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얼음의 직장인: 고용시장 최후의 생존자

안녕안녕

by 블루잉오렌지


요즘 같은 불경기 하락장 얼어붙은 고용 폭락시장에서 불과 얼음을 동시에 체험하면서 굴러다니는 취준생들은 더이상 취준생이 아닌 생존자라고 불러야 아다리가 맞을 것이다.



그리고 나, 외모와 스펙과 전공 모든 핸디캡을 견뎌내고 자유를 쟁취한 자. 라스트 오브 취준생. 취준생 서바이벌에서 살아남아 직장인 서바이벌에 참가한 나. 인생은 영원한 경쟁이어라.



이제 와서 비전공자 무스펙 신입이 겪은 좌충우돌 적응기 같은 걸 적기에는 이미 난 적응해버려서 너무 늦었으니, 그냥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 느낀 나 자신의 변화나 넋두리 같은 걸 적어보고자 한다.






내가 신입으로서 입사한지 몇달이 흘렀고, 나는 여전히 신입의 지위에 머물러 있지만 마음가짐만큼은 사장이다. 시야는 넓게, 꿈은 크게, 요령은 많이. 야근도 많이..


나는 벌써 프로젝트 두개를 끝냈고, 체계화된 로직과 프로세스를 배우기보다는 이게 맞는지도 모르고 일단 때려박았고, 그지 같은 맨땅헤딩을 넘어 어찌저찌 내 기준으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일단 원없이 수백장의 보고서를 작성하며 '돈을 버는데 도움이 되는 글쓰기'를 했다는 게 가장 사랑스러웠던 내 업적이었다. 설계에 분석에 디자인까지 다해먹는 동안 나의 위대한 사수 형님이 한 것은 간격맞추기뿐이었다.


이것이 직장인의 삶. 스펙타클. 나는 입사하자마자 다짜고짜 실전에 뛰어들어 대부분의 일을 (사수에게) 떠맡겨졌다. 그놈들은 내게 데이터 분석하는 법도, 디자인을 하는 법도, 보고서를 잘 쓰는 법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냥 했다.


가장 어렵고 오직 사수만이 해낼 수 있는 작업이 우리 팀에 들이닥쳤을 때 사수는 나몰라라 휴가를 떠났다. 그래도 좋다.


내가 아이디어 100개를 낼 동안 코나 후비적거리면서 훈수나 둬도 나는 괜찮다. 자료 읽지도 않은 주제에 회의할 땐 모든 흐름을 전부 이해한 척 유세나 떨어도 나는 괜찮다.


기껏 시간 들여서 떠먹여줬더니 나중에 와이어프레임 그릴 때 내 의견은 하나도 반영하지 않고 놀라우리만큼 병신 같은 결과물을 만들어냈어도 나는 괜찮다. 하도 병신같아서 진도가 안 나가자 클라이언트가 역으로 떠먹여주기 시작하고 나는 직장인으로서 자긍심이 무너진다고 해도 괜찮았다. 제발 나 혼자 일하고 싶었지만 괜찮다. 괜찮고말고.



이것이 바로 직장인! 개같이 굴러서 성과를 빼앗기고 사내정치 폭풍에 휘말리면서 쥐꼬리만한 월급을 손에 아득바득 쥐어가는 직장인의 삶!




비아냥거리는 투로 적긴 했지만, 놀랍게도 나는 행복하다. 나는 남들보다 합리화를 조금 더 잘하니까. 육체는 힘들어도 정신은 힘들지 않다. 백수를 졸업한다는 일은 내 생각보다 훨씬 행복하다.


하루하루가 도파민의 연속이다. SNS 따위보다 사내정치가 훨씬 재밌다. 내가 평화보다는 경쟁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것도 회사에 들어와서 인생 실전에 들어와본 후에야 깨달았다.



나는 퇴사 생각이 없다. 퇴사와 이직이 트렌드화하고 전염병마냥 회사 내에 떠돈다고 해도, 나는 퇴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도망친 곳에 자유는 없으니까.


여기 브런치에도 당장 퇴사와 직장 내 괴롭힘, 상사들의 꼰대질과 무능한 동료, 없다시피 한 보상 등, 긍정적인 글보다는 부정적인 글이 훨씬 많이 존재한다. 좋소기업 얘기 말이다. 나도 취준생 시절에 그런 글들을 많이 봤었다보니, 회사에 입사하기 전부터 회사라는 개념에 대해 그리 좋은 인상을 가지지는 않은 것 같다. 들어가기 전부터 '이상한 꼰대들만 있으면 어떡하지?' '월급이 밀리면 어떻게 신고하지?' 이런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 같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 수많은 세상의 이야기들은 나의 현실은 아니다.


그건 그 사람들의 현실이지. 세상을 바라보는 그 사람들만의 색안경에 맞춰진 현실 말이다.


내 색안경은 그 사람들의 것과는 다르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력 없는 사수가 있으면, 반대로 겉은 별거 없어 보이는데 속은 날카로운 팀장님이 있다. 결과물을 가지고 꼬치꼬치 캐묻고 깊숙이 파헤치며 압박하다 보면, 결국 실제로 영양가 있는 일을 한 사람이 누구라는 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렇게 팀장님이 사수를 '다정하게' 물어뜯는 모습을 난 옆에서 팝콘을 뜯으며 즐겼다. 세상은 균형이다. 어딘가에는 내 편이 있고, 어딘가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시야가 좁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당장 눈에 보이는 부정적인 것 위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외부를 넓게 바라볼 수 없으니, 내가 있는 환경이 나쁘게 여겨지고, 내 주변 사람들은 악의를 품고 나를 공격하는 것만 같다. 내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더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하물며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않나? 회사란 필연적으로 '부정적인 장소'가 되어버린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나는 회사가 나에게 있어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장소였으면 좋겠다. 내가 나를 만들어가고 성장에 동기부여를 주는 장소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외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낀다면 좋겠다. 나는 남들보다 조금 더 비관에 취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적절하게 눈을 돌리고 나만의 상상에 빠질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 입사하고 두세달 동안은, 지하철에서 책과 에세이를 읽고, 퇴근하고 나서도 인강 등 자기개발을 하다가 밤 9시에 잠들어 6시에 일어나는 기적 같은 삶을 보냈다. 나는 한여름 지옥철에서 옆에 서 있는 아저씨의 겨땀 냄새를 맡으며 필사적으로 책을 읽었다.


직장인이 되자 하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비단 돈이 생겨서 꼭 그런 건 아니다. 배우고 싶은 게 많아지고, 알고 싶은 게 많아지고, 도전하고 싶은 게 많아진다. 영감이 떠오른다. 손과 머리가 멈추지 않는 삶이란 행복하기 그지없다.


음, 그리고 지금은 남는 시간에 자기개발에서 잠시 벗어나 원래 나답게 느긋한 사색을 즐기고 있다. 지금은 겨울잠 시즌이니까. 사유라는 이름의 멍을 때리면서 적절하게 휴식할 필요가 있다.



내가 지금 내가 만들어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기에, 일도 휴식도 나에게는 성장으로서 작용한다. 그리고 그 성장은 남들이 시켜서 해야 하는 성장도 아니고,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성장도 아니고, 그냥 나 자신이 재미있게 살기 위한 욕망스러운 성장이다.


나 외에 다른 사람들도 이런 재미를 느껴보았으면 한다. 겪지 않은 일에 두려워말고, 당장 힘든 시련이 닥친 것에 당장 분노를 토하지 말고, 조금 더 넓은 시야에서 함께 긍정적인 경쟁과 도전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만큼 성장한다. 니가 도망간 만큼 내가 성장한다, 나의 동료 새끼들아. 중요한 건 나한테 떠넘기고 본인은 실력도 안 쌓이는 잡무만 대신 해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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