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이 좋다'라는 것은?
워라밸
'Work-life balance'의 줄임말인 '워라밸'은 '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한다. 사전적으로 개인의 삶이 일과 조화롭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워라밸이 좋다'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사회 초년생 시절, '워라밸이 좋다'라는 것을 '정시 퇴근이 가능하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좀 더 디테일을 추가하자면, '상사나 선배 등 여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게 주어진 업무를 끝내면 정시 퇴근이 가능한 조직에서 일하는 것을 워라밸이 좋은 업무 환경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워라밸 좋음 = 눈치 보지 않고 정시 퇴근 가능'이라는 공식을 적용하면 감히 전 직장을 '워라밸이 으뜸인 조직'이라고 칭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된 후, 전 직장은 개인 업무용 PC를 하루 8시간 이상 사용할 수 없도록 일종의 근무 시간제한 프로그램을 전 임직원 PC에 설치했다. 근무 시작 후, 7시간 50분이 되면 우측 하단 화면 귀퉁이에 PC방처럼 10분의 시간제한 알림 창이 떴다. 붉은 글씨로 10분이 초단위로 카운트다운되는 작은 알림 창을 뜨면 그때부터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하고 있던 업무를 번개처럼 마무리하고 작성 중인 파일들을 재빨리 저장한 후, PC가 꺼지면 '미션 컴플릭트' 한 것처럼 '휴'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가끔은 속으로 시간 안배를 해둔 것에 맞춰 계획대로 일을 처리하고 상쾌한 마음으로 퇴근하기도 했다. 그런 날은 어디까지나 혼자 처리해도 되는 일들을 주로 할 때나 가능한 케이스였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듯이 거대 조직의 일이, 일개 개인이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업무들은 매우 미비하다. 오히려 씨실 날실이 복잡하고 촘촘히 엮인 거미줄처럼 여러 조직의 관련자들과 함께 협업해서 성과를 만들어야 하는 시스템으로 설계되어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니 정기, 비정기로 쏟아지는 각종 회의들을 참석하며 일을 처리하다 보면 번번이 내 마음속의 업무 스케줄은 처참히 망가져 버렸다. 그런 날에는 마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 중간에 강제로 뚝 끊고 나오듯, 일종의 '일시 정지=얼음'인 상태로 업무를 끊어내고 퇴근했다. 뒷맛이 개운치 않았지만 그렇게 나를 포함 대부분의 조직원들은 단 1분의 초과근무도 없이, 좋든 싫든 주어진 일을 다 끝냈든 끝내지 못했든 어쨎든 정시 퇴근했다. 우리가 퇴근하기 위해 눈치를 볼 대상은 상사나 선배가 아니라 오직 PC의 알림창 뿐이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몸은 퇴근했지만 정작 정신은 퇴근하지 못했다. 퇴근 이후에도 머리와 마음은 번번이 업무에 종속되어 다음 날 처리해야 하는 일들을 생각하다 밤잠을 설치는 날도 많았다. 그리고 우리 현대인의 필수품이자 족쇄인 스마트폰에 업무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요즘은 상사들이 업무 외적인 시간에 카톡으로 일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거나, 팀 단체 카톡방에서 업무와 전혀 무관한 개인적인 일들을 말하며 부하 직원들이 하다못해 빅스마일 이모티콘이라도 날리게 만들어야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속된 말로 '비매너' 더 나아가 '직장 내 괴롭힘'으로까지 인식되어 지양하는 분위기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카톡 알림이야 무음으로 설정해두면 그놈의 알림 지옥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지만 잠깐만 돌아서면 앱 귀퉁이에 수십 개씩 쌓여있는 메세지 숫자를 보기만 해도 어느새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당연히 주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 '정시에 퇴근시켜준다 = 워라밸이 좋다'라는 명제는 크게 잘못됐다. 다른 회사에 근무하는 친구들은 주 52시간에 맞춰 PC 셧다운 제도를 운영하는 전 직장을 '앞서가는 회사. 훌륭한 기업 문화를 가진 회사'라고 찬양하며 부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정작 조직원들이 처한 현실은 외부에서 보이는 것과 많이 달랐다.
그때의 경험으로 워라밸이 좋다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정의를 송두리채 바꿨다. 내 기준에서 워라밸이 좋다는 것은 일과 삶의 경계가 뚜렷이 분리될 수 있는 근무 환경이다. 퇴근과 동시에 단순히 몸만 PC에서 로그아웃 되는 것이니라, 나의 정신까지 로그아웃 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며, 그로 인해 근로 외적인 시간에는 회사와 관련된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개인적인 생활에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영유하는 것. 바로 그것이 내가 스스로 설정한 워라밸이 좋은 상황이다. 그래서 이직을 하거나 직무 전환을 시도할 때 나만의 좋은 워라밸의 정의를 적용시켜 그것이 실제로 구현 될 수 있는지 여러 제반 사항들을 꼼꼼히 따졌다.
물론 AI도 아니고, 복합적인 감정을 가진 '휴먼'인 내가 퇴근했다고 해서 일이 완전히 안드로메다로, 속된 말로 '아웃 오브 안중'이 될 수는 없었다. 가끔 맡은 일에 지대한 관심이 있고, 개인적으로 도전적인 성취욕을 자극하는 일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회사 밖에서도 일에 대해서 골똘히 몰입한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내 자유의지가 발동할 때를 의미하는 것이지 그 일과 관련된 조직의 누군가에 의해서 강제로 '로그인' 되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싶다.
가끔 '라떼말이야' 시절의 어르신들이 '요즘 애들은 워라밸 워라밸 하면서 일을 소홀이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내 보기엔 그것은 그 일이 하기 싫어서 잔머리 굴리고 몸을 사리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근로 계약 외적인 시간까지 무보수로 조직에 종속되지 않기 위한 일종의 요즘 세대들의 처절한 투쟁이 아닐까? 싶다. 회사 생활을 10년 넘게 한 나도 가끔 그 투쟁에 하염없이 무너져 자괴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올 때가 부지기수인데 어린 친구들이랴 오죽할까. 문득 완벽한 워라밸. 그것은 과연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에나 존재하는 이상적인 개념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가을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