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에 살고 있다. 적당히 건강하다가 적당히 아프다가 가면 좋으련만 이마저도 어찌 될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 아무 일 없을 줄 알았다. 나에게는 먼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별은 생각보다 일찍 예고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문 앞에 서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네모난 상자에 불행과 슬픔 그리고 우울을 담고서 그렇게 상자는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도 되는 줄 알았던 나에게 그리고 가족에게 더 이상 지금과 같아서는 안된다고 판단했다.
예고 없이 다가온 이별이 남긴 것은 생각보다 큰 가르침이었다. 아프지 말아야겠다. 가족에게 아픈 모습을 최대한 적게 보여야겠다. 그리고 이 아픔을 나의 자식들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과 입을 틀어막아도 터져 나오는 슬픔의 시간들을 가능하면 모르고 살았으면 좋겠다. 태풍처럼 다가와 모든 것을 가져가버린 그날처럼 온통 회색빛으로 물드는 시간은 없었으면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
극단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이다. 우리는 주변의 누군가를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하고 나 역시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래서 지금을 잘 살아야 한다. 내일 다음에 그리고 언젠가라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던 일상을 뒤집어엎은 다음 다시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다가갔다. 새로운 판을 짰다. 어딘지 모르지만 나의 삶의 한 조각을 손에 쥐고 서서히 내려놓았다. 그다음 그다음의 조각을 하나씩 맞춰가며 모서리에 있기도 제일 가운데에 있기도 한 조각들에 대해서 처절하게 고민했다. 내가 원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나는 어떻게 죽음에 다가가는 시간을 만들 것인가. 나의 마지막에 나는 손에 무엇을 쥐고 가슴에는 무엇을 남겨야 할 것인가. 그래서 결국 나는 무엇이고 싶은가.
우리는 선택할 수 없는 출생이었지만 살아내고 있다. 이렇게라도 숨이 붙어 있는 동안은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파도에 밀려 해변에 가까워지듯 그냥 타성에 젖어 그렇고 그런 하루를 연결하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적당한 웃음 적당한 성격 그리고 적당한 관계.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생각하며 불필요한 시간들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화장을 지웠다. 365일 중에 360일 정도 화장을 했다. 화장이라는 가면 아래 숨어 웃어 보이는 것이 익숙하다 못해 자연스러웠다. 그런 시간들을 겪고 있는지 몰랐지만 제주에서 살게 되면서 나는 화장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러다가 이제는 스킨로션도 잊어버리고 털털한 얼굴로 지내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본질에 가깝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예쁘게 꾸미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지금 정 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도 딱히 불편함은 없다는 것이 가끔은 아이러니하다.
월요일에는 커피 한 잔을 화요일에는 독서, 수요일에는 글쓰기 그리고 목요일에는 요가와 명상, 금요일에는 남편과 맥주 한 잔을 마시며 토요일에는 가족들과 드라이브를 가고 일요일에는 산책을 하며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는 루틴을 가지고 있다. 이 작은 기쁨들이 쌓이는 경험만으로도 하루를 감사히 보낼 수 있고 돈에 연연하지 않게 되고 성공과 욕망만을 따라가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겼다.
이렇게 살다가는 죽을 것 같았다가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았다. 다시 똑바로 현실을 바라보게 되었다. 몇 살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을 가뿐히 밟고 지나왔다. 마흔이 되어도 다른 일을 할 수 있고 새로운 공간과 환경을 향해 모험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어떤 일이 어떻게 생기고 인생이 어떻게 바뀌어가는지는 지금부터 증명해 갈 것이다. 먼저 저지르고 책임감 있게 수습하는 나의 인생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기에 나는 계속 이 방법을 쓰려고 한다.
쉼에 대한 강박을 무너뜨리고 쉬어도 된다는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자연스럽게 젖어들면 좋겠다. 우리는 지금도 너무 열심히 살고 있다. 여기서 더 열심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위한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면서 남은 삶을 지금 여기서 재부팅하고 싶다.
그래서 일단 전원 버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