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1년의 여유를 맞이하며

by 여름의푸른색




바쁜 시간 속에 사는 서울의 나는 보통 36개의 알람과 함께 하루를 보낸다. 하나도 놓치기 싫어서 맞춰둔 알람이지만 그 속에서도 꼭 놓치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무언가를 놓치게 되면 뒤따라오는 부분에 대한 자괴감도 심해져 갔다. 평소에 '아이만 잃어버리지 않으면 괜찮아'라는 모토로 살지만 반복되는 실수들은 나를 지하 10층까지 잡아당겨 한참을 괴롭히곤 했다. 완벽하고 싶었지만 상황과 체력은 녹록지 않았다.




그에 비해 제주여행에서의 아침 산책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길가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노란 꽃과 구멍이 송송 뚫린 돌담이 안겨주는 작은 속삭임들이 세포 하나하나를 채워나가는 시간이었다. 자다 일어나 대충 겉옷을 걸치고 부스스한 모습으로 아이들과 발을 맞춰 작은 골목을 걸어 다녔다. 소담한 돌담길을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마음속에서 따뜻한 샘물이 차 올랐다. 그때 작은아이가 달려와 손가락만 한 꽃다발을 전해주었다.

"엄마 이 꽃 너무 예뻐요"

길가에 있는 작은 돌틈사이에서 야생화와 잡초를 하나씩 모아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 건네주었다. 아이들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빨리빨리를 외치기에 급급한 서울에서 보았던 아이들의 표정과는 확연히 달랐다.


'여유'

꽃다발을 보며 조용히 되뇌어 보게 되는 두 글자.




어제는 아리수를 마시다가 오늘은 삼다수를 마시게 되었다. 서울에서 목포로 목포에서 다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입도하는 1박 2일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배를 타고 오며 일렁이는 파도를 온몸으로 느꼈다. 그 속에서도 글을 썼다. 이 모든 것을 온전히 기억하고 싶었다. 밤을 지나 새벽이 다가온다. 도저히 속을 알 수 없었던 검은 바다도 이제 푸른 속을 훤이 내어준다. 바다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바다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어서 와 제주의 품으로."


그렇게 우리는 제주에 왔다. 탄산수처럼 톡톡 터지는 푸른 파도 소리가 마음으로 들어와 귀를 통해 빠져나간다. 그로 인해 신비로운 고요함이 머릿속을 청명하게 비워내는 이곳.

제주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다.





끝없이 펼쳐진 중산간 도로를 달린다. 아스팔트와 가로수만 있는 이 도로는 정확한 목적지를 향해 달릴 수밖에 없다. 처음 와보는 길이 보인다. 교차로에서 잠시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멈췄다. 어디로 갈지 살짝 고민이 되었지만 이내 오른쪽으로 시원하게 핸들을 돌린다.



내비게이션은 정확하다. 목적지를 입력하면 정확한 시간을 예측해서 도달하도록 도와준다. 익숙한 길에서는 내비게이션 없이 달리지만 초행길에는 필수다. 왜 그럴까.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때는 길을 모르면 차를 세우고 길 좀 물어보겠습니다 하며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이 없다면 지도를 보면서 갈 수는 있지만 시간을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넉넉한 시간을 두고 출발을 했고 어차피 예상시간 안에 도착하기도 어려우니 쉬엄쉬엄 여유를 가지고 길을 떠났었다.




지금은 다르다. 시간을 예측하는 다양한 앱들을 통해 버스도 지하철도 환승시간까지 계산해서 알려준다. 시간을 아껴주고 약속시간을 지켜주는 고마운 발전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갔던 길만 가게 되고 더 빠른 길만 가다 보니 내가 보고 있는 시야의 공간은 확연히 좁아지는 느낌이다.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을 제외하게 되고 간편하고 안전한 관계만을 가져간다. 길도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안전한 실패를 추구하는 나에게 한동안 사라졌던 과감함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환경 때문이다. 이건 그냥 본능이다. 엄마로 아내로 느끼는 당연한 본능. 그 사이에 작아진 내 자신이 보인다. 이번에는 나를 건드려 엄마와 아내만큼 사이즈를 키워본다. 그러려면 내 안의 과감함을 끌어내어 최전방에 두어야 한다. 이제는 엄마와 아내와 내가 동등하기를 원한다. 밸런스를 맞추어야 할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 앞에는 나의 과감함을 배치했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나를 만날 수 있으니깐.




새로운 길에서 만나게 될 다양한 일들이 궁금해진다. 호기심이 생긴다는 것은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상태임을 증명한다. 실패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은 단 1초도 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새롭게 보이는 모든 것들을 충분히 경험하고 느낄 것이다.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면 어느 길로 가는지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지금은 묵묵히 내 일을 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직선 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교차로에 멈춰 섰다.

다시 방향을 틀었다.

잠시 돌아가도 괜찮다.

우리는 모두 이 길의 끝에서 만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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