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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말아요

마음의 누수를 막아주는 말

by 혜일

얼마 전의 일이다. 주말 저녁, 외출 후 돌아왔는데 현관문 앞에 종이 한 장이 붙어있었다.



'아랫집입니다. 물이 새는 것 같으니 오셔서 확인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크고 반듯한 정자로 쓰인 문장을 끝까지 읽어내리던 순간 마음이 쿵. 그 길로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남편과 아랫집으로 향했다. 열 개도 채 되지 않는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머릿속에는 후회가 검게 번졌다. 일주일 전으로만 돌아가 누수 원인을 잘 살폈다면. 그랬다면 일이 이렇게 커지진 않았을 텐데.



일주일 전, 아랫집 아주머니가 우리 집을 찾았을 때 나는 집에 없었고 남편 혼자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아파트 관리실 직원과 함께 오셔서 주방 싱크대 안을 살펴보고 가셨다 했다. 자신의 집 주방 천장으로 물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관리실 직원은 손전등으로 우리 집 주방 싱크대 안을 훑어보았는데 별다른 누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했다. 며칠 더 지켜보자는 말로 상황은 마무리되었고 그 뒤로 시간은 쏜살처럼 일주일이나 지나버린 것이다.



그 사이 누수가 얼마나 심해졌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을 안고 아랫집을 방문했다. 벨을 누르고 잠시 서있자 아저씨가 문을 열어주셨다. 집 안에 들어서자 소파와 테이블, 안마의자가 놓인 거실이 보였다. 벽 이곳저곳에 걸린 수채화가 인상적이었다. 아주머니가 그리신 걸까. 액자 안에는 개구진 얼굴의 남자아이 둘이 있었다. 지금은 장성한, 부부의 아들들임을 알 수 있었다.



평소에 아저씨, 아주머니는 우리 부부나 아이들을 보시면 살갑게 대해주셨다. 아저씨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작은 아이에게 소시지 간식을 주시기도 했고 유쾌한 농담을 던지기도 잘하셨다. 그런 두 분을 뵐 때마다 나는 가까운 친척을 만난 듯 푸근해질 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긴장하곤 했다. 늘 조심한다고 해도 윗집인 우리가 내는 생활소음이나 아이들 소리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거실에서 주방 쪽으로 몸을 돌리자 문제의 천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본디 새하얘야 마땅할 천장 도배지 가운데에 잿빛 물자국들이 선명했다. 도마뱀 꼬리처럼 길게 휘어져있는 모습에 머릿속은 아득해졌다. 심지어 한쪽 부분은 갈색으로 얼룩덜룩했다. 아저씨는 벌써 곰팡이가 피어서 그런 듯하다고 하셨다. 아아. 탄식부터 흘러나왔다.



"불편드려서 너무 죄송해요. 이렇게 심하신 줄 몰랐네요."


"저희도 몰랐는데 어느 날 아들이 천장 보고 알려주더라고요. 아파트가 오래돼서 그런 걸요."


"정말 죄송합니다. 천장 어느 정도 마르면 저희가 도배해 드릴게요. 혹시 업체도 저희가 알아봐 드릴까요?"



죄인의 심정으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데 아주머니 왈.



"저희 집에 남은 도배지가 있어요. 그걸로 하면 돼요."


"네? 물 샌 자국이 이렇게 넓은데... 직접 하시긴 힘드실 텐데요. 저희가 당연히 해드려야죠."


"아유, 해보고 안되면 그때 연락드릴게요."



그때까지만 해도 직접 도배하시겠다는 말씀을 흘려들었다. 솔직히 곧이듣지 않았다. 우리 집 역시 두 해 전쯤 위층 집에서 생긴 누수 문제로 주방 도배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고요한 밤 주방 천장에서 갑자기 와르르, 물이 쏟아졌다. 순간 날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우리 쪽이 피해를 입었으니 윗 집에 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겼다. 결과적으로 윗집과 합의가 잘 이루어졌고 도배도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아랫집을 방문하고 난 다음 날, 다행히 전문업체를 통해 누수의 원인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주방 싱크대 안에 위치해 있던 난방 구동기 하나가 망가졌기 때문이었다. 한 주 전에는 보이지 않던 물방울이 어느새 흔적을 남기며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그날로 구동기 전체를 새로 교체한 후 아랫집 아주머니께 알려드렸다. 아주머니는 더 이상 물이 새는 것 같진 않다 말씀하셨고 천장이 마르는 대로 도배를 하겠다 하셨다. 도배하실 때 꼭 연락 주시라고, 나도 재차 말씀드렸다.



그런데 며칠 후. 세탁소 가는 길에 아들과 함께 걸어오시는 아랫집 아주머니를 만났다. 도배 진행 상황이 궁금하던 찰나. 아주머니는 먼저 "우리 도배 다 했어요!"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언제 도배하셨는지를 여쭈었다. "지난 주말에 했나?" 그때 옆에 있던 아주머니 아들이 별 일 아니라는 듯 말을 이어갔다. "집에 있는 도배지로 천장에 탁탁, 잘 붙였어요."



가던 길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던 아주머니는 명랑한 말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걱정 말아요. 이제 물 안새요!"



"불편하게 해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꾸벅. 사과 인사를 드렸을 뿐 나는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주머니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내게 '걱정 말라'는 말을 하실 수 있을까. 그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손해를 끼친 쪽은 분명 나였고 누수로 인해 여러 불편을 감수하신 분은 아주머니였음에도.



말씀하신 대로 정말 도배를 직접 하셨단 이야기를 듣고 나는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렇게 넘어가는 건 도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나는 고민 끝에 현금 봉투와 수박 한 통을 준비해 아랫집을 다시 방문했다.



"누구세요?"

"윗집이에요. 잠시 좀 뵙고 싶어서요."



철컥. 문이 열리자 아주머니는 우리가 온 이유를 이미 알아채신 듯했다. 이전과 달리 현관문만 빼꼼 여신 채 손사래부터 치셨다. 수박을 보시고는, "가서 애들이나 줘요. 저번에도 과자 받았는데요. 뭘 또..."



사실 중요한 건 현금 봉투를 잘 건네드리는 것이었다. 누수에 대한 보상 금액이자 우리의 마음을 대신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아주머니는 한사코 현금은 안 받겠다 거절하셨다. 우리도 문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도배를 직접 하셨으니 이건 받으셔야 한다고. 그런데도 아주머니는 얼른 올라가라며 우리말은 들으려 하시지도 않았다.



결국 아주머니는 수박만 받으시곤 현금 봉투는 받지 않으신 채 문을 닫아버리셨다. 이런 문전박대(?)는 살면서 처음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냥 다 받아주시지 왜 그러실까, 이해되지 않았고 서운하기까지 했다. 어떤 손해를 입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는 일은 세상의 공식과도 같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경우는 예외였다.



집에 올라와 곰곰 생각해 보니 아주머니는 어떤 보상을 바라고 직접 도배를 하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공간은 위층과 아래층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같은 연식의 아파트에 함께 살고 있는 이웃. 어쩌면 우리를 진짜 이웃으로 품는 마음에서 그런 결정을 하시지 않았을까. 감히 아주머니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이 은혜를 어찌 갚을까. 이런 예기치 못한 호의를 받은 나는 어떤 이웃으로 살아야 할까. 고민이 앞서면서도 마음은 따뜻해진다. 나는 정말 좋은 이웃을 만났구나 싶어서. 그동안 줄줄 새고 있던, 걱정이라는 마음의 누수도 이제는 말끔히 잡힌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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