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몰입.
퍼소나/페르소나는 언제부터인가 UX에서 정답처럼 자리잡았다. 우리 서비스를 사용하는 사용자를 이해하고, 그 사용자들이 겪는 불편함에 공감하고, 거기에 맞는 맞춤형 솔루션을 구현한다.
사용자 중심 디자인. 이해와 공감. 음. 좋다. 그럴듯하다. 말나온 김에 한번 만들어보자. 우리 서비스가 뭐 만보기 앱, 건강 관리 앱 같은 거라고 가정해보자.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한 결과 우리의 사용자들의 모습은 대략적으로 이러하다...
이름, 나이, 직업, 루틴, 목적과 페인 포인트까지 들어간 간단한 퍼소나가 만들어졌다. 이제 여기에 시나리오를 좀 더 맛깔나게 곁들여보면...
장유진: 저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조깅을 하는데, 이 취미를 유지하는 게 어려워요. 그런데 이 앱에 있는 고양이 캐릭터가 너무 귀여운 거 있죠. 얘가 중간중간 나와서 운동하라고 부추기는데 안 할 수가 없잖아욧!!!!!
이렇게 하나의 인간이 뚝딱 만들어졌다. 대사를 맛깔나게 쓰면 더욱 재밌다. 나는 작가이지 않나. 스토리텔링에 환장하는 인간이다. 동료들 또한 재밌다 재밌다 하며 꺄르르 웃는다. 회의는 분위기가 좋고, 어느새 우리 모두는 유진이가 되어 있다. 그냥 사용자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한 명쯤은 꼭 있을 것 같은 리얼한 하나의 인간이라며, 몰입하고 몰입한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퍼소나가 UX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유진이'는 확실히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인터뷰에서 나온 데이터를 철저하게 따랐고, 인용문 또한 실제 사용자의 데이터에서 참고했다. 동료들은 회의를 떠들썩하게 진행했다. 문제 없어 보였다. 어쩌면 이상적인 케이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이상하게, 이 매력적일만큼 인간적인 사람이 나한테는 잘 안 붙는다. 와닿지 않는다. 이 사람이 정말 현실적이냐, 데이터를 잘 반영했냐라는 문제를 넘어서, 그냥 와닿지 않는다. 장유진이라는 이름.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귀여운 취향(구체적으로 노르웨이숲을..). 내가 직접 쓴 유진이의 대사, 루틴, 취미 등등...
나에겐 이 퍼소나가 체감이 안됐다. 의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에게 유진이는 재미로 소비되었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건 아주 재미있는 소꿉장난이었다. 재미있는 유용한 방법론이어야했을 퍼소나는 그렇게 나에게 한여름밤의 꿈처럼 순식간에 산화했다.
나는 보고서를 쓰면서 유진이를 아주 순조롭게 잊어버렸다. 그래프를 그리고, Raw Data를 채워넣고, 결론을 도출하고, 그 후에 유진이를 결론에 끼워맞췄다. 유진이는 재미는 있었지만 나에겐 공감 혹은 분석의 도구는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퍼소나를 만든다. 왜 만들어야 하는지는 논의거리가 되지 않는다. 퍼소나는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방해도 되지 않았다. 예쁘게 정돈된 캐릭터에 매력적인 서사 몇개를 붙이는데 시간은 2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아마 그건 내가 스토리텔링 재능이 제법 있는 편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퍼소나를 만드는 유흥은 우리 프로젝트에 있어서 좋은 분위기 환기점이 되어주었다.
단지 그것뿐일까..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는 없는 걸까. 혹은 유용하다는 생각을 내가 품게끔 누군가가 날 설득시켜주지 않으려나. 유진이는 나에게 그 어떠한 의미도 주지 않았다. 좋진 않지만, 싫지도 않다. 몰입이 되고, 빠르게 식는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유흥거리였다.
퍼소나를 만드는 과정은 분명히 논리적이다. 데이터를 정리하고, 공통점을 묶고, 유형을 나눈다. 말이 되는 흐름을 만들어내면, 그걸 한 사람의 얼굴로 묶는다. 이름을 붙이고, 대사를 쓰고, 작은 취향을 하나 얹는다. 대부분 그 지점에서 ‘공감’이 시작된다.
하지만 나한텐 이상하게 그게 공감이 아니라 마무리처럼 느껴졌다. 퍼소나를 만든 순간, 생각이 거기서 멈춘다. '이 사용자는 이렇다'고 한 줄 요약이 내려지는 순간, 정제된 인용구와 고정된 감정지도만 남는다. 여백 없는 퍼소나와 마주하고 나는 '굳이' 더 상상하지 않는다. 결론이 내려졌으니까.
퍼소나, 저니맵. 우리는 지도를 그리기 위해 퍼소나란 이름의 나침반을 만든다. 안개에 싸여서 보이지 않는 많은 길들이 점점 하나로 합쳐지고, 안개가 걷히고, 방향성을 잡고 나아간다. 그게 아마 실제 퍼소나의 의도였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오히려 반대로 사용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예를 들면, 이미 눈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대책없이 날뛰며 또다른 길을 만들어낸다던지... 눈 감고 무작정 가다가 나무에 부딪혀버린다던지. 장유진은 없고 장과 유와 진이 무수히 많이 나타나 서로와 감성과 논리 배틀을 벌인다던지.
완벽하게 매혹적인 퍼소나가 인도해주는 단 하나의 방향성으로 가고 싶진 않았다... 이야기가 너무 쉽게 정답처럼 흐르는 것이 내게는 불안했다. 틀려도 일단 GO하는 게 유행하는 실무 세계와는 매칭되지 않는 생각이지만, 그래도 망상 하나 해볼 순 있을 것이다.
점심도 채 먹지 않고 오전 10시부터 격정적인 논의가 오가는 장소.
오병철: 대체 헬스 앱에 쓰잘데기없는 그런 그래픽이 왜 들어가는지 모르겠어요. 그것 때문에 정신만 사납고 운동에도 집중이 안돼요. 고양이를 넣는단 건 좋은데 이 앱 정체성을 해치는 정도가 되면 안되잖아요?
병철이(32, 공무원)는 논리적이다. 고양이보단 사람을 좋아하고, 4년째 헬스를 지속해오고 있는 진성 운동광이다. 오직 헬스에만 목숨을 거는 병철이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 서비스에 튀어나오는 고양이 캐릭터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그렇게 회의실엔 유진파와 병철파가 탄생한다.
유진파: "아니 유진이가 고양이 좋아한대잖아요!! 얼마 없는 병철이 때문에 기능을 통으로 뺄 거에요?! 지금 사용자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병철파: "애초에 고양이가 왜 들어가야 하죠? 마침 성능도 많이 잡아먹는데 잘됐어요. 리소스 낭비는 안하는 게 낫죠. 병철이 말이 맞아요."
유진파는 감성 중심 사용자다. 고양이 그래픽은 유진이가 서비스에 자주 방문하게 만드는 숨은 원동력으로 동기부여의 진국이니 뺄 수 없다는 입장이다. 객관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려우나 무의식은 중요하니까.
병철파는 효율 중심 사용자다. 직관적인 걸 선호하며, 쓸데없이 리소스를 잡아먹는 잡다구레한 그래픽을 빼는 것을 원한다. 헬스 앱의 정체성이 깨지는 것에 예민하며, 앱이 점점 산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병철파와 유진파, 첨예하게 대립중... 그리고 이들을 중재하기 위해 미연파가 나선다...!
김미연: 이 앱은 뭐가 이렇게 업데이트가 많은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업데이트하면 할수록 뭔가 더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일을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미연파: 섣불리 지금 있는 기능에 손을 대다 사용자가 이탈할 수 있으니 변화는 최소화하도록 하죠. 우선 가장 명백한 페인 포인트들 위주로 천천히 개선하는 게 어떨까요?
미연파는 안정 중심 사용자다. 그리고 겸사겸사 쓸데없이 회의가 길어지는 것을 막고자 하는 수호의 여신이기도 하며, 아니면 그냥 일이 늘어나는 게 싫은 보수파일 수도 있다.
한창 격렬하게 싸우던 유진파와 병철파는 동시에 미연파에게 반발한다. 고양이를 죽이고 살리는 건 그들에게 매우 중대한 이슈다. 이미 유진이와 병철이는 그들과 한몸이 되었다. 미연이는 손목시계를 대놓고 보란 듯이 노려보며 회의를 끝내자는 무언의 몸짓을 보내지만 유진이와 병철이는 슈뢰딩거의 상자를 열기 전에는 회의를 끝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중재의 중재를 위해 또다른 파벌이 등장하는데...!
박수현: 요즘은 기능 하나만 있는 서비스는 도태되기 일쑤예요.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기능이 많아야 하죠. 안 그래도 요즘 OO 경쟁사가 업데이트하면서 할 수 있는 게 되게 많아졌던데...
수현파: 사용자 수현씨는 우리 서비스가 타 서비스보다 기능이 현저히 부족해 이탈 직전이라고 합니다! 고양이든 강아지든 뭐든 끌어모아서 !!IMPACT!!를 줘야 해요!!
수현파는 전문가 사용자이자, 혁신 중심 사용자다. 전문가 사용자는 사용자 풀 중 극소수에 해당하지만, 이 사람들은 사실 VIP나 다름없는 분이시다. 소수라 한들 이 전문가들의 의견은 대부분 평범한 사용자들보다 더 극진히 대접받는다. 그렇게 수현파는 고양이를 넘어 강아지를 데려오기 시작한다.
전쟁.. 그리고 전쟁. 영원히 반복되는 회의의 수레바퀴. 퍼소나의 원래 등장 배경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산으로 가는 회의.
나는 예전부터 이런 '회의'를 동경해왔다... 과몰입을 할 거면 확실하게. 애매하게 친밀해서 오글거리지 않게끔. 나는 무아지경으로 유진이와 병철이 둘 중 한쪽의 편을 들고... 결국은 내 성격상 회의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미연이의 편을 들겠지만. 전문가 사용자를 존중해야 한다는 핑계로 수현이 이름을 앞세워 조금 '엉뚱한' 아이디어도 대수롭지 않은 척 내보고. 그냥 그렇게.
퍼소나는 나에겐 여전히 낯선 도구다. 설명할 수 없는 익숙함과, 공감하지 못하는 친밀감 사이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과몰입을 할 만한 환경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곳은 회의실이니까. 마치 오랜만에 만난 어색한 동창을 만난 듯이 유진이와 병철이에게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친밀감을 표시한다... 내겐 퍼소나가 딱 그런 느낌이다.
그럼에도 내가 아닌 사람들은 유진이와 병철이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미연이와 수현이를 진심으로 기억한다. 퍼소나를 쓰는 의미가 나에겐 비교적 명확하진 않지만, 그래도 회의는 잘 굴러간다. 꼭 명확한 의미가 있어야 할까. 누군가는 잘 사용하고 있겠지.
그러니까 어쩌면 이게 퍼소나를 UX에서 가장 잘 쓰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나한텐 조금 낯설지만, 모두에겐 익숙한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