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처럼 힘차게

코너는 크게 돌아라

by 혜일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수영장을 가던 길에 멀쩡히 주차되어 있는 차를 긁은 것이다. 그것도 티끌 하나 없어 보이는 외제차를.



수영을 다니고 있다. 수영장이 외진 곳에 있고, 강습은 이른 아침이라 차로 이동해야 했다. 수영 강습이 있는 시간에 지하 주차장은 차들로 가득할 것을 예상치 못했다. 차를 긁던 날이었다. 맥스 앞에 이미 이중 주차된 차를 힘껏 밀어놓고는 시동을 켰다. 그날따라 늘 출차하던 가운데 길에도 차가 많아 보였다. 가던 길로 나갈지 왼쪽 끝으로 돌아 나갈지 3초간 고민했다. 나는 평소와 다르게, 왼쪽 길로 돌아나갈 것을 선택했다.



왼쪽 끝까지 차를 운전한 후 코너를 돌 때였다. 처음에는 왼쪽 벽에 많이 닿았다. '삐'하고 앞쪽에서 센서 소리가 났다. 후진을 했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차를 붙여 돌았다. 이번에는 센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괜찮겠지 싶어 그대로 전진한 것이 화근. 순간 찌이이이익- 하는 괴이한 소리가 났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차문을 열고 내렸다. 그 소리는 파란색 스펀지의 도어 가드 하나가 오른쪽에 있던 다른 차 범퍼에 끼이는 소리였다. 그 숨 막히는 장면을 보자마자 나는 곧바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상태에서 차를 움직였다간 더 큰 사달이 날 것 같았다. 잠결에 전화를 받은 남편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 결코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내뱉었다. 내려와서 차 좀 빼줘!



금세 달려내려 온 남편이 차를 빼주었으나 물은 이미 엎질러진 상태였다. 내가 앞서 코너를 작게 돈 탓에 오른쪽에 주차된 차의 앞 범퍼가, 그리고 맥스의 뒤쪽 문짝이 긁혀있었다. 하아. 차주 분에게 바로 연락을 취해야 했다. 일단 남편에게 차주 번호를 사진으로 찍어달라 부탁하고 부랴부랴 수영장으로 달려갔다. 이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남편 왈, "혼자서라도 준비 운동은 꼭 하고 들어가."



아침부터 남의 차를 긁어놓은 탓에 수영을 가르치는 강사님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수영을 다녀와서 다시 내가 긁어놓은 차를 찾았다. 차는 주차된 그대로 있었다. 평온히 맞이해야 할 아침에 이 차의 주인분은 왠 날벼락일까. 아무것도 모르고 계실 이웃 차주 분께 정말 죄송했다. 그런데 차 앞유리에 낯익은 글씨의 메모 한 장이 붙어있었다.


"정말 죄송하게도, 출차 중 선생님의 차에 손상을 입히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연락처를 찾지 못해 제 연락처를 남깁니다. 010-62xx-22xx. 연락 주세요. 다시 한번 정말 죄송합니다..."


남편이 써 놓은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차주 분의 연락처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차주의 연락처가 없으니 다시 집까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메모를 남긴 것이었다. 사고는 내가 냈는데 사과는 남편이 대신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그 손글씨는 또 왜 그렇게 짠하게 보이던지. 나는 그 자리에서 울컥하고 말았다.



다행히 차주 분은 밝은 목소리로 남편에게 전화를 주셨고 적정선에서 합의가 잘 이루어졌다.



이틀 뒤 다시 수영 강습이 있는 날이었다. 어슴푸레 하늘이 밝아지는 시간이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는 아무런 인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걸으면서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상쾌했지만 적막해서 그런지 마음이 조금 외로웠다. 터덜터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맥스를 찾았다.



이런. 이전 날 차를 쓰곤 아무 생각 없이 주차했던 자리는 내가 차를 긁은 날과 똑같은 코너 앞이었다. 똑같은 코너를 돌아야할 형국이었다. 코너 오른쪽에는 그날과 똑같이 다른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맥스 앞에는 덩치가 더 큰 카니발 한 대가 웅크리고 있었고.



코너를 잘 돌 수 있을까. 아냐, 이번에는 무조건 잘 돌아야 돼. 돌아야만 돼... 하면서 이중 주차된 카니발을 힘껏 밀고 있을 때였다. 어떤 분이 '안녕하세요!' 하시며 내게 인사를 하시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내가 사는 동의 경비 아저씨였다.



사복을 입고 계셔서 나는 얼른 알아 뵙지 못했다. 70대 초반은 되어 보이시는 아저씨는 키가 자그마하시다. 뵐 때마다 항상 무언가 일을 하고 계시던 분. 대빗자루로 화단 주변을 휙휙 쓸어내시거나, 자전거를 타고 이런저런 고지서를 전달하시거나, 재활용 종이 상자를 일일이 펼쳐 차곡차곡 정리하시거나. 아저씨는 어느새 카니발을 함께 밀고 계셨다.



"차가 나갈 수 있으려나?"

아저씨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맥스 주변을 살펴보시더니 혼잣말을 하셨다.



"네,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나는 자신 있다는 말투로 대답을 하곤 얼른 차에 올라탔다. 아저씨가 무척 피곤해 보이셨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 뵈었다. 경비 아저씨가 그 시간에 집에 들어가시는 모습을 말이다. 내가 인사를 하고 차에 타자 그제야 아저씨도 반대편에 주차된 자신의 차에 타셨다. 아저씨는 시동을 켜시고도 한참 출발을 안 하셨다. 그래서 얼른 가야 하는 내가 먼저 움직였다. 센서를 켜고 이쪽저쪽 살피며 코너를 향해 운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분명 차에 타셨던 아저씨가 후다닥 뛰어오셔서는 맥스 앞에 서셨다. 아저씨는 곧 양팔을 깃발처럼 휘저으시면서 차가 나가는 것을 도와주기 시작하셨다. 차 안에서 아저씨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저씨가 왼쪽 방향으로 손을 휘저으시면 왼쪽으로 차를 붙이고, 오른쪽 방향으로 손을 휘저으시면 오른쪽으로 차를 붙였다.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시면 차가 잘 나가고 있다는 사인인 줄 알고 안심했다. 아저씨의 지시에 따라 조심조심 핸들을 돌리다 보니 금세 코너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나는 소리 없는 천사를 만난 느낌이었다. 친절함에는 원래 소리가 없던가. 본디 가식없는 친절은 요란하지 않게 조용히 베푸는 것. 그런 것인가보다. 예상치도 못한 친절을 선물로 받았다. 나는 미처 차 문도 내리지 못한 채, 아저씨께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주차장을 나왔다. 아저씨는 다행이라는 듯한,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하루 뒤. 나는 비타 500을 들고서 출차를 도와주셨던 경비 아저씨께 찾아갔다. 아저씨는 고무장갑을 끼신 채 문이 열린 화장실에서 걸레를 빨고 계셨다. 나는 슬그머니 아저씨 책상 위에 음료수를 놓아드리곤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고마워요. 그런 게 정이지요, 뭐."

아저씨는 쑥스러우신 듯 평소와 달리 작은 음성으로 답하셨다.



몇 걸음 더 걸어 집으로 들어가던 길. 연초록 잎사귀들로 뒤덮인 나뭇가지들이 봄바람에 출렁이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깃발처럼 아주 힘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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