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려도 괜찮을 자유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제법 선선한 요즘, 가을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왔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하늘 역시 천고마비의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문득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하늘은 제법 파래서 눈이 시리다.
세상에는 단어가 천 개의 천 배 정도 더 필요해 보였다.
‘콜리’라는 이름의 로봇이 낙마하며 읊는 독백으로 푸른빛의 소설은 시작한다. 곧 삶이 끝날 걸 아는 자의 마지막 독백이다. 로봇의 전원이 켜진 순간부터 고장 날 때까지의 시간을 삶이라고 할 수 있다면. 콜리는 투데이와 '호흡'을 맞춘 로봇이니까 감히 삶이라고 칭해도 되지 않을까, 사심을 담아 생각한다.
이 책의 모든 인물들이 주인공이라고 하고 싶지만, 등장인물 관계의 중심에 가까운 인물은 ‘연재’다. 넉넉치 않았던 집안 형편. 어릴 적 순직한 소방관 아버지. 어머니의 식당을 이어받아 하루종일 고된 일을 하는 엄마 보경. 그리고 무엇보다, 어릴 적부터 휠체어 위에서 삶을 이루어낸 은혜. 이른 철이 든 이유가 그렇게나 많았다. 칭얼거리고 반항기 있는 또래 아이들과는 다르게, 건조한 감정표현과 생활습관을 가진 연재는 꼭 로봇 같아 보인다. 정말로 ‘호흡’할 수 있는 로봇.
그런 연재는 경마장에서 우연히 콜리를 만난다.
그 덕택에 콜리의 2막이 시작되고, 콜리는 천 개의 천 배만큼의 세상을 알아간다.
연재는 또 지수를 만난다. 억눌렀던 마음과 형편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로봇을 좋아할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줄 친구를.
물론 투데이는 자신의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저는 감정이 없지만 100마리의 말이 바다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저는 투데이를 구할 거예요. …. 그건 아낀다는 뜻이래요.
인간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감정적이면서 때로 아니 자주, 감정 표현을 두려워한다. 방어기제다. 감정표현이 잦은 사람을 ‘감정적’이라며 험담 하는 일도 잦다. 그건 우리가 스스로의 감정만으로도 벅차서 그런 것이 아닐까. 내 감정을 감당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남의 감정까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게 버거우니까. 세상의 참담한 차가움을 모르던 어린 시절엔 쉬웠던 감정표현이, 나이들면서 어려워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감정적인 존재다. 사랑에 기뻐하고, 이별에 슬퍼한다. 달릴 수 없는 말이 안락사하는 현실에 분노하고, 비대칭인 듯한 우정에 서운해한다.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부끄러울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케이크를 누구에게 줄까’와 같은 달콤한 상황보다 ‘물에 빠졌을 때 누구부터 구할것인지’와 같은 극적인 상황을 가정한다. 목숨이 달린 문제라면 아끼는 마음을 표현하는게 덜 부끄러워지니까.
다리는 형체죠. 진정으로 가지고 싶은 건 자유로움이에요. 가고자 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요.
프랑스 대혁명이 내세웠던 자유의 가치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가고자 한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것. ‘다를 게 없으니까 주눅들지 않아도 돼.’라는 말을 듣지 않는 것. 은혜가 투데이를 각별하게 생각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두 다리로 달릴 수 있지만 인간의 재미 충족이라는 한정적인 목적에서 자유롭지 못한 투데이. 그 가짜 자유마저 이제는 상실하게 될 투데이가, 처음부터 자유를 박탈당한 채 자라난 은혜에겐 꼭 친구처럼 보여서.
어쩌면 사람들에게서 상처받았던 기억으로 인해, 말 못하는 짐승이 더 각별한 것일 수도. 우리는 상처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들을 회피하고 그와 반대되는 것들에게 호감을 느끼는 법이므로.
살아 있지 않은 걸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인간밖에 없으리라.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에서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호모 사피엔스가 인류의 문명을 일구어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살아 있지 않은 '가상'을 믿을 수 있어서라고.
어쩌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살아있지 않은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깃든 우리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보경이 몰고 다녔던 차에 깃든 소방관과의 시간들처럼. 시간은 돌아오지 않기에 그리움은 힘이 세다.
그리움을 느끼려면 그리워할 대상이 분명하게 존재해야 했다.
경험해본 것만을 우리는 그리워할 수 있다. 드넓은 초원에서 달려보지 못한 말들은 초원을 그리워할 수 없다. 그래서 보경은 매일, 매시, 매분, 매초 그리워했을 것이다. 인생에 가장 큰 두 획을 긋고 가버린 소방관을.
그리운 시절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거야.
행복한 순간만이 유일하게 그리움을 이겨.
그러나 보경은 그 모든 순간을 이기진 못하더라도 빈번히 이겨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남겨진 두 획, 은혜와 연재 덕분에. 행복했던 지난 시간의 회상에서 오는 그리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그것이다. 현재 내가 품고 있는 시간을 행복하게 누리는 것. 시간을 그 자체로 천천히 음미하는 것.
투데이는 삶의 한평생 오롯이 달려오기만 했다. 투데이가 느꼈던 자유와 현재 느끼는 그리움은 모두 달리기의 추억이다. 그것도 콜리와 함께 '호흡'을 맞췄던 지난 시간들. 경마 트랙을 빠르게 질주했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이길 방법은 단 하나, 다시 뛰는 것. 그것도 가능하면 빠른 속도로 뛰는 것. 많이 힘들고 아플지라도 자신만의 자유를 누리는 것.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예전만큼 빠르게 달리지는 못할지라도, 지금 제가 달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속도가 바로 삶의 속도가 아닐까. 빠르지 않아도 괜찮다. 천천히 달려도 좋다. 그렇게 하면 스치는 풍경들을 더욱 생생히 음미할 수 있으니까.
천천히 달리면서 이따금 올려다보면 하늘은 항상 거기 있을 것이다. 때로는 먹구름과 비에 가려져 있을지라도 늘 그 자리에 있다.
‘하늘색’이 우리가 아는 푸른 빛의 빛깔이 아닌, 회색빛의 먹먹함을 띄울 미래가 오지 않기를 바란다. ‘천 개의 파랑’에서 선사하는 우리의 미래는 다행히도 여전히 푸르다.
청춘靑春.
인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뜻하는 단어에는 푸르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의 푸른 순간이 한 겹 한 겹 쌓인, 눈이 부시게 푸르른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