 있다. 바로 일주일에   나가는 발레 수업이다. 하루와  ,  달을  마음대로 굴리는 것에는  위험수당이 따른다. 순전히  의지로 매일을 채우기에 자칫하면 완전히 무너질  있기 때문이다. 무휴학이  스펙이고  공백이 약점이 되는 취업 시장에서 나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언젠가 취미가 너를 살릴 거란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로 지속하고 있는 바로 그것, 누군가에겐 베이킹이겠고 누군가에겐 다도일 것이 나에겐 발레다. 뻣뻣한 몸에 무거운 다리를 눈물 머금고 겨우 들어 올리지만 이제 그 의미를 알 것도 같다. 내가 형체 없는 두려움에 깔리기 전에 나를 잡아두는 것이 바로 발레이기 때문이다. 이미 학원에 한 달치 수강료를 지불했고, 수업을 들을 수 있는 날은 정해져 있다. 내 기분이 어떻든 나는 발레복을 입는다.  


 발레 수업은 70분이지만 실제로 내가 발레에 마음을 쓰는 시간은 그보다 훨씬 길다. 오늘의 컨디션을 고려하여 발레 코디를 생각하고 필요한 짐을 챙겨서 학원으로 이동하는 데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수업 시작 20분 전 도착을 목표로 집을 나서고, 여유 시간 동안엔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푼다. 본업이 놀고먹고 공부하다가 좌절 하기인 취준생이 평소 잘 쓰지 않는 근육을 쓰다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신경 쓰며 마사지볼을 꺼낸다. 발레를 하다가 다치다니, 안 될 일이다. 다치면 발레 못 한단 말이야! 발레복을 고르는 시간부터 자기 전 괄사로 종아리를 풀어주는 일련의 과정.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다. 매일이 시험기간 같은 내가 잠시 현실을 잊고 평가에서 자유로워지며 취미의 축복을 맞이하고 있다.




 발레는 결과가 눈앞에 나타나는 취미가 아니다. 뜨개질처럼 손을 움직이는 만큼 완성에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며 책 한 권, 영화 한 편처럼 구분되지도 않는다. 그저 매일 꾸준히 스트레칭을 하고 조금 더 힘들게 자세를 잡아볼 뿐이다. 건너뛰지 않고 계속하면 근육이 자랄 것이란 믿음, 힘든 만큼 성장할 것이란 믿음으로 기꺼이 버틴다.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며 긴 호흡을 다스리는 혼자만의 긴 레이스다. 마음 한편 믿음 한 조각을 붙들고 노력하는 과정이 취업 준비와 닮았다고 자주 생각한다. 자격증을 따고는 있지만, 매일 글을 쓰고 있지만, 내가 저번 달보다 성장했는지 눈으론 볼 수 없다. 그저 믿고 있을 뿐이다. 마주한 현실에 충실하여 체크리스트를 지우다 보면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될 거라 믿으며 오늘도 발레 슈즈를 신는다. 턱 들고, 어깨 내리고, 골반 펴고, 엉덩이에 힘!


내가 발레를 해 온 사실을 눈으로 보여주는 천 슈즈.
닳고 헤지는 것이 반가운 물건은 천 슈즈가 유일할 것이다.



 무엇인가에 빠져 있는 사람은 매력적이다. 마음이 가는 것에 몰두하는 것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 멋진 삶이 된다. 발레를 왜 좋아하냐는 물음엔 답하기 쉽지 않지만, 언제까지 할 거냐는 물음엔 정해진 답이 있다. 내가 서 있을 수 있다면 언제라도 계속. 꾸준히 발레를 한 지 벌써 1년 반이 넘었다. 고민 없이 다음 달 발레 수업을 신청하며 불현듯 느낀다. 나도 발레에 이렇게나 열중해 있구나. 내세울 직업도, 자랑할 연봉도 존재하지 않는 나지만 발레에 푹 빠져 일상생활에서도 스트레칭을 하고 틈만 나면 발레복을 구경하는 내 모습이 나쁘지 않다. 전공생도 아니면서 레페토 댄스 백을 메고 학원에 가는 날이면 왜인지 당당해진다. 왜요? 제가... 발레 하는 사람으로 보이세요? 수업이 끝나고 집 가는 길에 몸이 지쳐 누가 나 좀 업어달라고 속으로 외치지만 마음은 충만해진다. 내일을 살아갈 용기가 생긴다.


 발레 수업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탈의실에 앉아 각자 스트레칭을 한다. 아마 각기 다른 일을 하고 실력도 제각각일 것이다. 다른 하루를 보내다가 발레를 하기 위해 학원에 모인 그녀들. 발레를 좋아한다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가까운 사이가 된 듯하다. 발레복을 예쁘게 입은 요정들 사이에서 나도 어깨를 풀며 잠시 현실을 잊어본다. 마음 쏟을 무언가가 있는 것만으로,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 된 기분이다.











작가의 이전글 취업준비생으로 살아남기 02- 취준생의 밥벌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