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빛나는 어깨로

by 혜일

목덜미가 축축해서 눈을 떠보니 새벽 5시였다. 땀으로 베개가 젖어있었다. 때 이른 여름 무더위가 연일 단잠을 깨웠다. 커튼을 젖혀보니 어슴푸레 날이 밝아있었다. 다시 잠들기도 어려워 거실로 나오던 찰나, 웬 아이가 우두커니 앉아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니 큰 아이가 거실 바닥 한가운데 앉아 뭔가를 하고 있었다.


"EH, 벌써 일어났어?"

"응, 어제 수학 숙제를 못해서 지금 하고 있어."


아이는 이미 잠은 쫓아낸 듯한 말끔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기는 4시 반에 일어났다고 했다. 학교에서 받아 온 수학 학습지 한 장을 다 푼 걸 보니 그 말이 진짜인 것 같았다. 아이는 전날 저녁 내내 동생이랑 태평하게 놀았는데 내심 못다 한 숙제 걱정을 하며 잠들었나 보다. 그렇다고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새벽 공부를 하고 있다니. 책임감 한 짐이 얹혀있는 아이의 어깨가 더 작아 보였다.


나는 나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하루의 시작이 버거웠지만 그래도 새벽이었다. 꼭 닫아두었던 바깥 베란다 문을 활짝 연 순간이었다. 맑은 물소리처럼 청아하게 들리는 새소리가 건너편 아파트 단지를 꽉 채우고 있었다. 낮과 밤에는 듣기 힘든 새들의 합창곡을 누군가 최대치 볼륨으로 틀어놓은 것 같았다. 동틀 무렵의 새벽하늘은 또 얼마나 아름답던지. 사람의 손으로는 감히 따라 그릴 수도 없는 하늘의 붓질이었다. 평소 자연 풍경엔 관심 없던 아이가 베란다 너머 하늘을 보고는 먼저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이래서 사람은 일찍 일어나야 하나 봐. 어느새 잠이 깨어 베란다로 나온 남편에게 나는 말을 건넸다.






무더위는 힘들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여름 풍경의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는다. 한낮의 불볕더위를 잘 견디고 나면 맑은 하늘과 뭉게구름, 저녁노을을 보상처럼 누릴 수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동틀 무렵의 새벽 풍경 못지않았다. 주중엔 저녁을 지으며, 서쪽 주방의 창 너머 보이는 하늘을 흘끔흘끔 자꾸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파트 틈새로 조각난 하늘을 엿보는 것이 나는 답답했다.


주말 저녁, 온 가족이 근처 공원으로 달려갔다. 웬만한 날씨에 나가도 멋진 일몰을 볼 수 있는 바다 공원이었다. 일몰 시간은 저녁 7시 50분. 우리가 집을 나선 시간은 7시 반. 가까운 거리였지만 차를 타고 있는 내내 행여나 해가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심장이 두근댔다. 일몰 시간이 가까워지면 구경 나온 사람들로 주차 자리가 부족한 곳이었다. 우리는 공원 끄트머리에 차를 대고 내리자마자, 지는 해를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기대한 만큼 저녁노을은 아름다웠다. 온종일 집 안에 머물며 지끈댔던 머릿 속도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맑게 개이는 듯했다. 그제야 내 양쪽 어깨 위에도 얹혀있던 짐스런 무언가가 가벼워짐을 느꼈다. 주변 환경의 변화에 가장 먼저 민감해지고 자기 새끼들을 지키고자 하는 어미의 적개심은 본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날로 심해지는 전염병과 급작스런 무더위에 아이들을 잘 먹이고 무탈히 키워내는 일만으로도 삶의 긴장감이 극에 달한 듯했다. 아이들은 차고 시원한 것만 찾았고, 엄마인 나는 매 끼니만큼은 물러설 수 없어 속을 따뜻하게 해주는 메뉴 위주로 만들어댔다. 끓이고 볶고 조리고 찌고. 어떤 날은 낮에는 김치찌개를, 저녁에는 된장찌개를 끓이기도 했다. 불 앞에 서면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더웠다. 한 주간을 돌아보니 스스로 융통성이라곤 허락하지 않았던 식단 메뉴들의 또 다른 이름이 떠올랐다. 엄마 사람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어깨에 자동 탑재된 그것. 바로 책임감이었다.




수평선 아래로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해는 단편 무성 영화의 주연배우였다. 사람들은 모두 다 바다 건너 지는 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서 있었다. 바다와 공원을 가르는 난간 앞은 야외 스탠드 객석 1열과 같았다. 맑은 여름의 일몰 풍경은 관람료가 필요 없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영화였다. 이 모든 풍경이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것 하나 기여한 일 없는 내게 자연은 언제나 관대하게 그 아름다움을 나눠준다. 이렇게 멋진 풍경을 왜 그동안 자주 누리지 못했을까. 살면서 누리는 진정한 만족과 행복이란 것은 스스로 쌓아 올린 소유의 양에 비례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했다.


저녁노을을 마주 선 사람들의 검붉은 실루엣도 아름다웠다. 노을만큼이나 낯선 이들의 뒷모습도 한참을 바라보았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 단위로 짝을 이루고 있거나 가볍게 산책을 나온 듯 홀로 서서 사진을 찍는 이들도 꽤 있었다. 그중에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위안이 되었다.


높고 낮은, 크고 작은 어깨들이 나란히 나란히. 서로 다른 하루를 살았을 테지만 같은 해를 함께 보며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따뜻한 동질감을 느꼈다. 다들 어떤 하루를 보내고 바다 노을을 보러 온 것일까. 어떤 어깨 위로는 뛸 듯한 즐거움과 기쁨이, 또 다른 어깨 위로는 고단함과 슬픔이 내려앉았겠지. 다 알 수 없으나 노을로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서는 모두 다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노을 아래 빛나고 있는 두 어깨로 삶의 균형을 단단히 잡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너무 가볍지도 또 너무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삶의 무게를 지고서 말이다.


많은 사람들 중에 노을을 함께 바라보던 모녀가 특히 내 눈길을 끌었다. 젊은 엄마와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아까부터 다정하게 걷고 있었다. 아이의 아빠는 휴일인데 근무 중인 것인지, 어떤 다른 사정이 있는 것인지 함께 있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괜한 오지랖을 떨며 어떻게 엄마와 어린 딸 단 둘이 여기까지 나왔을까. 상상하고 있는데 아이의 엄마가 우리 집 작은 아이에게 "오빠, 안녕~"이라고 웃으며 인사말을 건네주었다. 나는 아이가 저만큼 어렸을 때 남편 없이 이만큼 큰 공원을 활보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젊은 엄마의 미소와 활기 넘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용기가 났다. 남편이 집에 없을지라도, 매일 저녁 아이들과 근처 공원은 함께 산책할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지. 속으로 생각하며 내 나름의 삶의 균형을 다짐했다.


나의 두 아이들은 황금빛 노을은 뒷전이었으나 갈매기 먹이 주는 일에 흠뻑 빠져 있었다. 이곳에 날아드는 갈매기 떼를 아이들은 무서워하지 않고 언제나 좋아했다. 특히 새우깡 주는 일은 이곳 공원에 오는 아이들의 가장 큰 낙이었다. 전에는 아이들이 바다 위로 새우깡을 던져주면 갈매기들이 날다가 받아먹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갈매기들이 아예 난간에 앉아 아이들의 새우깡을 받아먹는 것이 아닌가. 입을 쫙쫙 벌리며 얌전히 먹이를 기다리는 갈매기에게 아이들은 신이 나서 새우깡을 먹였다. 이리 와, 너도 먹어야지. 자신들이 엄마라도 된 양, 갈매기를 구슬리면서 먹기 싫어 도리질 치는 아가 이유식 먹이듯 했다.


한참을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먹이를 주던 아이들은 오면서 사온 새우깡 한 봉지를 금세 다 비웠다. 작은 아이가 남은 새우깡 한 봉지마저 또 뜯어달라는 것을 갈매기 배탈 난다고 말렸다. 갈매기를 바라보고 서 있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무척 아이답게 느껴졌다. 해는 이미 사라졌고 노을을 바라보던 사람들도 흩어진 뒤였다. 춤을 추듯 즐거움에 들썩거리는 아이들의 어깨 위로 주홍빛 노을만 살금 내려앉았다. 일몰 시간이 한참 지난 저녁 8시 반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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