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을 때

by 혜일

아이 친구의 생일이라 선물을 챙겨줄 겸 근처 문구점에 들렸다. 또래 남자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대형 고무 딱지 하나와 여름에 신기 좋은 양말을 먼저 고르고는 선물 포장지 코너를 찾았다. 선물의 크기가 커서 집에 있는 포장지로는 모자랄 듯 싶었기 때문이다. 문구점 안을 한참 돌다가 구석진 공간에서 둘둘 말린 포장지를 찾았다. 규모가 꽤 큰 문구점인데도 포장지 종류가 많지 않았다. 그리고 포장지 디자인이 30년 전 나의 초등학교 시절에 보던 것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에 더 놀라웠다. 세계 지도 모양, 빨간 색 파란 색 하트 모양, 크리스마스 시즌도 아닌데 산타 얼굴이 그려진 포장지까지. 요즘 인터넷 사이트에는 얼마나 세련되고 예쁜 포장 케이스가 많은데. 생각하면서도 세월이 멈춘 듯한 느낌의 포장지를 지나칠 수가 없었다. 어느 새 내 머릿 속 기억 창고에도 '딸깍'하고 불이 켜졌기 때문이다.



은색으로 반짝거리는 포장지. 보기만해도 정겨웠다.


그 날도 포장지의 겉과 속은 은빛으로 빛났다. 땡볕이 내리쬐는 8월. 생일 맞은 언니를 위해 동네 문방구로 달려가 그 동안 봐두었던 샤프를 손에 쥐었다. 기둥은 앵두처럼 빨갛고, 중간엔 하얀 백합 그림이 그려져 있던 샤프. 신기하게도 샤프에서는 백합 꽃 향기가 났다. 샤프의 아래 쪽이 꽤 묵직했던 거금 오 천원짜리였다. 초등학교 3,4학년 쯤이었을텐데 당시의 나는 그 돈이 어디서 났을까. 거기까진 기억나지 않았지만 언니에게 그 샤프를 꼭 사주고 싶었던 마음, 그리고 샤프 한 자루와 오천 원을 맞바꾸던 장면, 마침내 그것을 포장지로 예쁘게 감싸 언니의 생일을 축하해줄 수 있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한 동안 잠자고 있던 과거의 기억 하나가 문득문득 이렇게 내 오감을 자극하며 깨어나는 순간들이 있다. 이런 순간은 잃어버렸던 소중한 물건을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다시 찾은 느낌이다. 기억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 나는 내 안에서 30여 년을 산, 기억이라는 무형의 생물이 신기하기만 하다. 정작 당시에 모두가 주목했을 백합 향내 나던 샤프는 지금 아무도 그 행방을 모르는데. 하지만 어떤 기억은 '망각의 창고' 속에 갇혀 평생 깨어나지 않다가 소멸하거나,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된 모습으로 튀어나올 수도 있다.


일상이 지치고 힘들 때, 일부러 내 머릿 속 기억 창고 안을 도피처 삼는 날도 있다. 의지적으로 옛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것이 내게 큰 도움이 된 적이 있다. 아이들을 임신했을 때, 입덧이 무척 심했다. 특히 작은 아이를 임신하고 4주차부터 시작됐던 입덧은 거의 3개월 간 나를 괴롭혔다. 밥을 못 먹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물도 제대로 마시기 힘들었으니, 삶의 의욕이 싹 사라졌던 시간들이었다. 모든 것을 다 토해내도 속이 울렁거려 잠을 자기가 어려웠다. 아무것도 하기 힘든 지경이었지만 원래 공상하기를 좋아하는 나는 그 와중에도 누워서 생각하기는 멈추지 않았다. 머릿 속으로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나는 어느 덧 유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내 몸은 그 시절 살던 집으로 가 있었고, 날마다 걷던 길이 생생히 그려졌다. 집부터 학교까지 10분 남짓 걸리는 회색빛 골목길. 길 양쪽에 옹기종기 붙어있던 단층의 작은 집들. 그 속엔 내 동네 친구들이 살고 있었다. 골목길 뒤편으로는 경의선 기차가 지나가는 철도가, 철도를 건너면 끝없는 들판이 펼쳐졌다. 들판으로 내려가기 위해 언니, 동생과 항상 건너다녔던 철도 길. 역 안에서 아저씨가 나올까봐, 레일 위의 선이 다리에 닿으면 찌릿찌릿 할까봐, 조마조마한 마음과 스릴로 가득했던 그 길을 기억 속에서 몇 번이고 뛰어 넘었다.

골목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내가 다닌 초등학교가 우뚝 서 있고 왼쪽 문방구 옆으로 강아지 풀이 가득한 새 길이 나 있었다. 이렇게 한참, 머릿 속으로 어릴 적 걸었던 길들을 따라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울렁이던 속이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 뒤로 나는 밤마다 누워서, 유년 시절의 기억들을 하나 둘씩 떠올리며 입덧을 잠재우곤 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기억하는 행위 자체가 내겐 소중하다. 좋은 감정을 느꼈던 옛 기억들, 특히 유년 시절의 추억이 내 안에서 얼마간이나 동고동락할지 모르겠다. 해를 거슬러 올라갈 수록 기억나는 장면 자체가 점차 줄어드는 것 같다. 당장 눈 앞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한가득인 일상에서 이미 휘발된 과거를 더듬을 여유가 없을 때도 많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도 좋은 기억을 천천히 떠올리다 보면 빈곤해졌던 감사와 행복이 거짓말처럼 차오르는 경험을 한다.


가끔씩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잘 보이지 않고, 사람에 대한 실망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을 때. 나는 그럴 때를 대비해 잘 기억하려 한다. 잘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려 한다. 사람이나 사물, 공간 등 기록의 대상에 대해 새로운 시각과 관심을 갖게 되고 나아가 애정까지 되살릴 수 있는 일은 글쓰기가 주는 가장 좋은 선물이라 생각한다. 완벽할 순 없지만 좋지 않은 기억보단 좋은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 현재를 잘 살려 한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기대할 날들보다 기억할 날들이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른이 된 뒤로 미래에 대한 책임감과 대비만으로도 삶이 무거운 탓에 과거를 기억하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지 않았나싶다. 내일에 대한 성급한 기대에 앞서 지나간 하루를 천천히 기억해보는 것. 그리고 잊고 지내던 좋은 감정과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 그렇게 음미하고 반추할만한 하루하루가 쌓여갈 수 있다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퍽 근사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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