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빠르게 빠르게 책임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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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데이션을 하기 위해선 그걸 해야 한다. 그것.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바로 그거다.
어피니티 다이어그램.
저번에 얘기 안하고 넘어간 게 있는데, 아이데이션은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해서 낙서하는 작업이 아니다. (난 그렇게 진행했지만)
아이데이션은 무조건 데이터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야 이거 떠올랐는데 이거 해봅시다'를 대놓고 어필하면 안되고, '사용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요 voc에 따르면 요런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라고 포장지를 좀 덧씌워야 한다. 어쨌든 뇌피셜인 건 똑같지만, 적어도 근거 있는 뇌피셜을 위해서다...
그래서 우린 아이디어 스케치를 하기 전에 먼저 두 가지 종류의 데이터를 쫘라락 인쇄하고 메모지에 적어서 영감용으로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었다. 첫 번째는 당연히 IDI 데이터. 두 번째는 바로 시장 데이터, 즉 타사 벤치마킹 화면이다.
사실 UIUX라는 게 우리 G 팀장님의 말을 빌려서 정의를 내려보자면 "잘 따라하기"이다. UIUX는 시장의 유행을 잘 따라가야 하는 직무이며, 0에서 1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아니다. 0에서 1을 만드는 걸 좋아하고 기존에 있는 걸 개무시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그래서 항상 팀장님의 말씀을 거룩하게 가슴 속에 되새겨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아 스바 개별론데요 내가 왜 남을 따라해야 함' 하고 내 내면의 홍대병 자아가 나대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나는 우리 고객사와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타사 서비스를 마구 찾아서, 그걸 토대로 내가 다시 A4 용지에 Lo-fi 와이어프레임 식으로 그려보았다. 우리가 헬스케어 서비스를 한다고 해서 헬스케어 서비스만 찾으면 안되고,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기만 한다면 모든 종류의 도메인이어도 상관없다. 예를 들어서 음식의 사진을 찍어서 칼로리를 계산하는 UI 화면을 그린다고 친다면, 어쨌든 카메라를 가지고 뭔가를 하는 서비스란 서비스는 다 참고했다. 그러다 보니까 조사 범위가 상상초월이다. 나의 이런 노력을, 아이데이션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척 팀장님께 가져가서 슬그머니 어필하기도 했다.
또, 시장 데이터 못잖게 유저 데이터도 중요하다. UIUX라는 게 경쟁사를 따라하는 건 좋지만, 그대로 따라하면 아무래도 여러모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사를 참고하되 약간의 변형을 구사해야 하는데, 그 때 도움이 되는 게 유저의 발언 데이터들이다. 특히 이런 것들.
다른 회사 서비스도 써보긴 했는데 사실 걔는 쓰기 불편하긴 해요. 예쁘지도 않고. 근데 기능이 많아서 쓰는 거죠. 특히 이 기능은 많이 쓰는 거니까 좀 잘 보이면 좋겠는데.
안 그래도 원래 쓰는 거가 오래된 앱이라 불편하긴 해요. 그래도 쓰던 버릇이 있어서 쓰긴 하는데, 똑같은 기능이 있는데 더 발전되서 나온다면 그걸로 갈아탈 순 있죠.
이런 것들이 황금 데이터다. 정확히는 '근거로 만들기 쉬운' 황금 데이터다. 어떻게 변형을 해야 할지 잘 알려준다. 똑똑하고 열정적인 유저들이 대놓고 경쟁사와 장단점을 비교하고 왜 그걸 사용하는지 왜 불편한지 이유까지 스스로 나열해주니,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는 데 아주 탁월하기 때문이다. 진짜로 유저가 우리 서비스로 갈아탈 것이냐, 그거에 대한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이런 voc들을 메모지에 적어서 보란 듯이 벽에 붙여놓는 거다. 나는 그때 IDI 보고서를 혼자서 작성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voc 메모지를 적어서 붙이는 건 거진 내가 담당했다. 그래서 메모지와 타사 사진을 같이 벽에다 장식해두고. 다른 쪽 벽에는 우리가 그걸 참고해서 떠올린 아이디어들을 A4용지에 그려서 그것도 갖다 붙인다. 그런 식으로 모아놓고 보면 꽤나 장관이다. 아, 역시 UX란 이거지. 어피니티 다이어그램이 역시 보는 맛이 있어.
아무튼 이런 데이터가 기반이 되어야 사용자들이 원할 만한 기능을 잘 떠올릴 수 있고, 우리 서비스에서 동떨어진 아이디어를 내놓는 걸 차단할 수도 있다. 나는 항상 내 아이디어가 지나친 뇌피셜로 가지는 않는지 매번 타사 서비스를 싸돌아다니며 스스로 검증했다. 틈만 나면 wwit(지금은 업데이트가 안되고 있는 듯 하다..) 같은 많은 서비스의 화면을 모아놓은 사이트를 보면서 영감을 받고, 혼자 작업실에 앉아서 메모지들을 보면서 멍때리다가 직원들이 나 빼고 전부 퇴근해서 회사에 갇힐 뻔한 적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퇴근하신 디자인 팀 직원 분이 작업실에 불이 켜져있는 걸 발견해주셔서 다행이었다.
디자이너: 혹시 누구 계세요...?
나: 어... 안녕하세요?
디자이너: 퇴근 안 하시나요? 저는 이제 가려고 하는데...
나: 네 네 나갑니다!
C, B도 본격적으로 와이어프레임 작업에 착수했다. 나는 C와 B가 와이어프레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정말 적극적으로 아이데이션 작업에 임했다. 와이어프레임 작업이 최대한 빠르게 끝나야 그 다음 작업인 UT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야 UT고 AB 테스트고 뭐고 가능하니까.
난 머릿속으로 조금만 있으면 드디어 실전 UT를 체험해본다는 기대감에 후욱후욱 콧김을 들이마시고 있었고, C와 G의 UT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데이터(?)를 흡수할 생각에 신이 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내가 UT 설계까지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거야말로 리서처의 필수 스킬 아니겠나.
UT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리도록 하고... 일단은 마저 하던 아이데이션을 하자. 일단 와이어프레임이 완성이 되어야 다음 단계로 진행할 수 있다.
나는 C와 B가 와이어프레임을 만드는 동안, 오전과 저녁에는 아이데이션을 하고 오후에는 보고서를 마저 작성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또 궁금증이 생겼다. 아이디어 스케치는 했는데 그래서 이건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용되는 걸까? 와이어프레임에 적용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그 과정에서 뭐가 좋은 아이디어고 뭐가 별로고 이런 건 어떤 절차로 판단되는걸까? 클라이언트 분들이 이걸 하나하나 보면서 평가해주진 않을 거고, 그럼 무슨 기준으로 아이디어를 적용해야 하는 걸까? 난 그게 궁금해서 C에게 물어봤다.
C: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거 우리만 보는 거 아니구, 클라이언트 분들이 다 보실 거예요.
나: 네? 이(딴) 걸요?
C: 이런 거 하나하나가 자산이거든요. 이거 나중에 다 모아서 중간 보고서에 갤러리 형태로 넣을 거예요.
나: 어... 그래요? 이걸 클라이언트 분들이 진짜 봐요? 안 보실 거 같은데.
C: (웃음) 아이 보죠~ 그리고 안 본다 해도 이런 거 다 기록으로 남겨두는 게 중요해요. 우리가 이만큼 했다는 걸 보여줘야 되거든요.
나: 그럼 더 그려볼까요? 아직 비어있는 데도 있는데...
C: 네!
나는 이 아이디어 스케치들은 어디까지나 내수용(?)이라 생각했다. 너무 대충 그리기도 했고, 내 마음속엔 고객님들한테는 예쁘게 정리된 완성본을 보여줘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걸 기록해서 심지어 보고서에 보낼 거란 걸 알았다면 나도 조금은 성의 있게 그렸을 것이다...
실제로 일주일마다 정기 회의를 하는 동안, 쉬는 시간이 되면 클라이언트 대리님과 과장님이 되게 흥미진진하게(??) 작업실을 오다니며 내 등신 같은 낙서들을 감상하셨다...
지금 생각해보자면 대리님과 과장님은 저런 발로 그린 듯한 낙서 모음집도 매우 진지하게 (고개까지 가끔 끄덕여주시면서) 봐주시는 매우매우 좋은 클라이언트 분들이었지만, 그 당시 찐따였던 난 내 내면의 쪽팔림의 바다에 파묻혀있어 제발 내 거 보지 말고 예쁘게 잘 그린 C나 B 스케치나 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고만 있었다. 내가 그냥 재미삼아 그린 무의미한 망상 스케치랑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메모도 중간에 섞여 있었는데, 거기에 딱 멈춰서 열심히 보고 계신 걸 보고 민망해서 도망가고 싶었다.
여담으로 B는 중간 중간 또 다른 업무에 불려가서 아이디어 스케치에 별로 참여하지 못했다. 가엾은 B. 그러니까 작업 비율로 따지면 A:B:C = 70:5:25 정도랄까..?
맞다. 내가 스케치의 비중을 반 넘게 차지한다. 할 수 있으면 해야지. 생각이 떠오르는 걸 굳이 억누를 필요는 없지 않나...
이 아이데이션 작업을 하면서 나는 내가 오전 시간에 매우 두뇌가 활발하게 작동한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출근하는 동안 아침 8시부터 점심 먹기 직전, 12시까지. 그 시간에 가장 정신이 말똥말똥해서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곤 했다. 그래서 일부러 점심도 늦게 먹기도 했다. 점심을 먹으면 순식간에 식곤증이 밀려와서 집중력이 떨어지다 못해 사라지니까.
아무튼 이 아이데이션 작업은 정말로 힘들었다. 그와 동시에 재미있었다. 정말로 실질적인 UX를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내가 그린 아이디어 스케치만 수십장이었다. 수십장이 뭐야. 내가 중간에 '아 이건 좀 아닌 듯' 하고 뇌절해서 갖다버린 스케치까지 합치면 100장이 훌쩍 넘을 거다. 사실 아이디어 스케치는 양이 많다고 좋은 건 아니지만, 나는 쌓인 스케치를 보고 홀로 뿌듯해했다.
양이 많다고 좋은 게 왜 아니냐면, 다른 사람들이 내 아이디어를 하나하나 정성스레 봐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보긴 보겠지만 어쩔 수 없이 못 보게 된다는 거다. 이걸 설명하는 유명한 UX 법칙이 힉의 법칙(Hick's Law)이란 게 있다. 쉽게 말하면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결정하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거다. 결정장애가 된다라는 거다.
나는 뭐든지 양이 기반이 되어야 질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이지만, 현실적으로 수십장이 넘는 스케치를 하나하나 봐주면서 피드백해줄 한가한 사람은 별로 없다. '저 아이디어 100개 그려왔는데 보실?' 이라고 상사한테 알아볼 수 없는 낙서가 그려진 A4용지를 100장 던진다고 상상해보자.
...나라면 100장 하나하나 봐줄 것 같긴 하다. 내가 워낙에 강박증이 있어서. 나로 비유를 들면 안되겠다. 그러니까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거다.
일반적인 상사라면 그 수많은 낙서를 보고 '어쩌라고' 라는 생각부터 들 것 같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편하게 고를 수 있도록 어느 정도 요약하고 정리해서 세 가지 정도 가져간다면 모를까. 하물며 상사는 고사하고 클라이언트한테?
나: 리소스가 많으면 좋은 거 아니야? 뭐가 문제지? 대충 그려서 문제지 양 많은 게 문제는 아니잖아.
이 당시 공감능력도 없고 커뮤니케이션 경험도 없었던 나는 나 자신의 엄청난 발산 능력에 취해 있어서 그걸 몰랐다.
그래서 문제였지.
기능별로 기준을 세우고 쪼개서 순서대로 스케치를 붙이고 있는데, 작업실에 갑자기 누군가가 들어왔다. 발소리를 듣자 하니 G 팀장님일 리는 없고... 애초에 G 팀장님은 그렇게 우리 작업에 관심이 많으신 사람이 아니고. 나는 B랑 C 둘 중 한 명이 데이터를 보기 위해 왔나 싶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둘 다 아니었다.
F: 우와.
2팀의 PL인 F였다. F는 사무실에서 나와 가까운 자리에 앉지만,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F가 작업실에 들어오자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F는 한눈에 봐도 경계심 하나 없이 호의로 가득 찬 순박한 얼굴을 하고 안으로 들어와, 반짝이는 눈으로 메모지와 스케치로 가득 찬 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작은 목소리로 슬그머니 나한테 말을 걸었다. 내가 F에 대해 느낀 첫인상을 말해보자면... 나보다 경력이 훌쩍 많은데도 뭔가 어려보이고... 어딘가 위축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F: 저기... 조금 구경해도 돼요?
나: 아 네! 다 보세요.
나는 어색하게 이어서 스케치를 붙이고 있었고, F는 그 후로 말 없이 여기저기 구경을 하다가, 조용히 작업실을 나갔다. 너무 조용해서 언제 나갔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F가 여기 왜 왔는지는 몰랐지만, 뭔가 기운이 생겨서 다시 작업을 이어서 진행했다. IDI 보고서도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 나는 B와 C가 나중에 찾아왔을 때 참고하기 좋도록 쓸데없는 건 정리하고, 접착력이 떨어진 테이프가 있으면 다시 붙였다.
F가 왔다간 그 이후로, 작업실에는 나를 제외하고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언제부턴가 나만 방문하고 있게 되었다.
B가 빠져있어 B 대신 C를 돕기 위해 잠시 와이어프레임 작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작업 진행중인 와이어프레임을 한번 보았다. 되게 낯설었다. 낯설 수밖에.
내 아이디어는 단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와 C는 완전히 별도의 파이프라인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혼자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내 맘대로 아이디어를 전시하고. C도 자기 맘대로 자기 생각대로 와이어프레임을 만들고.
일부러 뺀 건가?
나는 딴 건 몰라도 와이어프레임에 내 아이디어가 배제된다면 내가 참여했다는 흔적이 다 사라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것에 상당히 민감했다. 크레딧. 근거. 주도권. 그런 것들. 특히 C가 상대라서 더 예민하게 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주도권 안 뺏기려고?
지금은 왜 C가 내 아이디어를 하나도 반영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된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내가 그때 상당히 잘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아이디어 스케치를 동료와 클라이언트에게 이해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지 않았었다. 그냥 '나 이만큼 그렸어' 라는 자기만족에만 목을 매달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이만큼 시도했고 이만큼 성장했다'에만 초점이 가 있어서 이게 실제로 현실에 반영이 어떻게 될지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은 거다.
완전히 신입다운 어린 관점이지. 마치 '난 이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 왜 날 뽑아주지 않는 건가요?' 라고 세상에 혼자 울부짖는 것 같다. 어리다. 그러면 안되지. 난 그러면 안돼. 그건 무책임한 일이다. 과정은 나한테만 중요한 거니까.
협업의 필요조건은 커뮤니케이션인데, 나는 그때 그 가장 중요한 역량이 아직 부족한 상태였다. 정상적인 아이데이션이라면 주기적으로 같이 모이는 자릴 가져서 자기 의견을 정리해서 공유해야 했고, 그게 아니라도 평소에라도 자리에 찾아가서 와이어프레임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중간중간 확인해야 했고, 그게 아니라도 최소한 남들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는 스케치를 그렸어야 했다. 나는 셋 다 하지 않았다. 노력하지 않았다. 게을렀다.
근데, 나만 게으른 걸까?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쪽은?
애초에 전시용 구색 맞추기로만 생각한 쪽은 더 문제가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