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의 꽃과 지옥, 그리고 헬파이어
전편: https://brunch.co.kr/@blueingorange/123
예전에 언급했었던, 취준을 하면서 공부한 것들을 실무에서도 거의 그대로 진행했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다. 나는 UX 부트캠프 수강생이었고, 그 과정에서 최소한 UX 관련된 것은 웬만한 건 다 습득했다고 자부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실무에 적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은 내가 취준생 시절에 배웠던 것보다 범위가 더 좁다고 느끼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인하우스가 아니라 에이전시에 다닌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진행하는 실무는 보통 스타트업~ 유니콘에서 하는 UX 업무들을 가르치는 부트캠프 커리큘럼과 안 맞는 구석도 꽤 있다. (아마 우리가 소규모 회사란 점이 더 크겠지만)
에이전시는 기본적으로 다른 회사의 프로덕트 개발을 돕는다. 우리 거가 아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생각의 틀이 자유롭고, 자유롭다는 말은 프로덕트에의 소속감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내놓은 아이디어와 결과물의 합리성을 클라이언트에게 '증명'하는 것이 모든 단계마다 들어간다는 점도 내포한다. 우리끼리 진행하고 결정할 수 있는 사항들이 아니기 때문에. 부트캠프에서 클라이언트랑 커뮤니케이션하는 법을 가르쳐주진 않으니까...
내가 디자이너가 아니기 때문에 기획과 리서치 업무 중심으로 에이전시와 인하우스의 업무 차이를 보자면... 일단 벤치마킹, 경쟁사 비교는 어느 회사나 중요할 것 같고...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역시 도메인 차이겠다. 에이전시는 매번 모든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도메인이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공부를 해야 한다. 우리는 프로덕트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영어 논문까지 읽어야 될 때가 있다. 이 공부 과정을 데스크 리서치라고 표현하는데, 정말 하기 싫다. 공부 싫어.
또 데이터 분석도 꽤 큰 차이가 있는데... 인하우스에서는 가설 수립부터 데이터 분석 단계가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같다. 에이전시도 데이터 분석을 하기는 하지만, 그건 유저 리서치에 치중되어 있으며 인하우스에서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흔히 얘기하는 인하우스의 데이터 분석 도구인 GA, Amplitude 이런 것들을 난 써본 적이 없다. 우리가 프로덕트를 소유하고 관리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 대신 우리 회사 같은 경우 유저 리서치의 비중이 매우 높아, 설문조사는 한번 할 때마다 표본이 100명이 넘고, 인터뷰라고 해도 기본 20명에 기간이 길 경우 50명 정도까지 하기도 한다.
에이전시는 일정 안에 빠른 리크루팅과 빠른 유저 리서치 실행에 포커스를 둔다. UT를 할 때 가설을 심도 있게 세우기보다는,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 폭탄을 질문지에 빠짐없이 전부 반영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보통 인터뷰 하나하나가 매우 길어지며 인터뷰어는 질문 암송 나열 기계가 되어간다. 내가 UX를 하면서 가장 개같았던 업무가 단연컨대 리크루팅이었다. 사람을 모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에이전시에서 유독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생각이 드는 업무가 하나 있다. 내가 우리 회사 실무를 처음 맞닥뜨리고 이걸 이렇게까지 하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류의 일은 이것이다.
컨셉 아이데이션.
사실, 컨셉 도출 자체는 취준생 때도 다 한다. 그 왜, UX 포트폴리오들을 보다 보면 꼭 디자인 결과물을 소개하기 전에 나오는 페이지. '나는 이 서비스를 디자인할 때 이런 방향성을 잡았어요'라고 그럴듯한 영단어 세 개 정도 뽑아 멋드러진 동그라미에 큼지막하게 박아넣는 그런 거 있잖은가. e.g. Sensation / Comfort / Reliable 이런 것들...
솔직히 이 키워드 어떻게 정하는가? 나는 취준생 시절 이랬다. 부트캠프 수강 시절 같은 팀이었던 사람들과 같이, 피그마에 그럴듯한 영단어 수십개를 배치해놓고 민주주의 민족답게 투표를 진행해서, 가장 많이 뽑힌 단어 네 개를 컨셉이라 소개했다. 그렇게 해서 뽑힌 게 아마...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느려터진 써브웨이 주문 과정을 간소화하기 위해 지하철에서 진화하여 고속철도를 개통하잔 의미에서 Express라는 단어류를 뽑았던 것 같다.
요점은, 우리는 나름 민주주의 과정을 거쳐서 이 멋드러진 컨셉 키워드를 뽑았지만... 의사결정 방식은 그 투표 딸랑 하나였다. 우리는 '그 키워드가 제일 괜찮아서' 뽑았다. 그런데 그 괜찮은 이유가 뭐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직관적이다. 그렇게 결정이 나자 얼렁뚱땅 넘어갔다.
이 컨셉 정의 단계의 중요성을 우리는 '대체 이걸 왜 하는지 모르겠는 단계'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고, 아마 내 생각에 다른 취준생 분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 어쨌든 중요한 건 디자인 결과물이지 않은가. 디자인 결과와 어울리고 말이 되기만 하면 되지, 솔직히 키워드 정하는 것 자체가 어렵기도 하고, 오글거린다. 괜히 있어 보이려고 포장하는 것 같고... 따지고 들어가면 뭐 얼마든지 따질 수는 있지만 애초에 영양가 없는 뜬구름 잡는 토론 같고... 그래서 우리는 투표라는 행위로 이 토론을 회피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을 거고...
이 세상 어디에 있는 그 누구도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법을 강의해주지 않는다. 그 아이디어를 논리적으로 말이 되게끔 설명하기는 더더욱. 그 아이디어를 담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완벽하게 함축적인 키워드를 정의하기는 과연 가능할까?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이 컨셉 아이데이션 단계만 우리는 한달을 진행했다.
우리가 지금 진행하는 업무는 세 가지.
나(A): IDI 유저 데이터 분석 + 보고서 쓰기
C+B: 와이어프레임 제작 및 Flow 수립
All: 아이데이션
원칙적으로는 순서가 데이터 분석 -> 보고서 작성 -> 아이데이션 -> 와이어프레임 제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사이트가 있어야 아이디어를 내고 그걸 와이어프레임으로 구현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에이전시는 시간이 없다. 항상 없다. 그래서 동시에 진행한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 아이디어도 없는데 와이어프레임을 그릴 수는 없으니, 최소한의 정책만 피그마에 얼추 그려두고 우선은 다 같이 아이데이션 단계에 들어간다. 이때만 해도 나는 아이데이션 단계가 이렇게까지 시간을 소모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이디어 브레인스토밍 단계에 들어서서,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회의실에 도착해서, 일단 알록달록한 빛깔의 메모지와 펜을 손에 쥐고 멍하니 자릴 잡고 선다. 나와 C, B, 그리고 팀장 G.
G 팀장님이 먼저 알록달록한 메모지와 A4용지를 가져와서 입을 연다.
G: 아이디어를 내려면 뭘 해야 할까요?
처음부터 난관이다. 저 질문에 있어서 가장 적합한 대답은 대체 무엇일까? 뭐 어떤 대답을 원하시는 걸까?
...다행히, 팀장님도 딱히 답변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닌지 말을 이으셨다.
G: 뻔한 소리겠지만 사용자 입장에서 '내가 뭐가 필요한지'를 생각해보는 게 중요하겠죠. UX라는 게 그렇죠. 저는 현장 나가서 막 하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우리가 마라톤 서비스를 만든다고 하면, 직접 마라톤도 뛰어보고. 마라톤 영화도 좀 봐보고. 그래야 영감 같은 게 생기잖아요.
C: 직접 마라톤이요? 그러다 B씨 쓰러져요~
G: (웃음) 그럼 언덕길 올라가기부터 시작해야 되나?
B: 저 그렇게까지 약하진 않아요...
G: 아무튼, 제 말은 내가 마라톤을 한다고 했을 때 어떤 기능이 있으면 좋을까? 뭐가 먼저 보이면 좋을까? 이런 걸 생각해보자는 거죠. 그리고 그 전에...
G: 사실 아이디어라는 게 대단한 게 아니에요. 그냥 낙서라고 생각하면 돼요. 뭐 정성들여 그릴 것도 없고. '대충' 하는 게 중요해요. 예쁘게 정돈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일단 그려봐요.
일단 그려보기. 그 말이 제일 어렵다는 걸 알긴 아시는 걸까? 왜냐하면 나도 B도 처음인데.
G: 그렇게 거창하게 고민할 필요 없어요. 고민하는 순간 사실 아이데이션은 실패예요. 이렇게 생각해볼래요?
G: 우리 평소에 생각 정리할 때 어떤 툴을 쓰죠?
C: 네?
B: 정리요?
정적이 흘렀다. C와 B는 G 팀장님의 그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고만 있었으니까.
나는 팀장님이 왜 그런 걸 질문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도 대답을 안 하면 민망해하실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나: 메모장이요.
G: 메모장. (끄덕) 또 뭐가 있죠?
B: ...
C: ...
나: 저는 그냥 핸드폰 기본 메모 앱 써요. 가장 빨리 킬 수 있는 거.
G: (웃음) 그쵸. 사실 뭘 쓰든 뭐가 중요하겠어요?
G: 요점은 너무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냥 떠오르는 대로 툭툭. 빠르게.
G: 멋있게 그리려고 하지 마세요.
팀장님의 말이 무슨 의도인지는 알겠다. 그걸 실행으로 옮기는 건 어려웠지만...
정확히는, 내가 어렵다는 건 '아이디어를 스케치하는 게 어렵다'가 아니었다. 사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건 내 특기. 나는 예쁘게 디자인은 못하지만 상상 망상 추상 마구마구 던지기 자체는 수준급이다.
나: '마라톤 서비스에서 난 어떤 기능이 생기면 좋을까? 내가 마라톤을 하려고 할 때. 동기부여. 고양이?'
나: '근데 내가 애초에 마라톤을 할 일이 없는데. 그럼 마라톤을 안 좋아하는데 의무적으로 마라톤을 해야 하는 슬픈 사람은 이 서비스에서 뭘 하려고 할까?'
나: '뭔 개소리야?'
문제는, 그 상상의 방향이 맞느냐는 거다.
이걸 이렇게 낙서하듯이 대충 해도 되나?
팀장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우리는 팀장님의 말대로 각자 A4용지를 들고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정말 팀장님이 시킨 대로 찍찍 대충 휘갈겨서 스케치를 하는 나를 보고, C가 다가왔다.
C: 어... 이건 너무 대충인데? ㅋㅋㅋ
나: 아.. 그렇긴 한데...
대충 그리라고 하면, 난 정말 대충 그린다.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대충'의 끝판왕을 보여주니, 함부로 나한테 대충 하라고 하면 안된다...
내가 대충 볼펜으로 찍찍 휙휙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그리고 있을 때, B와 C는 찐한 네임펜을 가지고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나는 그 둘 사이에서 혼자 완성된 '스케치라는 이름의 무언가'를 들고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C: B씨는 역시 그림을 잘 그리시네요! 역시 완전 유능. 디자이너보다 낫다. 천재 아니야?
B: 아... 너무 띄워주지 마세요.
C: 진짜 B씨 없었으면 요 프로젝트 어떻게 됐을지. B씨 하는 그거 그냥 디자인 팀 아무나 맡기고 프로젝트만 계속 시키고 싶다.
B: 저도 그럼 좋겠어요...
G가 돌아왔다.
G: 우선은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자기 아이디어 설명해볼래요?
우리는 돌아가면서 팀장님께, 자기가 그린 스케치를 설명했다. 나만 정말 대충 그렸다. 보여주기도 참 민망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 나는 점점 위축되어 갔다... 대충 하랬다고 정말로 대충 하는 나.
근데 뭔가 G 팀장님이라면 정말 그걸 의도했을 것 같단 말이지.
C: 그러면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가이드는...
G: 뭐 가이드를 딱딱 정해주기보다는, 일단은 발산을 좀 해보죠. 처음부터 그런 걸 정하고 시작하면 생각이 잘 안 되거든요.
G: 그럼 이제 다음 주제도 한번 그려볼까요? 일단 지금은 주제 하나를 깊게 파는 것보다, 여러 주제를 동시에 해보면서 머리를 좀 말랑말랑하게 하는 거예요.
C: 이번엔 A씨가 한번 그려보시는 건 어때요?
나: ?
C: 왜냐면 신입 때 이런 걸 많이 해봐야 되거든요. 저는 이제 머리가 굳어갖구. 예전에는 저도 이런 거 엄청 좋아했는데. 근데 A씨는 아직 젊으니까. 아까 보니까 되게 잘하시던데.
C: 주제당 하나씩 한번 그려봐요. 너무 부담갖지 말구.
갑자기? 팀장님 대신 나선다고?
나는 C의 말빨에 감탄했다. 상당히 능수능란하게 나한테 자기 일을 떠넘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슬쩍 팀장님 쪽을 한번 쳐다보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님은 내 쪽을 쳐다보고 있지도 않으셨다...
어차피 내가 거부할 수 있는 위치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구른 만큼 성장한다'라는 합리화밖에?
마냥 합리화만 하고 싶지는 않은데... 나는 그렇게 조용히 생각했다.
나: 네, 한번 다 그려볼게요.
어쩔 수 없이 나는 자릴 잡고 앉아서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C는 G에게 넌지시 다른 얘기를 건네고 있었다.
C: 요즘 많이 바쁘세요, 팀장님?
G: 바쁘죠~ 뭐 항상 바쁘죠, 프로젝트 시즌 때는.
C: 요즘 팀장님도 D씨가 하는 프로젝트 하시느라, 저희 쪽엔 이제 별로 안 오시잖아요. 케어도 잘 안해주시구.
G: 그렇죠. 일단 이 프로젝트는 급한 불은 껐고... 또 가장 걱정이 안되는 조합이니까.
G 팀장님의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고. 감정 표현도 없고. 사실 나는 아까 C가 나한테 아이디어 그리는 걸 떠넘겼을 때, 팀장님이 그걸 막아주기를 내심 바랐다. 하지만 팀장님은 거기까지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셨고, 우리를 두고 회의실을 나갔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팀장님은 우리가 구르면 구를수록 좋겠지. 누구 편을 들 생각도 없으실 거고.
팀장님은 별로 '착하지' 않으신 분이었다. 그건 확실했다. '착한 건' 오히려 C에 가까웠다.
팀장님이 나가고, C는 조용히 나와 B를 불러서 목소리를 죽이고 뒷담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사실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껏 합리화 다 마치고 집중하려고 하니까 방해를 하니.
어차피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뻔했다. 이젠 익숙했다. 어느샌가 C는 나와 B 셋이서 모일 때면 항상 팀장님의 뒷담을 까고 있었다.
C: 뭔가 가이드도 하나도 안 주고, 저 일부러 끝까지 말 안하고 기다렸는데 끝까지 안 주시네요. 진짜 모르나 봐.
C: 일단 팀장이니까 뭐라도 피드백은 해야 하니 생뚱맞은 얘기나 하고, 말도 안 되는 질문 하고, 이상한 걸로 트집 잡고. 이런 거 한번도 안 해보신 거 아니에요? 그니까 우리한테 다 맡기는 거지. 자기도 아는 게 없으니까.
나는 좀 다르게 생각했다. G 팀장님처럼 여우 같은 사람이 과연 C의 의도 하나 못 알아챘을까?
일부러 안 주는 건 아닐까.
나는 C가 G 팀장님의 뒷담을 깔 때마다 의도적으로 말을 줄였다.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이럴 땐 B가 같이 있었어서 다행이었다. B는 C의 뒷담에 적극적으로 어울려주었으니까...
사실, 진짜로 팀장님을 깔 자격(?)이 있는 사람은 나는 B 한 명뿐이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회사와 프로젝트 구조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는 건, 프로젝트를 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경력이 많다 해도 물경력으로 남아있는 B 뿐.
그래서 B는 정말로 G 팀장님을 싫어한다. 그래서 C의 뒷담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B는 C를 좋아했기에 C의 말에 구멍이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C가 뿌리는 은근한 뉘앙스들도.
C: 아예 우리가 합심해서 한꺼번에 퇴사를 하는 거예요. 어때요? 그럼 정신 차리지 않을까? ㅋㅋ
B: 좋다 좋다.
C: 팀장이 일을 해야지 뭐 하는 게 없어? 그래놓고 돈은 우리 두세배는 많이 받아갈 거 아니에요? 대표님은 아시나? 제가 D씨한테도 들었는데, 대놓고 한번 팀장님 감시한 적도 있는데 뭐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그러더라구요?
B: 진짜 짜증나. 누군 최저 받으면서 일하는데... 어딜 가도 여기보단 낫겠죠...
C: 우리 꼭 같이 퇴사해요. 제가 이직해가지구 두 분 자리 꼭 만들어놓을게요. 안 되면 제가 억지 부려서라도 두 분 자리 만들어놓을 거야. 우리 퇴사해도 꼭 서로 연락하기예요. 공고 나오면 바로 연락할게요.
B: 진짜요?
진짜겠냐?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나는 별로 퇴사할 맘이 없었다. 나는 팀장님을 싫어하지 않았다. 왜냐면 팀장님은 항상 혼자 야근을 하고 있었으니까. 수시로 대표님한테 불려가서 두시간 동안 회의를 하는 것도. 난 봤다. C의 눈에는 안 보였나 보지만.
하지만 나는 C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며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실컷 '친목'을 다지고 나서, 다시 아이디어 스케치 작업에 들어갔다. B는 잠깐 다른 운영 업무를 하러 자리를 비웠고, 내가 아이디어를 찍찍 그리는 사이 C는 내가 그린 아이디어를 벽에 붙이고 있었다. 그런 물리적인 노동은 나중에 같이 하고 같이 내용이나 고민해주면 좋겠는데.
C: 완전 아이디어 뱅크시네, A씨.
A: 뭘요.
C: A씨 작업하기 편하라고 제가 구조 잡아드리고 있어요~ 제가 좀 효율충이라서.
나: 아, 감사합니다.
C: 여기 카테고리가 좀 비어있는 거 같은데, 이쪽도 좀 그려서 채워주실래요?
나: 네, 뭐.
C는 테이프 하나하나 각도를 신경 써가며 내 아이디어 스케치를 벽에 전시했다. 뜬금없는 자기PR도 곁들이면서. 그것도 본질적인 거랑은 하등 관련이 없는 것들로.
보통 자기 입으로 자기를 효율적인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효율적이지 않던데.
C: 이런 보여주기가 사실 중요하거든요. 클라이언트한테 보여주려면 이런 정리 능력은 필수.
C: 원래는 자로 딱딱 대서 그려야 하는데. 제가 평소에는 P인데, 일할 때는 J가 되거든요. 그래서 이런 거 보면 잘 못 참아서.
나: 자로 딱딱 대서요? 그렇게까지 해야 돼요? 생각보다 엄청 어렵네요.
C: 그럼요~ 대기업에선 다 이렇게 해요.
C: 나중에 다른 회사 가셔서 이런 식으로 하시면 안 돼요. 저는 A씨 걱정돼서.
나: 아, 그래요? 뭐 어떤 식이요?
C: 그냥, 이렇게.
C: 어렵다고 해도 어렵다고 곧이곧대로 말하면 안돼요. 특히 상사 앞에서는요. 그럼 큰일나요. 저는 괜찮은데, 저 말고 다른 상사는 안 봐줄 거예요.
나: 그래요? 전 하라는 대로 한 건데.
C: (웃음) 회사 생활이 좀 어렵죠?
딱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