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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깅코 Nov 10. 2020

[오늘의 밀도] 1. 정리의 파스타

저것도 까먹지 말고 가져가


짐을 챙기며 거드는 그녀가 밉다.

긴 시간 그녀를 만나왔지만 저렇게 야무지게 선을 긋는 모습은 처음 마주하는 것 같다. 이별의 순간에는 저런 목소리와 표정을 짓는 사람이구나- 나는 오늘까지도 새롭게 그녀를 알아간다. 내 짐만 덜어냈을 뿐인데 그녀의 작은 집에 바람의 방향이 느껴질 만큼의 여백이 생겼다.

그래, 여백. 그녀의 삶 위에 퍼질러진 내 물건들이 점점 더 좁은 영역으로 옮겨지는 것을 느꼈을 때, 나는 내가 그녀의 여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별을 예감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이 뜨겁고 차가운지를 논할 문제가 아니다. 으레 생존하는 것들은 떠날 때를 알기 마련이니깐.


그녀는 자신의 하루에 나를 떼어낼 준비가 끝난 듯 보였다. 우리의 물건을 '나'와 '너'의 것으로 나누었다. 오늘 이후에 내게 어떤 불의의 사고가 생겨 내 물건이 지문 감식을 받을 일이 있다면, 그것을 살피던 이들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물건을 함께 쓰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최근에는 혼자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차에 짐을 싣고 올라오니 그녀가 부엌을 서성이며 무언가를 시도하고 있는 듯 보였다. 만든다기보단 어딘가 부단히 애를 쓰는 듯. 그건 어쩌면 세상에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다정한 이별을 위한 시도처럼 느껴졌다. 우리 지금 헤어지는 거 맞지?


"뭐 만드는 거야?"

"아... 그게, 밥시간이고 하니깐"

"헤어지는 마당에 밥을 먹고 가라고?"

"간단하게 만들 거야"

"뭔데?"

"파스타"


말문이 막힌다.

그거 우리 첫 데이트 때 먹었던 건데. 너 밤새 작업할 때 배고프다 하면 내가 매번 만들어 주던 건데. 주말에 데이트하러 나가기 귀찮으면 침대 위에서 먹던 건데. 그걸 지금 해 먹자고?



"냉장고에 마늘 좀 꺼내 줄래?"

"치즈는 필요 없어?"

"음... 서랍에 전에 쓰던 게 좀 남아있을 거야"

"야 치즈 같은 건 좀 잘 밀봉해두라니깐"

"오늘내일 안에 다 먹을 거야"


오늘내일. 할 일을 미루기 가장 쉽고 곧 현실이 될 듯 설득당하는 개념이다. 한 달 안에, 일주일 안에, 십 년 안이라고 해도 별반 다를 것 없는 범주이지만 그건 어쩐지 희망적이다. 곧 쓰임새가 있을 예정이라 묶어두지 않은 식자재가 쌓인 그녀의 냉장고는 그녀의 사회를 닮아있었다. 언젠가는 있을 쓰임의 가능성이라 했지만, 한편으론 자연 발화적인 부패를 바라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썩어버렸네. 못다 한 일이나 단순한 변심 등의 사유를 덮어버릴 수 있는 자연스러운 상황을 원하는 것이다. 공기는 음식을 썩히거나 증발시키고, 우리는 호흡으로 관계를 변화시킨다. 그녀는 무언가를 애써 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시간에 편승하여 날숨에 관계를 흘려보내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녀의 삶에서는 언제나 남은 것들의 냄새가 났다. 나는 그게 참 싫었다.

                                                                                             


그녀와 파스타를 자주 만들어 먹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세계를 정복한 이 단순한 요리는 어찌나 포용력이 좋은지, 한 냄비에 무엇을 넣어도 적당히 기다란 줄을 엮어 맛이라는 것을 만들어준다. 그녀의 열린 봉투들을 하나씩 꺼내어 팬에 쏟아부으면 뜨거운 열이 그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널브러진 것들의 화형식이었다.

나는 그것들이 숨을 죽여 그녀의 삶에서 사라질 때 관계의 풍미를 느꼈다. 우리의 사이가 기다란 줄로 감겨 하나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이 집에 계속 살 거야?"

"글쎄... 몇 군데 알아보긴 했는데 마음에 드는 조건이 없어. 여길 너무 좋은 조건에 찾았던 것 같아"

"그렇지. 창밖에 풍경도 좋고"

"맞아. 이 집 구하러 같이 돌아다닐 때 기억나지?"

"당연하지. 너 창문 열고 소리 질렀잖아. 부동산 아저씨 당황하시던 거 아직도 잊을 수가 없네"

"다른 집들에 비해 좀 좋았어야지"

"이사 가려거든 피자 쿠폰은 다 쓰고 가"

"파인애플 올라간 거 왕창 시켜 먹을 거야"

"내가 같이 안 먹어준 듯 말한다?"

"아아-무슨 그런 말을 해. 네가 나한테 항상 양보했지"



"우리 왜 헤어지는 거지? 정확히 알아?"

"정확히...? 글쎄 나는 잘 모르겠어."

"내가 너무 내 기준으로 네 관계들을 옭아매서 그렇지"

"아냐 그런 거. 틀린 말도 아니었는데"

"파인애플 피자 같이 먹어주는 게 양보는 아니지. 내가 이기적이었어"

"네 잘못이니 뭐 그런 말 하지 마"

"사실이잖아"

"그런 자책 같은 말은 무게를 덜 뿐이야."

"무게를 덜다니? 내 잘못을 시인하는 게 왜 그런 비겁함으로 보이는 거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탁 꼬집어 정리할 수 있겠어. 의도를 가지고 해를 입히지 않았다면 잘과 잘못을 말할 수 없는 거야"


"두루뭉술해'

"어?"

"두루뭉술하다고. 언제나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네 태도. 그거 무책임한 거야. 무게를 덜기 위하거나 자기 방어를 위한 게 아니라고. 이건 우리의 관계를 지켜보려는 노력 같은 거야. 적어도 나는 나의 잘못을 입 밖에 꺼낼 용기가 있어. 그런데 너는 끝까지 이게 뭐야? 항상 뭔가 더 있는 듯 꺼림칙한 태도, 나는 그게 너무 지치고 힘들었어. 그러면서 겉으로는 감정적으로 다 해탈한 듯 굴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행동하면 네가 더 대단한 거야? 그래서 헤어지는 길에 밥이나 먹이는 이런 이상한 짓거리도 하겠다고 맘먹은 거야?"


 

 "다 이해한다는 표정 짓지 마. 내 절절함을 모자란 인간의 발악 정도로 보지도 마. 너는 위선자야. 넌.. 너는.."



그녀의 어깨너머로 텅 빈 곳들이 보였다.

내 짐이 모두 빠진 그녀의 방은 사실 짐이랄 게 없었다. 그녀의 냉장고 안이 언제나 복잡해서 싫었는데, 그건 그것들이 다 살아있는 것이라 그랬을까. 내 등 뒤의 공간에 그토록 많은 내 것들이 있는지 몰랐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가 삶에서 나를 밀어낸 것이 아니라 내가 그녀를 자신의 삶 구석으로 몰아세운 게 아닐까.

그 언젠가 그녀의 삶에 다녀갔을 타인들도 이렇게 여백을 만들고 떠났을 것이다. 나는 고작해야 한 평짜리 냉장고 안에 놓인 자투리 생명에 분개했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내 물건을 정리하고 야무지게 선을 긋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제대로 닫아두라던 나의 잔소리가 2년 만에 빛을 발하다니. 그간 정말로 오늘내일 안에 정리되어버린 관계도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왠지 나는 그녀의 삶에 처음으로 오늘과 내일을 희망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것 같다.


그녀가 시간에 편승했다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자연적인 발화를 빙자한 방치라는 말도 취소해야겠다. 그녀는 그저 마음이 여린 사람, 매몰차게 선을 긋기보다 날숨 한 번에 한 걸음씩 멀어지길 바라는 사람. 나는 그녀의 두루뭉술함을 사랑했던 것 같다. 내가 아무렇게나 들어와 지내다 가도 괜찮을 만큼 그녀는 여백이 넓은 사람이었으니깐.

그녀의 집에서 만들어 먹는 파스타는 늘 맛있었다. 나는 애초에 그녀의 그런 따뜻한 온기가 좋았던 것이었겠지.


함부로 그녀의 삶을 손대어놓았다.

그녀는 이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완벽하게 이해한 듯 보였다.

파스타는 적당히 만들어 먹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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