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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2부✧예의 있는 반항✧빛을 잃은 일상의 언어39화

AI는 도구, 방향은 사람

by bluedragonK

조금 후, 네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식탁 위에는 소박하지만 정성이 느껴지는 음식들이 놓였다.

잘 구운 채소와 간단한 파스타, 따끈한 수프, 조용히 김이 오르는 밥 한 공기,
그리고 선배가 “이건 꼭 있어야 한다”라고 준비한 김치와 나물.

“대단한 건 없네.”
선배가 말했지만, 첫 숟가락을 뜬 모두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선배님, 이 정도면 식당 차려도 되겠는데요?”
서현이 웃으며 말했다.

“식당은 그만. 사람은 좋아도, 사업은 이제 질렸다.”

선배가 손사래를 치자, 자리에는 한 번 더 웃음이 돌았다.

와인을 한 잔씩 따라 마시며, 대화는 자연스럽게 오늘의 요리에서,
각자의 요즘 일상으로 옮겨갔다.

어느 순간, 재하가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응?”

“요즘… 다들 ‘AI, AI’ 하잖아요.
저도 카페에서도, 뉴스에서도, 일상에서도… 말로는 많이 듣는데.”

재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뭐든 ‘AI’라고 붙여놓으면, 다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내가 뭘 해야 할지 더 헷갈려지기도 하고요.”

식탁 위 공기가 조금 조용해졌다.
어색한 침묵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머릿속을 잠깐 들여다보는 시간 같은 고요였다.

세대마다 다른 자리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은서였다.

“저는… 고객들 보면서 자주 느끼는 것 같아요.”

모두의 시선이 은서에게로 향했다.

“요즘 와인 앱 많잖아요. 사진 찍으면 바로 정보 나오고, 음식에 뭐가 맞는지도 추천해 주고.
고객들 중에는 ‘이건 앱이 골라준 와인이에요’ 하면서 재밌어하시는 분들도 많거든요.”

은서는 와인잔을 살짝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근데 결국 마지막에 고르는 건, 그 사람 입맛이에요.
같은 추천을 받아도 어떤 사람은 ‘괜찮네’ 하고 넘어가고,
어떤 사람은 ‘뭔가 부족한데’ 하면서 계속 또 찾아요.”

“와인도 결국… 사람 입에서 끝나니까.”
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AI가 대신 골라줄 수는 있어요.
근데 ‘이게 나한테 맞는지’는, 아직 사람이 스스로 확인해야 하잖아요.
그걸 귀찮아하는 사람은 그냥 ‘AI가 했다’에 안주하고,
궁금한 사람은 그걸 계기로 더 파고드는 것 같아요.”

은서의 말에는, 20대 후반의 현장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서현이 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

“카페들도 비슷해요. 요즘 다들 예약, 주문, 결제까지 앱으로 하잖아요.
줄 설 필요도 없고, 사장 입장에서도 인건비 절약되고 좋고.”

그녀는 잠시 창밖을 봤다.

“근데 이상하게, 사람 없는 공간을 보면 좀 허전해요.

예전엔 주문하면서 직원이랑 한 번은 마주쳤잖아요.

그 짧은 순간이 그래도 ‘아, 내가 여기에 왔구나’ 하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버튼만 누르고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에요.”

재하는 그 말에 자연스럽게 필로소피의 풍경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여기서는 굳이 이름을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선배가 천천히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기술이 발전하는 건, 막을 수 없는 흐름이지.”

그가 입을 열었다.

“증기기관이 나왔을 때도, 전기가 들어왔을 때도, 인터넷이 깔릴 때도 그랬어.
지금의 AI도 비슷한 결일 거야. 아마 이전 어떤 것보다 더 빠르고, 더 넓게 퍼지겠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재하를 바라봤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주 놓치는 게 하나 있어.”

“뭔가요?”

“지금 우리가 대단하다고 부르는 그 모든 기술을 만든 것도, 결국 사람이라는 점이지.”

선배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단단했다.

“요즘 보면, ‘AI가 나를 다 대신해 줄 거다’라는 말이 유행처럼 떠돌지.
보고서 써주고, 글 써주고, 그림 그려주고, 번역해 주고…
이게 편한 건 사실이야. 어느 정도는 우리를 대신하기도 하지.”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한 번 두드렸다.

“그런데 거기서 안주하는 순간, 사람은 자기 자리를 잃어버려.
‘대신해 준다’는 건 어디까지나 출발점이지, 도착점이 아니야.”

서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서도 잔을 감싸 쥔 손에 힘을 살짝 주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선배가 말을 이었다.

“AI가 쓰는 언어가 아무리 유려해도, 그 언어를 ‘어디에 쓸지’ 결정하는 건 사람이다.
로봇이 커피를 내릴 수 있을지 몰라도,
어떤 공간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그 커피를 내릴지 정하는 건 여전히 사람 몫이야.”

재하의 마음속에서 작은 전구 하나가 켜지는 느낌이 들었다.

선배는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지금 진짜 중요한 건,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가’가 아니야.
‘내가 이 기술을 어떻게 걸러 보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더 가깝지.”

“걸러 본다…”
재하가 되뇌었다.

“그래. 요즘은 뭐만 하면 ‘AI 탑재’라고 붙여.
실제로는 그냥 자동 버튼 하나 더 만든 거면서.
진짜인지, 간판만 번쩍이는 짝퉁인지 구분하려면,
결국 사람 쪽에서 눈을 뜨고 있어야 해.”

선배는 와인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결국 칭찬받아야 할 건 기술 그 자체가 아니야.
그 기술을 여기까지 끌고 온 사람들,
그리고 그걸 가지고 ‘다음 문장’을 쓰려고 애쓰는 사람들.
나는 그쪽에 더 마음이 가.”

각자의 자리에서 이어지는 문장

잠시 동안, 식탁 위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누구도 침묵을 깨려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 안에는 충분한 말들이 들어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재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 배워야겠네요.”

“뭘?” 선배가 물었다.

“어떤 게 진짜인지, 어떤 건 껍데기인지.
어디서 대신 맡기고, 어디까지는 내가 책임져야 하는지.
AI가 써 준 문장에만 감탄하는 게 아니라,
그 문장으로 무엇을 할지… 그걸 고민하는 쪽으로요.”

선배가 미소 지었다.

“그래, 그거면 충분히 좋은 출발이야.”

서현이 와인잔을 가볍게 들었다.

“저도 한 잔 거들게요.
저는… 좋은 도구들이 나오는 건 반갑지만,
결국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한 마디’를 대체하지는 못한다고 믿고 싶어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살아나는 날도 많으니까.”

은서는 자신에게 따라진 와인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하나는 확실해요.
아무리 앱이 추천해 준 와인이라도, 마지막에 웃으면서 잔 부딪치는 건 사람이거든요.”

네 사람의 잔이 조용히 부딪쳤다.
맑은 소리가, 천천히 1층 공간 전체로 번져갔다.

저녁이 깊어갈수록, 대화는 AI에서 조금씩 멀어져,
각자의 에피소드, 실패와 버팀, 우연한 인연으로 이어졌다.


재하는 문득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다, 각자의 방식으로 “두 번째 문장”을 쓰고 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집을 통째로 사람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었고,
누군가는 와인과 사람들이 어울려 지나가는 자리마다 자기 언어를 심고 있었고,
누군가는 와인 한 잔을 통해 말하지 못한 마음을 건네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오랜 버팀 끝에, 마침내 한 칸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

언어로, 질문으로, 그리고 언젠가는 새로운 무엇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겨울 공기가 얼굴을 시리게 스쳤다.
하지만 재하의 발걸음은 무겁지 않았다.

‘기술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결국 “어디로 갈지”는 사람이 정한다.

그렇다면 나도… 내 방향을 정해야지.’

밤하늘이 조용히 내려앉는 그 길 위에서,
재하는 아직 말로 다 옮기지 못한 생각들을 조용히 정리해 보았다.

그렇게,
그날 재하의 머릿속에서 또 하나의 문장이 조용히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의 두 번째 문장은 한 줄 더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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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예의 있는 반항〉을 연재 중인 창작 스토리 작가입니다.일상의 언어와 사람 사이의 온도를 다루며,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을 깨우는 세계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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