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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2부✧예의 있는 반항✧빛을 잃은 일상의 언어38화

겨울빛 아래 열린 문

by bluedragonK

토요일 오후, 겨울 햇빛이 낮게 깔린 시간이었다.
이사 뒤로 정신없이 흘러가 버린 며칠 동안, 재하의 마음 한구석에는 계속 같은 생각이 남아 있었다.

‘이사 전에 한 번 찾아뵈어야지, 마음만 먹다가… 결국 여기까지 미뤘네.
이제는 정말, 인사를 드려야 할 때다.’

여러 번 문자를 썼다 지웠다 했다.
너무 장황하지도, 그렇다고 성의 없어 보이지도 않게 쓰고 싶었다.


"선배님, 이사 전부터 한 번 찾아뵙고 싶었는데 계속 미뤄졌습니다.
시간 괜찮으실 때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잠시 뒤, 답장은 의외로 짧고 담백했다.


"이번 토요일 오후 괜찮나? 편하게 오면 돼."

그 한 줄로 약속이 잡혔다.
토요일이 가까워질수록, 재하는 마음속에서 문장을 몇 번이고 고쳐 쓰는 사람처럼 선배를 향한 인사의 말을 계속 다듬어 보았다.

집을 나서기 전, 재하는 작은 상자를 손바닥 위에서 한 번 더 굴려 보았다.

정성스럽게 포장된 그 안에는 모던한 블루 톤이 은은하게 스며 있는 만년필 하나가 들어 있었다.
눈에 띄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불필요한 장식이 하나도 없는 간결한 실루엣.
빛을 받으면 잔잔하게 깊어지는 블루의 결이, 오래 써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줬다.

가격이 중요한 선물은 아니었다.
쓰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 더 단단하게, 선명하게 잡아주는 도구.
재하는 그런 만년필을 떠올리며 선배를 생각했다.

‘언어의 무게를 아는 사람에게는, 결국 펜이 제일 정직한 선물일지도 모르지.’

지하철을 갈아타고, 버스를 한 번 더 타고, 조금은 낯선 동네 골목으로 들어섰다.
주소에 적힌 숫자를 따라가자, 어느새 고요한 주택가가 나타났다.

그 길 끝에, 외관만 보면 평범한 2층짜리 단독주택 한 채가 서 있었다.
대문 옆 우편함 위로 겨울 햇볕이 살짝 내려앉아,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여기… 맞나?"

재하는 주소를 한 번 더 확인한 뒤, 초인종 대신 작은 인터폰 벨을 눌렀다.
짧은 정적 끝에, 띠– 하는 전자음과 함께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철문이 살짝 열리며, 안쪽으로 난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문을 밀고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선 순간, 재하는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늦췄다.

잔디는 겨울을 견디는 중이라 누렇게 누워 있었지만, 그 위로 놓인 돌계단은 군더더기 없이 정갈했다.
잔디 가장자리에는 낮은 조명이 촘촘히 박혀 있어, 해가 지면 은은한 길이 생길 것 같았다.

‘밖에서 봤을 땐 그냥 집이었는데… 마당부터 느낌이 다르네.’

마당 끝 통창 너머로, 실내의 따뜻한 조명이 살짝 번져 나와 있었다.
그때, 유리 현관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제아 씨 오셨네요?"

와인 소믈리에 은서였다.

필로소피 와인바에서 입던 유니폼 대신, 오늘의 은서는 부드러운 아이보리 니트에 어두운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조금 더 편안한 차림이었지만, 웃을 때 살짝 접히는 눈꼬리만큼은 그대로였다.

"… 은서 씨?"

재하는 잠깐 말을 잃었다.
‘여기… 은서가 왜 있지?’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의 표정을 읽은 듯, 은서가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여기요? 우리 삼촌 집이에요. 설마… 삼촌이 말 안 했어요?"

"삼촌…?"

말끝이 어색하게 떨리자, 안쪽에서 낮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네, 재하 씨."

현관 안쪽에서 선배가 걸어 나왔다.
집 안의 조명 때문인지, 카페에서 볼 때보다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 보였다.

"아, 둘이 필로소피에서 같이 근무하지."

선배가 은서와 재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은서는 우리 누나 외동딸이야 조카. 소개가 조금 늦었네."

"아…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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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예의 있는 반항〉을 연재 중인 창작 스토리 작가입니다.일상의 언어와 사람 사이의 온도를 다루며,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을 깨우는 세계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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