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를 그만두고도 나는 그 바닥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방송 말미, 내 이름 석자가 크레딧에 올라가는 그 짜릿한 성취감을 잊지 못했던 탓일까.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결국 나는 다시 발을 들였다. 이번엔 방송사가 아닌, 이 바닥의 가장 밑바닥이라 불리는 외주제작사의 조연출이었다.
이번에도 내가 생각했던 창작의 공간은 아니었다. 이전보다 더 어둡고 열악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연출의 하루는 끝이 없었다. 촬영 준비, 테이프 수거, 편집 보조 등 온갖 잡일에 시달리다 자정이 넘어 퇴근하기 일쑤였다. 새벽 두 시 모니터 앞에서 감기는 눈을 억지로 참아내는데 문득 현타가 찾아왔다.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수명을 갉아먹고 있는지 회의감이 밀려왔다.
나의 상사는 유독 성격이 이상하고 못된 사람이었다. 시청률 압박에 시달리던 그는, 같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유능한 동료 피디를 깎아내리고 다녔다. 팀 분위기는 좋지 않았고, 모두가 그를 싫어했다. 그의 불안과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나에게로 전달되었다. 내가 밤을 새워 만들어간 예고편에 대해 그는 제대로 된 피드백 한 줄 조차 주지 않았다. “약해. 다시 만들어와."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알지도 못한 채, 나는 다시 머리를 싸매고 밤을 지새웠다.
당시에 내가 얼마나 피로의 한계치에 다다랐는지를 보여주는 웃픈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 입 주변이 동그랗게, 마치 예전 코미디 프로그램 ‘웅이 아버지’의 수염처럼 빨갛게 터 있었다. 세수를 해도, 크림을 듬뿍 발라도 그 붉은 자국은 보름이 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단순히 겨울이어서 피부가 트는 줄 알고 찾아간 약국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거 비타민 B가 극도로 부족해서 그런 거예요. 밥은 제대로 먹고, 잠은 잘 자요?"
그렇게 약국에서 처방받은 고함량 비타민을 일주일 이상 먹고 나서야 그 붉은 자국은 서서히 옅어졌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방송을 만들겠다고 들어온 곳에서, 나는 정작 사람 같지 않은 대우를 받으며 영혼을 갉아먹히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던 수많은 밤을 견뎌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이 바닥에 남아있던 실낱같은 미련을 완전히 잘라냈다.
가끔은 생각한다. 그때 나를 제대로 이끌어 줄 좋은 상사를 만났더라면, 그랬다면 나도 계속해서 그 일을 하며 살 수 있었을까. 비록 몸과 마음은 상처투성이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지옥 같은 경험이 있었기에 나는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