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드디어 남편을 만났다
앤데믹의 시대
2022년 새해맞이는 본가에서 가족들과 함께했다. 남편과 오래 떨어져 지내는 딸이 항상 마음 아픈 부모님과 형제는 언제나 나를 잘 챙겨주었다. 여전히 코로나는 맹위를 떨치고 있었지만, 언론에서는 포스트코로나를 준비해야 한다며 조심스레 이야기 해댔다. 그렇다면 진짜 이제 남편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걸까? 하는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점점 재택근무의 횟수를 줄여갔다. 코로나 초반에는 재택근무를 주 5일, 주 3일을 했다면 조직장의 재량에 따라 이를 유연하게 운영하기 시작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무실근무를 더 선호했기에 큰 반발심은 없었다. 또 나는 혼자서 운전하는 출퇴근 시간을 좋아했다. 서울 운전은 기가 빨린다고 하지만 다행히 회사는 강남 한복판은 아니었고, 집에서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어렵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기에 즐기게 된 것 같다. 특히 퇴근길의 노을을 참 좋아했는데, 열심히 일 한 뒤 노을을 볼 때면 나 자신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노을이 마치 일과 일상의 스위치 버튼 같아서 퇴근길에는 앞으로 내 미래를 어떻게 그러야 할지도 많이 생각했었다. 남편의 주재 기간이 한차례 더 연장됐다. 이 말은 향후 3년은 한국으로 귀임의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주재원으로 나가 있는 동안 해외 법인이 많이 안정화가 된 것 같고 남편의 대체자가 많지 않은 이점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 같았다. 슬슬 앤데믹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서 하늘길이 열릴 조짐도 보였다.
각자도생과 도태
반면 나는 커리어 정체기를 겪고 있었다. 대면으로 많은 업무를 해야 하는 내 직무의 특성상 다양한 것을 시도하지 못하게 되었고 코로나가 내 성장에 발목을 잡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회사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7명이던 팀원이 일 년 사이에 3명으로 줄었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걸맞게 회사와 팀의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한 팀원들은 하나 둘 퇴사하거나 팀 이동을 해 나갔다. 내가 팀에 남아있던 것은 Specialist로 커리어를 쭉 이어가고 싶은 이유도 있었지만 내 인생의 전환점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아무런 변화를 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팀 선배가 직무 전환을 권했을 때, 다른 팀에서 오퍼를 해 줄 때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어야 하는데 불안한 미래에 안일했다. 요즘 이게 참 후회가 된다. 남편이 있는 곳으로 이주를 하더라도 그전에 이것저것 최선을 다 해 볼 것을..! 각자도생으로 팀을 떠난 사람들은 다 잘 된 것 같다. 나는 팀에 남아 이도 저도 아닌, 아니 도태가 되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고대하던 하늘길이 열렸다
앤데믹이 점점 다가오며 일상생활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거리 두기와 백신접종에 대한 느슨한 정책이 이어졌고 해외발 백신접종 입국자에게 자가격리가 해제되었다. 남편의 체류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업무 스케줄을 조율해서 2년 반 만에 한국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고, 나 역시 차곡차곡 모아둔 연차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을 픽업하러 인천공항으로 나가던 날이 기억에 남는데, 인천공항에 새벽 6시경 도착이라 꽤 일찍 집에서 나가야 했다. 잠들어버리면 혹시라도 못 일어날까 봐 뜬 눈으로 밤을 새웠고, 공항에 도착한 뒤 주차장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오랜만에 남편을 만난다 생각하니 설레기도 했고, 언어도 기후도 다른 곳에서 외노자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쓰러운 마음에 눈물이 슬쩍 고이기도 했다. 해외여행을 갈 일도 없었으니 공항도 꼬박 2년 반만의 방문이었다. 입국장의 대기 의자에 앉아 남편을 기다리는데, 새삼스레 공항에서의 이별이 떠오르며 떨어져 혼자 지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드디어 남편을 만났다. 입국장 문이 열리는데 멀리 서봐도 내 남편이 보였고, 믿기지 않았다. 사실 그 순간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머쓱..) 왜냐하면 웃긴 이야기이지만 남편의 패션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머리부터 마스크를 거쳐 발끝까지 그 나라 사람이 되어 돌아온 남편을 보니 2년 반전에 출국장에서 헤어진 댄디보이와 오버랩이 되면서 웃펐다. 물론 혼자 한 생각이었고 나중에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나름 신경 쓴 거였단다. 나중에 내가 그 나라에 살아보니 남편의 말이 맞았었네 싶었던 게 더 웃기지만. 아무튼 우리는 햇수로 3년이 흐른 뒤 삼십 대 후반이 가까워 상봉을 했다.
우리에게는 나와 남편의 휴가 기간만큼인 보름의 시간이 주어졌고 그동안 못 했던 것 다 해보려고 분주히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