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기 일본 궁녀가 쓴 최초의 심리소설
『겐지모노가타리』, 번역본 『겐지 이야기』는 일본 헤이안 시대 황족 겐지의 연애사다. 그런데 그 연애라는 것이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문란하고 난잡한 것이어서 1천 년 전 작품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작품의 구도와 문체들이 요즘 인기 있는 웹소설만큼이나 화려하고 막장 전개가 가득하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인류사의 주요 고전 문학에 손꼽힐 정도로 뛰어난 작품성은 물론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해석에 따라 최초의 소설, 또는 최소의 심리 소설로 여겨진다. 앞서 읽었던 서사시들에 비해 인물 간 관계가 복잡하고, 벌어지는 사건 자체보다는 인물들의 내면을 중심으로 서술된다는 점이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먼저 이 작품을 읽기 전 당시 일본의 혼인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귀족 여인은 함부로 밖을 돌아다니며 얼굴을 내보이지 않는다. 방 안에 틀어 박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소일을 할 뿐이다. 방문을 열어놓을 때마저도 발을 쳐 둔다. 그러니 남자는 여인에 대한 정보를 소문이나 시녀들의 입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다. 남자가 귀족 여인을 얻고 싶어지면, 시녀나 가족들을 통해 여인의 방에 들어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는다. 그 과정에서 뇌물을 주고받거나, 시녀와 잠자리를 가짐으로써 시녀가 남자에게 애착을 갖게 하여 접근하는 방법도 쓰인다. 그렇게 남자가 한밤중 여인의 방에 들어가면 서로 보이지도 않는 상태에서 잠자리를 갖는다. 즉, 여인은 그저 가만히 있다가 어느 밤에 낯선 남자가 방에 들어오면 별 수 없이 몸을 내어주는 것이다. 관계를 맺고 날이 밝기 전에 남자는 떠난다. 그리고 새벽에 여인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잠자리를 사흘 정도 하다가, 남자가 혼인이 이루어졌다는 표시로 여인에게 떡을 보낸다.
『겐지모노가타리』는 겐지가 이런 식으로 연을 맺은 수많은 여인들과 겐지의 이야기다. 겐지는 천황의 아들이지만 후궁의 자식으로, 황위를 물려받을 위치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누구보다 외모와 자질 면에서 뛰어나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그 누구든 겐지를 보는 것만으로 황홀해할 정도로 그의 외모는 특출 나다. 그러니 여인들은 낯선 남자가 방에 들어와 자기를 겁탈하려 하면 놀라 저항하려 하다가도 겐지임을 알면 순순히 몸을 내어준다. 등장하는 모든 여인들이 기본적으로 겐지를 사랑하고 있음이 전제되기 때문에 겐지가 원한다면 대부분 그의 여인이 된다.
그럼 어떤 여인이 겐지의 연인이 되는가? 그 답은 이 작품이 개인의 내면을 상세히 서술한 ‘소설’임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등장인물(겐지)의 뚜렷한 개성과 관련이 있다. 겐지는 부족할 것 없는 인물이지만 유별나게도 이루기 힘든 사랑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가 처음으로 사랑한 여인은 천황인 아버지의 부인 후지쓰보 여어였다. 자신의 죽은 어머니와 닮았다고 하여 어린 마음에 더욱 빠져들게 된 후지쓰보를 향한 겐지의 마음은 절절하다 못해 눈물겹다. 첫사랑이 아버지의 여인이자 세상의 주인인 황제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겐지는 결국 그녀를 잠시나마 손에 얻는다. 몇 차례 잠자리를 하는 데도 성공하고, 심지어 후지쓰보는 겐지의 아이를 갖는다. 하나 이 사실은 측근 몇만 알 뿐 알려지지 않고, 아이는 천황의 자식으로 자라다가 결국 후일 천황이 된다.
이런 자극적이고 눈물겨운 사랑을 했기 때문일까, 겐지는 아무 개성 없는 여인이나 관계를 선택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는 매우 감성적인 사람으로, 자신의 절절한 사랑에 대해 노래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사랑한다. 그러니 만나는 사람이 남편이 있는 여인, 원수나 마찬가지인 집안의 딸, 절친한 친구와의 경쟁에서 이겨 얻은 여인, 멀리 타지에 두고 온 여인, 자신을 사랑하나 끈질기게 밀어내는 여인 등이다. 그는 엄청난 바람둥이이지만 그렇게 만난 여인들을 모두 진심으로 여기고 아낀다. 심지어 못생기거나 성격이 괴팍해 정이 안 가는 여인까지도 애틋하고 가련하게 여겨 정성으로 챙겨준다. 여인들이 갑자기 죽어 세상을 떠날 때도 진정으로 아파하고 눈물을 흘린다. 자신의 마음에 든 여자라면 찾지는 못해도 꾸준히 편지를 하며 챙기기까지 한다. 여인들을 내키는 대로 취했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데다 상대를 가리지 않는 겐지가 천하의 몹쓸 놈으로 보이다가도 무작정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지어 겐지는 후지쓰보를 닮은 어린 소녀 무라사키에게 애욕을 느끼고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원하는 여자로 교육시켜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원대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포부를 가지고 그녀를 거의 납치하다시피 데리고 온다. 실제로 그는 무라사키를 친딸처럼 키우고 가르쳐 아내로 맞는다.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행동은 나쁘지만 그것을 묘사하는 수려한 문체와 필력, 그리고 섬세한 내면 묘사가 이 악당들을 애틋하고 정감가게 만들어 버린다.
작품 중반부 중년이 된 겐지는 그가 꿈꾸던 하렘을 건설한다. 본 작품이 최초의 소설인지는 분분해도 최초의 하렘물임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겐지는 육조원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영지를 만들어 저택들을 짓고, 자신의 부인들을 살게 한다. 그중 첫 번째는 역시 무라사키 부인이며, 그 외에 유배지에서 만나 딸을 갖게 된 아카시, 우연히 만났으나 마음이 잘 통하고 성품이 뛰어난 하나치루사토, 출가하여 연인이 될 수는 없지만 겐지가 계속해서 아끼는 우츠세미, 외모가 못났으나 가여운 마음으로 계속해서 돌봐주게 된 스에츠무하나 정도가 있다. 이후 이야기는 이들이 사는 육조원에서 벌어지는 연례행사나 수시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 각 부인들의 모습과 겐지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형태로 흘러간다. 전형적인 일본 하렘물이 떠오르는 이야기 구성이며,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드러나는 전개와 묘사들이 돋보인다.
이후로도 많은 인물과 사건들이 그려지는데 모두 언급하기는 어렵다. 다만 무라사키 부인이 병으로 죽는 장면은 작가의 필력이 모두 쏟아져 나오는 클라이맥스라 특기할 만하다. 그녀는 어린 시절 겐지에게 납치되어 그가 바라는 모습으로 키워져 부인이 된다. 겐지의 잦은 외도에 마음속으로는 질투를 하면서도 크게 내색하지 않고, 무심하지 않으면서 과하게 집착하지도 않는다. 다른 부인들과의 관계에서도 품위 있고 관대하며 자상하고 배려심 넘치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다른 부인들이 낳은 아이들을 제 자식처럼 보살피기까지 한다. 거기에 악기를 다루고 시를 짓는 실력도 뛰어나며 겐지의 삶에서 빠뜨릴 수 없는 풍류를 즐길 줄도 아는 완벽한 여인이다. 이렇게 겐지의 마음을 사로잡은 무라사키는 끝까지 겐지의 정실 역할을 하지만 평생 자식을 낳지 못하고 신분이 뛰어나지 못하다는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간다. 그런 점이 그녀를 더 가련하고 아름답게 만든다.
겐지 역시 그런 무라사키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토록 수많은 여인들과 정을 통했지만 마음속 첫 번째는 항상 무라사키 부인이었다.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얻어내고자 고군분투하는 와중에도 항상 무라사키 부인을 생각하고 걱정했다. 그래서 무라사키 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겐지의 모든 삶은 망가진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다른 부인들이 많이 남아있음에도 겐지는 세상을 등지고 살다가 약 1년 뒤 출가하고 몇 년 뒤 죽음을 맞는다. 무라사키 부인의 죽음이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반면, 겐지의 죽음은 제대로 된 언급조차 없이, ‘구름 속으로 사라지다’라는 제목만 있고 내용이 없는 첩으로 표현된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확실히 밝힌 바는 없지만, 무라사키의 죽음 이후 겐지의 삶과 죽음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특히 겐지가 무라사키 부인의 장짓문을 바라보며 그녀를 회상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겐지가 다른 곳에서 밤을 보내고 돌아왔을 때, 부인의 시녀들이 질투하여 겐지를 모른척하고 일부러 문도 열어 주지 않고 있는데, 무라사키 부인이 직접 문을 열며 온화한 표정과 말투로 겐지를 반겨준다. 그 모습을 겐지는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이 회상 장면은 『겐지모노가타리』의 그 어떤 장면보다 애련하다. 특히 겐지가 외박을 할 때마다 무라사키 부인이 혼자서 얼마나 가슴 아파하고 속상해하면서도 이해하고 스스로 감내하려 애썼는지를 독자들은 익히 보아 왔기 때문에, 그렇게 먼저 손을 내미는 그녀의 성품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던 첫 번째 부인이면서도 아무도 모르게 감내해야 했던 그 슬픔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렇듯 무라사키 부인은 어렸을 때 납치되어 남자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졌으며 남편의 엄청난 바람기도 모두 수용하고 한결같이 사랑해 주는,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너무도 남성중심적이고 여성을 도구로만 보았던 중세의 세태를 잘 보여주는 캐릭터다. 여성인 작가가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이 캐릭터의 인생을 통해 당시 여성을 바라보던 그릇된 시각을 간접적으로 고발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겐지가 죽고 난 이후에는 속편이 이어진다. 대외적으로는 겐지의 아들이나, 겐지의 부인 온나산노미야가 가시와기라는 남자와 외도하여 낳은 자식인 가오루, 그리고 겐지의 외손자이자 천황의 아들인 니오노미야. 이 두 남자와 그들이 사랑하는 여인들이 속편의 주인공이다. 남자가 겐지에서 이 둘로 바뀌었을 뿐인 것 같지만 작품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본편에 비해 개인의 심리묘사가 더욱 깊어졌고 그래서인지 작품 자체도 더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서 작가가 본편을 쓰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속편을 썼다는 추측이 있다.
본편의 겐지는 그 어디에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다. 외모뿐 아니라 마음 씀씀이도 고와서 엄청난 바람기를 갖고 있음에도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다. 속편의 두 남자는 겐지를 질적인 면에서 쪼개 놓은 느낌이다. 두 남자 모두 외모가 훌륭하다지만 겐지에 비하면 부족하다. 심성은 두 남자가 확연히 다른데, 가오루는 겐지의 신중함을, 니오노미야는 겐지의 적극성과 바람기를 가졌다. 가오루는 너무 신중해서 제때 행동을 하지 못해 그의 연인들을 괴롭게 하며, 사고가 편협하고 속이 좁다. 반면 겐지의 손자인 니오노미야는 겐지의 바람기를 그대로 빼닮았다.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여인만 보면 제 것으로 만든다. 다만 겐지가 모든 여인들에게 진심을 다했다면, 니오노미야는 상대 여인들을 쉽게 저버린다. 그러니 그의 어머니 아카시 중궁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방자하다고 비난한다.
이 둘의 성격은 우키후네라는 여인과 얽힌 일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키후네는 가오루와 서로 사랑하는 여인이다. 그런데 가오루가 그녀와의 신분 차이 때문에 갈팡질팡하며 소홀해진 사이, 니오노미야가 우키후네를 겁탈한다. 우키후네는 황자인 니오노미야를 거부할 수 없어 그와 연을 맺는다. 가오루는 그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한없이 냉랭해지고, 니오노미야는 금세 흥미가 식는다. 결국 우키후네는 가오루에 대한 죄책감과 니오노미야에게 결국 버림받을 거란 사실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강에 투신하고, 극적으로 살아남아 출가하여 평안을 얻는다.
이런 두 남자를 보고 있으면 완벽한 겐지가 그리워지기는 하지만 작품성 측면에서 본다면 결함을 가지고 있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소설적인 깊이를 더한다. 가오루는 출생의 비밀이 콤플렉스가 되어 고뇌하는 햄릿형 인간이고 니오노미야는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돈키호테형 인간으로, 정반대인 두 사람의 라이벌 구도가 작품을 한층 더 흥미롭고 풍성하게 한다.
『겐지모노가타리』를 현대판 일본어로 번역한 역자는 이 작품을 ‘출가이야기’로 부르고 싶다고 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모두 출가를 하거나 출가에 실패하여 살아간다. 전반부의 히로인인 무라사키 부인은 평생 겐지의 첫 번째 여인이라는 영예 속에서 편히 살았으나 진심으로 출가를 원했음에도 겐지의 고집으로 평안을 얻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반면 속편의 히로인 우키후네는 기구한 운명 속에서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고뇌하며 살았으나 결국에는 출가하여 평안을 얻는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우키후네 쪽이 해피엔딩인 셈이다.
『겐지모노가타리』는 최초의 심리 소설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탁월한 심리 묘사와 이야기 흐름, 갈등 구조, 다양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작품을 궁녀가 썼다는 것. 그래서인지 여성들에 대한 심리묘사가 매우 상세하며, 그녀들의 운명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 된다. 그래서 겐지와 가오루 등이 주인공 같지만 결국 이 남자들은 여인들이 성장하거나, 영락하거나 출가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할 뿐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전반부와 후반부의 분위기 차이를 통해 연애, 사랑, 인생, 종교에 대한 작가의 생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작가는 궁 안에서 수많은 남녀 관계를 보거나 자신이 직접 겪으면서, 처음에는 그 화려함과 자극적인 감각에 심취해 있다가 점차 그 관계들의 무의미함과 허무함, 그리고 자기 자신의 안에서 삶의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종교적인 부분까지 경험하여 결국 마지막을 우키후네의 출가로 마무리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한편 그러거나 말거나 또 다른 여인을 찾아다니는 남자들은 우키후네나 무라사키 부인에 비해 한없이 한심할 뿐이다. 궁에서 오랜 세월을 살며 이런 대작을 남길 정도로 깊은 상념에 잠겼던 작가의 눈에 당시의 남성과 여성은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