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덕부정기의 끝

by 파란레몬

남편과 나의 첫 원정지는 우리 부부를 위스키의 세계로 입문시켜 준 남편의 친구 부부가 사는 도시였다.

편도로만 거의 4시간 가까이가 걸리는 곳이라 축구만 보러 가기에는 부담이 되는 거리였지만 남편은 축구도 보고 친구도 만나고, 나는 좋아하는 언니를 볼 수 있는 드문 기회였기 때문에 오히려 좋다는 마음으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경기내용은 별로 재미가 없었고, 내 마음은 온통 축구가 끝난 뒤 술 마시러 갈 생각으로만 가득 차있었기 때문에 나의 입덕은 자연스럽게 뒤로 미루어졌다.


그다음 일정은 맛으로 유명한 지역의 팀이었는데, 그 지역은 여행으로 와봤던 적이 있어서 안 가본 맛집을 가볼 생각으로 마음이 한껏 들떠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뭔가 달랐다.

드디어 시력의 변화를 인정하고 안경을 맞춘 다음이라 공이 어디로 가는지 선수가 어디로 뛰어가는지 아주 잘 보였고, 경기 내용도 아주 재밌었다.

그리고 경기 내내 쉬지 않고 서서 열정적인 응원을 보내는 팬들의 모습이 내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무언가를 순수하게 좋아하고 응원하고 열정이 넘치는 모습은 원래 저렇게 아름답고 멋진 것이었지.


지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나는 내가 좋아하던 선수, 그리고 이전에 응원하던 팀이 내가 그들을 좋아하는 것을 표현하는 게 부끄러워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 많이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태도가 되어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다시는 무언가를 좋아하지 않으려고, 상처받지 않으려고 꽁꽁 닫아둔 마음의 빗장이 열리려는 듯했지만 나는 '입덕부정기'에서 바로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금 마음의 문을 닫았다.

내가 좋아하는 건 이 팀이 아니고, 그냥 좋아하는 사람의 취미를 함께 즐기는 게 즐거울 뿐이라는 식으로.

하지만 그날 열렬히 응원하던 팬들의 모습은 아주 오래 내 마음속에 남아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모습이 내 모습이 되는 날이 그리 빨리 다가올 줄은 몰랐다.


남편은 예매를 할 때마다 항상 나를 위해서 현장응원팀과 멀리 떨어져 조용한 구석자리를 예매해 주었다.

그러면 나는 거기서 축구도 보다가, 간식도 먹다가, 가져온 책도 읽다가, 폰도 보다가 하는 것이다.

k리그에는 관심이 전혀 없던 나를 위한 남편의 배려였다.

그런데 그날의 원정경기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앱이 아닌 다른 은행의 앱을 사용해야만 예매가 가능했다.

비교적 업무가 한산했던 내가 조금 더 귀찮은 설치과정과 가입과정을 겪기로 했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빵집이 있는 그 지역에 갈 생각에 설레었던 나는 대충 아무 자리를 예매하는 데 성공했다.


경기당일 날씨도 굉장히 좋았고, 평소 좋아하는 우주에 관련된 전시가 있는 과학관을 구경하는 일정도 무척이나 행복했다.

길고 긴 줄을 서서 빵을 사 오는 과정조차 행복할 정도였다.

사 온 빵을 먹을 생각에 설레며 우리 자리를 찾아간 나는 그때서야 나의 큰 실수를 확인하고 말았다.

대충 아무 자리 나 앉아야지 하고 예매했던 그 자리는 바로 현장응원팀이 바로 보이는 앞자리였다.

지난번에 인상 깊게 보았던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응원하는 사람들이 앉던 바로 그 자리가 아니던가.

경기가 시작하면 앉아서 빵이나 먹어야지 했던 계획은 빠르게 접어두고, 귀동냥으로 어찌어찌 알게 된 응원가를 열심히 서서 따라 불렀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이 자리를 예매하려던 열렬한 팬의 자리를 내가 뺏어(?) 앉았으면 그에 응당한 책임은 져야 될 것만 같은 이상한 책임감(?)이 들었기 때문인데, 모두가 하나의 목소리로 한 팀을 응원하는 소속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날 유독 멋진 경기력을 보여줘서였을까?


나는 입덕부정기를 겪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거하게 이 팀에 빠지고야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내내 축구 얘기를 열정적으로 하는 나를 보며 남편은 후회되는 게 있다고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응원석으로 데려갈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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