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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연못 Sep 06. 2021

여행 토닥임_어린 그녀들과 또 다른 어린 그녀

해결해야 할 something으로부터의 외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일 년이라는 시한부 휴직 기간을 얻었으나 코로나는 질척거리는 애인처럼 좀처럼 결별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일 년의 반이 넘는 시간이 휙 하니 사라졌다.


작년에 업무에 허덕일 때만 해도 '내가 휴직만 해봐라' 구시렁대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가 될 것임을 아흔아홉 번쯤 결심한 것 같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오롯이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아침에 눈 뜨면 '오늘은 무엇을 할까'라는 막막함이 밀려왔고 저녁에 잠들기 전에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라는 불편한 마음으로 밤새워 뒤척이기 일상이었다.


나의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인데 '현실'은 해결해야 할 <something>을 찾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삶의 본질은 이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것이고,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이상에 도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실 이상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시도'를 하는 것은 나의 현재를 바꾸기에 충분한 힘을 포함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이유로 익숙한 공간인 집을 떠나 낯선 공간으로 나를 데려감으로써 나의 '이상'인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에 조금 더 가까워져볼까 한다.


부산 여행 가는 변명이 길구나..



오후 두 시의 부산역은 설렘



새로운 도시는 언제나 설렌다.


서울 수서역에서 열한 시가 조금 못 되어 기차를 탔는데 부산역에 도착하니 오후 한 시 반 정도였다.


2015년 여름, 활동하던 독서모임에서 '문학기행'이라는 이름으로 부산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는 승용차를 이용한 패키지여행의 형태로 바삐 움직였기 때문에 여행다운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부산이라는 도시는 꽤 매력적이다.


처음 부산역에 도착했을 때 해외, 정확히는 일본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글 간판과 한국 사람들로 가득한 부산역보고 왜 일본이라고 느꼈을까?


지금 글을 적으며 생각해 보니 방사능이 터지기 전, 틈만 나면 일본 여행을 갔다.

공항의 분주함, 낯선 사람들의 다소 생경스러운 언어 그리고 일정에 대한 기대 같은 것으로부터 나오는 특유의 설렘이 있는데 부산역에 내리는 순간 그러한 설렘이 깃든 것 같다.


첫날의 숙소인 파크 하얏트 부산으로 갔다. 체크인은 30F 라운지에서 하는데 방문한 날이 월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실이었다.

'부산 참 멋지네요'를 시작으로 '당신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뷰를 배정해 주세요'라고 부탁했고,

호텔리어의 친절한 미소와 함께 고층 요트 뷰를 배정받았다.


창밖에 펼쳐진 아름다운 뷰, 정갈한 침구, 예의와 존중을 한껏 담은 정중한 서비스 때문에 우리는 좀처럼 호텔 놀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무엇보다 이곳은 내가 해결해야 할 something이 없다.



오후 다섯 시의 부산 바다는 매력적



오후 다섯 시의 바다는 매력적이다.


한 풀 꺾이기 직전의 햇빛은 적당한 온도로 정수리를 어루만지고, 반짝이듯 일렁이는 파도를 지나쳐 온 해풍은 목덜미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간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화려한 브랜드의 자동차들이 줄지어 도로를 지나갔고, 마침 영화의 거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한낮의 뜨거움이 채 식지 않은 동백 섬을 산책하기로 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한껏 달궈진 도로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내 발목과 다리를 감싸고돌았고,  먼 오륙도에서부터 달려옴직한 바닷바람은 내 몸통과 얼굴과 가볍게 부딪히며 산들거렸다.


이렇게 걷고 있으니 건식 반신욕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우리는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한 시간 정도 설렁설렁 걸었다.

안녕하세요? 해풍으로 일광욕하는 고양희 씨



하루의 소임을 다하고 바다 위로 장렬히 떨어지는 태양을 마음에 담고 싶어서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물론, 현실은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는 해프닝으로 끝났고, 돌아오는 길에는 발목마저 가볍게 삐었다.


늘 현실과 이상은 다르지만 오늘만큼은 괜찮아.

나는 지금 여행 중이니까.



어린 그녀들과 또 다른 어린 그녀



다행히도 다음 날 아침은 운이 좋았다.

느지막이 내려간 조식에서 바다 뷰가 멋진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이번 여행에서 신기했던 점이 있었는데,  스물 초반 정도로 보이는 어린 그녀들을 호텔에서 자주 마주쳤다는 것이다.

우리 선배 세대의 방학은 농활이었을 테고, 우리 세대의 방학은 대성리였다.



MZ 세대인 어린 그녀들의 방학은 호텔 스테이라니 멋지군!



우리 옆 테이블에도 어린 그녀들이 자리를 잡았다. 보기만 해도 과즙미 터지는 상큼한 화장을 하고, 비슷한 콘셉트의 하얀 옷을 입은 풋풋한 그녀들은 조식을 즐기러 왔다.


어린 그녀들은 이리저리 음식을 세팅하고 쉴 새 없이 유리잔을 부딪히고, 의자 위로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가끔씩 까르르 터지는 그녀들의 청포도 같은 웃음소리를 듣다 보니


젊다는 것은 웃음소리마저 싱그러울 수 있구나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슬쩍 바라보며 슬그머니 미소를 짓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녀들의 포토 타임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양 손에 아슬아슬 쌓아 올린 접시를 들고 서있는 또 다른 어린 그녀와. 


찰나에 읽고야 만 미묘한 눈빛.





몇 년 전, 광화문 포시즌스로 호텔 스테이를 갔다.

그날 오후 세 시가 되도록 별다른 요기를 하지 않아 적지 않게 배가 고팠다. 나의 짐을 올려주려고 엘리베이터 앞에 같이 서있는 청년에게 물어보았다.


이 호텔에서 제일 맛있는 레스토랑이 어디예요?



순간, 청년의 얼굴 위로 당황스러움이 지나갔다. 그는 잠시 머뭇머뭇하더니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여기서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랬을 것이다.


그 호텔 어느 레스토랑을 가던 둘이 한 끼를 먹으려면 최소 20만 원은 들 텐데 시급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청년에게 레스토랑 추천을 부탁하다니!

나의 무신경함이 민망하고, 연신 미안해하던 청년에게 더 미안해서 두고두고 잊히지 않았다.


또래가 조식 놀이를 즐기는 것을 치우려고 기다리고 서 있는, 주어진 'something'의 무게에 눌린 그녀의 눈빛을 본 순간, 나는 그날 만난 청년의 얼굴이 겹쳐졌다.




모든 것이 나의 엉뚱한 오해이길 바라며 생각한다.

그 미묘한 눈빛의 어린 그녀도 주말이면 과즙 화장과 하얀 옷으로 풀 세팅하고 친구들과 조식 놀이를 즐겼으면 좋겠다고.


지금, 여기.

같이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휴식이 주어지기를 바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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