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조차 허락되지 않는 유능한 노예

by Bluebrowny

겨울이 지난 지금, 문득 느껴지는 이 따뜻한 공기는 어김없이 그때의 기억을 소환하곤 한다. 첫 취업에 성공했던 10년 전, 스물셋의 봄. 편의점과 카페 아르바이트가 사회 경험의 전부였던 내가 '공중파 다큐멘터리 막내작가'라는 이름표를 달고, 사회에 첫 발을 들였던 그해 봄을.

그곳은 벚꽃이 만개하는 여의도 한강공원의 풍경과는 정반대인 야생이었다. 방송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약육강식의 법칙을 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일러주었다. 졸업장 잉크도 덜 마른, 갓 상경한 나의 순진한 얼굴이, 그들에겐 야생에 내던져진 가냘픈 초식동물 한 마리쯤으로 보였던 게 아닐까.

메인 작가님은 그 세계의 절대적인 포식자였다. 나는 작가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좌하며 그림자처럼 살아야 했다. 첫 업무로 아이템 조사를 명 받았을 때, 나는 나름대로 정성껏 요약한 A4 두 장 분량의 자료를 보냈다. 이후 30분쯤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야, 너 지금 나랑 장난치니? A4 20장 분량으로 꽉꽉 채워서 다시 보내, 당장!!" 예상치 못한 앙칼진 목소리에 너무 당황해서 눈물이 찔끔 날 지경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던 찰나, 옆자리의 나와 다른 팀인 막내 작가 언니가 친절히 도움을 주었다. 나의 안목으로 거르고 요약한 자료를 보낸 건 실수였다. 그저 있는 그대로 자료의 산더미를 통째로 가져다 바치면 되는 일이었다. 공들였던 시간이 무색했지만, 이 바닥의 생리를 모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회의록'이었다. 지방으로 첫 촬영을 간 날, 촬영팀을 포함한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회의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메인 작가님은 나에게 회의록을 작성해서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숙소로 돌아와 회의 내용을 핵심 위주로 정리해서 보냈다. 밤 12시에 다시 날벼락이 떨어졌다. "구어체로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다시 적어서 보내." 분명 본인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서, 누가 봐도 나를 쥐 잡듯 잡는 괴롭힘이라는 게 뻔히 보였다. 나는 억울함에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이번에도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새벽 내내 회의록을 다시 만들고 난 다음에야 잠들 수 있었다. 다행히 주변에는 좋은 어른들도 있었다. "그 메인 작가 원래 악명 높아, 네 탓 아냐."라며 내 등을 두드려주던 선배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를 갈아 넣어 1년을 버텼을 때, 나를 가장 괴롭혔던 메인 작가님은 어느새 내게 살가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내가 결국 퇴사를 결심했을 때는, 정갈한 한정식 집으로 데려가 내 앞길을 뜯어말렸다. 수많은 막내를 거쳤지만, 자기 입맛에 딱 맞게 길들여진 내 유능함이 아까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를 놓지 않으려던 그 손길을 뿌리치고 나는 퇴사를 선택했다. 방송국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을 보고 싶었기에.

첫 직장에서 겪은 그 트라우마는 내게 잔인한 흉터를 남겼다. 나를 소모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무의식적인 강박, 나를 갈아 넣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병적인 강박. 여전히 누군가의 앙칼진 목소리에 심장이 내려앉고, 무의미한 분량의 보고서를 채우며 안도감을 느낀다. 나는 아직도 그 시절의 막내 작가와 많이 닮아 있다. 10년이 지났지만, 그해 봄에서 단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