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2부✧예의 있는 반항✧빛을 잃은 일상의 언어40화

살짝 베어 문 사과에서 함박눈까지

by bluedragonK


아침부터 음악을 틀었다. 성우가 늘 틀어 두던 음악이었다. 제목을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감미롭다고 하기엔 과하지 않았고, 배경으로 흘려보내기엔 리듬이 분명했다. 이사 온 집의 공기 위에 음악이 먼저 자리를 잡는 느낌이 들었다. 가구보다 소리가 먼저 들어온 집은 생각보다 덜 낯설었다. 재하는 음악이 공간을 정리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었다.


커피를 내렸다. 이 집에서의 첫 커피라는 말은 맞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은 마셨을 것이다. 대신 이 공간의 온도와 처음으로 어울린 커피라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예전에 서연이 건네줬던 원두였다. 필로소피 매장에서 민규가 내리던 커피가 잠깐 스쳤지만, 같은 맛을 흉내 내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흉내는 언제나 결과만 닮고 과정은 남기지 않는다. 지금 재하에게 필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었다.


커튼을 열자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많이 오지는 않았다. 멈췄다가 다시 조금씩, 그러다 또 멈추는 정도였다. 바닥을 덮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없는 척 지나칠 수도 없었다. 눈은 내린다기보다는 머물고 있었다. 재하는 잠시 창 앞에 서 있었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고, 오래 생각해 온 일이었으며, 머릿속에서는 이미 정리가 끝난 상태였다. 이제 남은 건 실행뿐이었다. 미루지 않기로 한 날이었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그 공간은 늘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리와 금속, 밝은 조명, 정리된 동선. 이름을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재하는 천천히 걸으며 몇 번 화면을 켜 보고, 자리에 앉아 보고, 손을 올려 두었다. 설명은 길지 않았다. 질문이 오갔지만, 대답이 꼭 필요해 보이는 순간은 아니었다. 오늘은 비교하는 날이 아니라 선택하는 날이었고, 어느 순간부터 다른 것들은 자연스럽게 시야에서 빠져나갔다. 꼭 이것이어야 한다는 확신이라기보다는, 이게 아니라면 굳이 지금일 이유는 없겠다는 감각에 가까웠다. 도구를 고른다기보다, 하나의 상태를 정하는 느낌이었다.

결정은 조용히 이루어졌다. 결제는 빠르게 끝났고, 잠시 후 재하는 쇼핑백 하나를 손에 들고 밖으로 나왔다.

문을 나서자 아침보다 눈이 조금 더 또렷해져 있었다. 재하는 바로 이동하지 않고, 한 손에 쇼핑백을 든 채 잠시 멈춰 섰다. 감상하려는 것도, 시간을 보내려는 것도 아니었다. 눈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을 정리하려는 의도도 없었다. 눈이 있는 상태 안에 그냥 머물러 있었다. 눈멍이라는 말이 스쳤지만, 굳이 붙이지는 않았다.


그때 시야 한쪽에서 누군가 멈췄다.

재하가 고개를 들었을 때, 서연도 같은 순간 발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둘은 동시에 서로를 알아봤고,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다.

"어… 여기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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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예의 있는 반항〉을 연재 중인 창작 스토리 작가입니다.일상의 언어와 사람 사이의 온도를 다루며,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을 깨우는 세계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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