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두기 4단계 조정으로 큰 아이가 등교 대신 온라인 수업을 하게 되었다. 스물 다섯 명 남짓한 반 아이들의 얼굴이 줌 화면 너머로 온전히 보인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앳된 얼굴들. 아이는 한 학기가 지나도록 이제야 반 아이들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된 것 같다. 한 시간 반 가량, 아이는 빡빡한 수업 일정을 마쳤고 나는 점심 메뉴를 생각했다. "떡볶이 해줄까?" "응, 좋아!"
전날 장을 보며 한 학기 만에 아이와 함께 먹을 점심 메뉴를 고민했다. 온라인 수업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방학이 코 앞이었다. 그동안 아이는 점심 한 끼를 학교에서 먹고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부터 당분간은 내가 그 끼니를 채워줄 차례다. 끼니가 끊기지 않도록 먹이는 일. 학교를 졸업하고도 아이들을 키우며 여전히 숙제 중이다. 엄마의 매일 숙제, 끼니 준비하기. 그래, 오늘은 첫날인데 쉽게 가자. 그래서 선택한 메뉴가 떡볶이었다.
미리 사다 둔 떡볶이 떡을 물에 불리고, 다시마로 육수를 만들고, 어묵과 양파, 대파 등을 썰어 냈다. 여기까진 특별히 고민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손이 움직인다. 하지만 재료가 완벽하다고 음식이 다 맛있다면 식사 준비가 어렵지 않겠지. 떡볶이는 언젠가부터 큰 아이의 최애 음식 중 하나가 되었는데, '엄마의 떡볶이'는 '쫄인 맛'이 부족하다고 늘 얘기하던 터였다. 아이가 좋아하는 쫄인 맛이란 일주일에 한 번씩 건너편 아파트 단지에 서는 장터의 떡볶이 맛을 일컫는다. 재료라고는 새끼손가락 같은 떡과 벌건 고추장, 얇다란 사각 어묵 조금이 전부인 것 같은데 그것이 아홉 살 남자아이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아이가 좋아하는 쫄인 맛을 분식집이 아닌 가정집에서는 어떻게 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던 찰나, 잊고 지내던 후배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곧바로 휴대폰을 뒤졌다. 몇 달 전 후배와 나눈 대화 메시지 속에 떡볶이 레시피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 오늘은 그렇게 해보자. 갑자기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듯 힘이 났다.
후배가 떡볶이 레시피를 알려준 것이 벌써 두 달 전의 일이다.
큰 맘먹고 홀로 외출을 했던 토요일 정오, 약속 장소였던 사당역 거리는 때마침 한산했다. 오월 중순에 부는 바람은 바깥나들이를 꿈꾸는 이들에게 후하다 싶을 만큼 선선했다. 버스 안에서 우연히 괜찮은 쌀 국숫집을 검색한 나는 만나는 이들에게 이곳에서 보자고 미리 이야기해 두었다. 식당 문을 연 순간, 눈앞의 풍경은 인적이 드물었던 사당의 골목길과는 정반대였다. 가림판을 사이에 두고 호로록 쌀국수를 먹고 있는 많은 사람들. 그 틈에서 반가운 얼굴들과 마주치자 얼른 눈인사부터 건넸다.
반가운 얼굴 두 사람 중 한 명은 내가 20대 후반, 교회에서 알게 된 사이였다. 당시 수능을 막 치르고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던 그는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무척 진중한 눈빛이었다. 수년 만에 후배를 마주하니 그때 새내기 청년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풋풋했던 대학 새내기는 어느새 어엿한 요리사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음식 이야기로 대화의 물꼬를 튼 것은 고수 때문이었다. 쌀국수에 고수를 넣어 먹는 사람은 세 사람 중 나 혼자 뿐이었다. 그즈음에 친정 엄마가 어린 고수를 따다 싸주셔서 나물로, 비빔밥 재료로 먹다 보니 나는 어느새 특유의 고수 맛에 익숙해져 있었다.
"언니, 고수 먹어요? 나는 이거 맛이 너무 특이해서 못 먹겠던데." 옆에서 쌀국수를 먹던, 어느덧 새댁이 된 친한 동생이 말을 꺼낸다. "응, 나도 전에는 안 먹었는데 데쳐서 나물로 만들어 먹었더니 먹을만하던데?" 나는 집에서 해 먹었던 고수 나물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누나, 그거 들기름 두르고 깨소금 솔솔 뿌리면 돼요."
과묵하게 쌀국수를 먹던 요리사 후배가 갑자기 눈빛을 반짝이며 이야기했다. 야, 나도 그 정도는 알지. 서로 웃으면서 다시 쌀국수를 호로록.
"근데 낙지랑 부추 넣어서 부침개 해 먹었는데 자꾸 안 익고 실패해. 왜 그러지?"
집 밥 만들기에 한창 열정을 쏟고 있는 새댁 동생이 묻는다.
"아, 반죽에 탄산수 넣거나 얼음 넣어서 차갑게 하면 더 바삭해질 거예요. 뚜껑 덮으면 눅눅해지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최대한 얇게 부쳐요. 그리고 부침개는 아무래도 기름을 많이 둘러야 맛있어져요. 그래서 몸에는 별로 안 좋을 수도 있지만."
척하면 척, 음식과 요리 레시피에 관한 이야기만 하면 말이 술술 나오는 후배가 신기했다. 엄마들끼리 모여도 이렇게 음식 이야기에 서로 열변을 토하지는 않았는데. 예상치 못한 이야기 전개에 속으로 웃음이 났다. 그는 한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일을 하느라 주말이 가장 바쁘다고 했다. 직접 만든 요리 사진 좀 보여달라고 했더니 후배는 요즘 연구 중인 스테이크, 지방에서 연습했던 케이크 사진 등을 조심스레 꺼내 보여주었다. 지난 설 때는 집 안의 할머니, 어머니들을 대신해 자신이 음식 준비를 홀로 준비했다며 명절의 무용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가끔씩 안부 연락만 했을 뿐 사실 나는 그 후배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식품 회사에 다니는 줄만 알았는데 그동안 요리사 자격증을 땄다고 했다. 지방에 위치한 회사를 다녔던 그는 휴일이면 만날 사람도 없고 심심해서 요리를 본격적으로 공부했단다. 어릴 때부터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데 주변 친구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관심도 없고 이해도 못했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유명 식품 회사에 들어갔지만 얼마 전 그만두고 요리사로 재취업한 후배. 이전 회사보다 연봉은 절반, 토요일에 한 번 쉬려면 한 달 전부터 선배에게 미리 말해야 하고 음식을 만들지만 정작 자신의 끼니는 너무 바빠서 급하게 후다닥 먹는다는 직장이었다.
잠시 생각해보니 이 후배는 내 주변에 유일한 요리사였다. 그것도 남자 요리사! 후배는 쉬는 날이면 서점에 들러 요리 책을 찾아본다고 했다. 머릿속엔 연애할 생각보단 온통 음식 생각밖에 없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게 분명해 보였다. 사실 TV 너머 유명한 남자 셰프들은 많지만 내 주변만 봐도 요리사가 없거니와 요리를 즐기는 남자들도 별로 없는 걸 보면 후배가 그동안 진로를 결정하는 데 꽤 고민이 깊었겠구나 싶었다.
남들보다 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꼭 맞는 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행복하단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행복해 보였다. 자신의 일에 진심인 누군가를 만날 때, 곁에 있는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덩달아 그가 지닌 밝은 에너지를 함께 느낄 때가 많다. 그리고 그 만남의 여운이 길게 남는다.
다음 날, 늦은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카톡이 신나게 울려댔다. 전날 만난 요리사 후배였다. 메시지 내용은 다짜고짜 '떡볶이 레시피'였다.
누나, 떡볶이 레시피요.
양념장은
고추장 2.5큰술, 고춧가루 3큰술, 간장 1.5큰술, 설탕 2큰술, 물엿 3큰술, 다진 마늘 1.5큰술
이걸 섞어서 랩 씌우시고 15분 정도 숙성해서 넣으시면 좋을 거 같아요!
먼저 육수 내시고 양념장 풀고, 어묵이랑 양파를 넣구요. 한소끔 끓으면 떡(밀떡, 쌀떡) 넣으시고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끓이시고 대파 넣으시면 돼요
떡은 미지근한 물에 불리시고, 떡 넣을 때 물기 털어서 하면 돼요^^
그동안 후배에게 받아 본 카톡 메시지 중에서 가장 긴 메시지였다. 맞다. 전날 쌀국수를 다 먹을 즈음 마지막으로 이야기했던 음식 메뉴는 떡볶이였지. 나는 아이가 커서 이제 매운 떡볶이를 먹는데 시판 떡볶이처럼 맛있게 잘 안된다는 이야기를 꺼냈던 기억이 났다. 밀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우리는 얼른 자리를 떠야 했기에 요리사 후배의 떡볶이 잘 만드는 비결은 미처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한창 바쁘게 일할 시간에 내게 떡볶이 레시피를 알려줄 생각을 하다니.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꼭 후배가 가르쳐 준 레시피대로 떡볶이를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양념장을 숙성할 것. 쫄인 맛, 즉 간이 잘 배인 떡볶이 맛의 비결은 여기에 있었나 보다. 떡볶이 양념을 미리 만들어 숙성시키면 맛이 더 깊어지고 진해지는 것을 그동안 나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아이 입맛에 맞춰 고춧가루는 빼고 비율을 조정한 양념장을 얼마간 냉장고 안에 넣어두었다. 잘 숙성된 양념장을 냄비에 풀어 넣고 떡의 쫄깃함을 살려 불 조절을 한 다음 아이에게 내어주었다. "맛있어?" "응, 맛있어!" 평소에 떡볶이를 하면 맛이 시원찮거나 배가 불러 꼭 남겼는데, 이번에는 둘이서 전골 냄비 하나를 싹싹 다 비웠다. 성공적이었다. 오래 끓이지 않아 떡이 풀어지지 않고도 매콤 달콤한 맛이 잘 배인 떡볶이었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이나 공부는 고민하는 순간까지도 즐거울 수 있나 보다. 떡볶이 레시피를 대신 고민해 준 후배를 보며 든 생각이다. 후배는 돌고 돌아 꿈의 길을 만난 듯했지만 어쩌면 그 시간 동안 꿈은 더 숙성했는지 모른다. 당장 가 닿을 수 없는 꿈이라도 마음이 이끌려 좋아하는 일들을 하다 보면 언젠가 그것이 꿈의 질료가 되고, 때가 되면 그 꿈의 질료들이 잘 어우러진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꿈도 숙성될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시간을 내어주면 천천히 깊어지고 진해지는 양념장처럼.
떡볶이를 만들며 다시 꺼내 읽은 후배의 메시지 말미에는 "담번에는 불고기 같은 고기류 레시피도 알려드릴게요!"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 꼭 알려주길. 후배만의 육류 요리 레시피는 또 어떠할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