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어제와 보이지 않는 내일을 잇는 말
생활 속에 얼굴을 묻고 있다가 언뜻 고개를 든다. 성큼성큼, 앞서 걷고 있는 계절의 등이 보인다. 일상은 비슷해도 바깥의 풍경은 눈에 띄게 시시각각 바뀌어간다. 집 앞 벚나무는 언제 연분홍 꽃잎을 입고 있었던가. 기억은 벌써 희미하다. 줄 지어 늘어선 벚나무들의 패션 코드는 이미 그린. 연둣빛에서 진초록빛으로 나무는 옷의 볼륨도, 푸르름의 채도도 더해가는 중이다.
요즘은 아파트 단지 내에 심겨있는 단풍나무를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내 시선은 다섯 살배기 아이 손바닥만 한 초록빛 나뭇잎으로 향한다. 뾰족한 나뭇잎 끝에는 때아닌 붉은 물이 살짝 들어있다. 그 천연의 네일아트가 하도 고와서 자주 내 눈길을 끈다.
그 곁에는 둥글둥글한 잎사귀를 차분히 키워가는 배롱나무가 있다. 가지가 굽어지고 휘어져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나무다. 작년 여름, 배롱나무 꽃에 마음이 많이 머물렀던 기억이 난다. 장마가 지나고 더위가 끝난 뒤에도 가지 끝에서 의연히 버티고 있던 배롱나무 꽃. 그 곁에 내 마음도 매달아 두고 한 번씩 살필 수 있었다. 강력한 여름 더위 앞에서 쉽게 녹아져 내릴 뻔했던, 물렁한 마음을 덕분에 버텼다.
비가 온 다음 날이었다. 맑고 푸른 하늘에 숨이 크게 쉬어졌다. 전시장 촬영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전시장까지 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했다. 십여 분 뒤. 근처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 안에는 트라이보울이라는 전시 공간이 있다. 매 년 이맘때 즈음이면 청년 작가들의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네 명의 작가는 영상이나 설치 작품을 통해 하루라는 시간을 어떤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구현해 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전시는 '동그라미를 잘 굴리는 방법'이라는 제목을 가진 설치 작품이었다. 관람객은 청록빛 작은 구슬들을 럼주통 모양의 커다란 물체 안에서 굴려보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데구루루 구르며 구슬이 맞부딪힐 때마다 청량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작은 구슬 몇 개를 손에 쥐고 소중히 여겼던 어릴 적 내 모습이 떠올랐다. 명랑한 기분이 들며 가슴이 설레었다. 구슬이 길을 따라 구를 때마다 파스텔 가루 같은 것이 떨어졌다. 시간이 지나간 흔적을 보여주는 듯했다. 삶도 구슬처럼 구른다. 하루라는 시간의 동그라미를 굴릴 때마다 나도 이렇게 아름다운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이번 전시의 주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 포스터에 쓰인 문구를 자세히 보니 '그'의 앞, '고'의 뒤에는 괄호 모양이 더해져 있었다. 게으름, 실수, 무기력, 자만, 미안함... 첫번째 괄호 안에 들어갈만한 여러 단어들이 연이어 생각났다. 지나간 일상을 돌이켜볼 때 꼭 떼어내 버리고 싶은 시간의 괄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부끄러운 시간의 괄호를 의연하게 연결해 준다. 어제의 나는 무너졌어도 오늘의 나를 버틸 수 있도록. 내일이라는 미래를 향해 조금 더 단단한 마음으로 건널 수 있도록. 후회와 탄식에 빠져 허우적대지만은 않도록.
전시장을 빠져나와 자전거길에 올랐다. 페달을 힘껏 밟을 때마다 커다란 동그라미가 굴러간다. 비에 씻긴 나뭇잎들이 말갛게 예뻐서 계속 바라보았다. 나무는 어째서 하루도 쉬지 않고 수두룩하게 잎을 틔워내는 것일까. 비슷비슷한 잎들로 뒤덮인 나무가 거리마다 가득했다. 오월의 센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며 초록 물결을 일으켰다. 아파트 담장에는 어느새 빨간 장미가 화사한 얼굴을 내밀었고 길가엔 희고 노란 꽃들이 피어나있다. 꽃구경만 하기에도 바쁜 계절이다. 하물며 나뭇잎 하나하나를 찬찬히 봐줄 이는 몇이나 될까. 새 봄에 만나는 연둣빛 새순에게는 쉽게 마음이 설레어도 늦봄의 무성한 나뭇잎에는 다시 무심해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아랑곳 않는다. 매일 똑같은 모양의 나뭇잎을 틔우는 일에만 집중한다. 잎의 쓸모를 생각하다가 '성실'을 떠올렸다. 늦봄의 나뭇잎들은 누구보다 부지런한, 성실의 아이콘이라고. 누군가 봐주지 않아도, 꽃처럼 시선을 강탈할만한 화려함이 없어도. 반복된 일상은 사람에게도, 나무에게도 동일하다.
나무의 초록빛이 짙어질수록 회색빛 아스팔트 위에는 더 큰 그늘이 드리울 것이다. 뙤약볕으로부터 연약한 이들의 몸을 보호해 줄, 경계 없는 울타리가 생길 것이다. 흰 도화지에 '성실'을 색으로 칠한다면 나는 초록 물감을 고르겠다. 초록빛은 나무의 성실함, 그 나무를 닮은 어떤 사람의 신실함을 떠올리게 한다. 무심히 지나쳤던 나무들이 새롭게 보인다. 여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하루치 동그라미를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