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정량화에 멋진 방법론 같은 건 없어

나도 하고 싶은 거 할래

by 블루잉오렌지


전편: https://brunch.co.kr/@blueingorange/116



IDI가 마무리되고... Raw Data를 분석하는 시간.


Raw Data 자체는 얼추 폼에 맞게 분류했고, 지금부터는 보고서에 쓰기 좋게 데이터를 다듬는 시간이다. 이것도 시간이 한참 걸린다. 자고로 유저 리서치의 꽃은 보고서이지 않나? 클라이언트가 대기업이다보니 보고서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사실상, 대기업 프로젝트는 보고에서 보고에서 보고로 끝난다고 보면 된다. 그들은 '예쁘고 간략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함축적으로 포장된 보고서를 원하니, 에이전시에 다니다 보면 매번 매번이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연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데이터를 정제하는 작업은 예상보다 머리가 아프다. 게다가 이론과 현실이 본격적으로 부딪히는 타임이기도 하다. UX 프로세스에서, 결국 모든 것을 결정하는 단계가 바로 데이터 분석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 데이터 해석 하나 어떻게 하는 지가 우리가 어떤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전반 프로젝트 방향성을 어떻게 잡을지 결정하는 기본 토대가 된다. UXer에게 있어 데이터는 반드시 애지중지 아끼고 수호해야 하는 자식 같은 존재다.



데이터를 분석하는 방법은 여러 개가 있고, 우리 회사는 안타깝게도 그렇게 창의적이고 전문적인 방법론을 사용하는 회사는 아니다. 나도 아직까지도 UX 방법론 공부에 욕심이 있어 여기저기 책이고 인강이고 기웃거리곤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기본에 충실하기' 아니겠나. 어피니티 다이어그램? JTBD? 멘탈모델? 무슨 기법 무슨 기법? 대표님이나 팀장님은 그게 뭔지 알고 있겠지만, 지금 당장 신입이 둘이나 포함된 우리 팀은 이 정신산만한 구글시트를 이해하기는커녕 그냥 눈으로 읽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



C: 이렇게 막막한 건 처음이네. 팀장님도 뭐 다른 거 하시는지 사실상 저희는 방치 상태구요. 우선 우리끼리 해볼까요? 하다 보면 도와주시겠죠?

나: 일단 질문지대로 분류는 다 했는데, 보고서에 넣기 좋은 형태로 정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C: 그... 클라이언트 쪽에서 정량화를 해달라고 하셨거든요?



정량? 내가 아는 그 정량이 맞나?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대학교에서 졸업연구를 하면서, 통계적 유의성을 위해서는 60명 가량의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혼자서 30번이나 더 행동실험을 할 자신이 없어 그냥 24명의 표본으로 '통계적 유의성은 없으나 경향성은 있음'이라는 결과를 얻었던 나. 뭣도 모르지만 깡은 있었던 나는 대-코로나 시대에 과감하게 혼자 연구실을 두개나 빌려서 참가자를 두명씩 불러와서 대면실험을 했었지. 대학원도 안 갔던 주제에.


여담으로 그 실험은 UX에서 하는 테스트들과 꽤 유사한 면이 있다. 실험이라는 게 뭐 어딜 가나 비슷하겠지만, 참가자들을 불러와서 내가 준비한 방식대로 과제를 시키고 상태를 관찰하고 통계 데이터를 추출한다는 개념에서 UT와 매우 유사하며, 뭣도 없는 비전공자인 내가 그나마 면접에서 떠들 일 있게 만들어준 일등공신이나 다름없다. 심리학은 안 그래 보이지만 이래 봬도 상당히 과학적인 학문이라, 모든 프로세스는 철저하게 객관적인 정량데이터 아래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그 정량데이터를 추출하는 데는 무수히 많은 제약이 존재한다. 방법적 제약, 물리적 제약, 시간적 제약, 윤리적 제약, 정책적 제약까지...


근데 지금 이걸 한다고?


이렇게 대충?



나: 표본이 20명밖에 없는데 정량화요? 그러니까 통계를 내야 된다고요? 어떻게요?

C: 이게.. 수치 데이터는 필요하거든요. 그래야 더 있어보이고. 아시잖아요, 대기업 스타일. 저도 좀 그렇긴 한데...

나: 할 수야 있는데 그래도 되는 건가? 별로 타당하지 않을 텐데.

C: (한숨) 그건 그래요. 사실 말이 안 되는 거죠. 20명이라. 그래도 해야죠. 좀 귀찮긴 하지만...

나: C 님은 정량화 어떻게 하고 계세요?

C: 아, 저는 그냥 이렇게 세려고요 하나씩.



이게 '정량화'의 현실... 하나씩 손으로 데이터를 세서 자체 통계 생성하기. 대학원을 다닌 건 아니지만 대학원에서 빡세게 수련은 했었던 나에게는 꽤 큰 문화충격이었다.


예를 들어서 '이 기능이 좋으셨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20명의 대답 중, '좋다'고 말한 것 같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세서 13명이 나왔다면 13/20 = 0.65 = 65%라는 통계를 생성하는 거다. 어쨌든 가장 근본적인 형태의 통계라는 거다. 손으로 센다는 개념이 많이 우스꽝스럽긴 한데 그렇다고 이 데이터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건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거냐면, 사실 이건 순수 정량 데이터가 아니고 정성 데이터를 수작업으로 정량화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내가 배웠던 그 잘난 통계분석을 쓸 이유는 없다. 애초에 통계분석을 돌릴 수 있는 부류의 데이터가 아니다. 왜냐하면 20명 중에 종종 나오는 '에 음 괜찮은 것 같아요' '괜찮은 거 같긴 한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괜찮긴 한데 전 안 써요' 이런 부류의 데이터를 좋다로 판단할지 좋지 않다로 판단할지 우리가 정하기 전에는 통계고 뭣이고 안되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법은 회사에서도 책에서도 배우기 어려운 스킬인데, 나는 어떻게 하냐면 나는 행동주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로 내는 의견에는 보수적인 접근을 취해서, 진짜 행동으로 이어지기 어려워보이는 답변에는 그냥 No로 판단하는 편이다. '괜찮긴 한데 전 안 써요'는 나에겐 거의 '안 괜찮아요' 취급이다. 중립이라는 선택지로 도망간다면 좋겠지만, 클라이언트 입장에서 중립은 이도 저도 아닌 더미 데이터라서... 보통 Yes or No로 이분법으로 나누는 편이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전문적으로 통계를 돌리는 UX 회사는 별로 없다고 들었다. 보통 데이터 분석가한테 맡긴다고 한다. UX에서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데이터는 내 체감상으로 정성 데이터 쪽. 날것의 VOC가 역으로 훨씬 더 중요하며, 그 VOC를 정말 하나하나 뜯어보고 하나하나 태그 붙이고 그렇게 하면서 진행하는 편이다. AI로 띡 돌려서 띡 결론 뽑아내기? 글쎄, 나는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딴 건 몰라도 데이터를 분석하는 행위에만큼은 AI를 쓰지 않는 편이다. 그건 UXer의 생명을 스스로 옭아매고 머리를 굳게 하는 거라고도 생각하고 있고.


아무튼 그렇게 해서 '정량화'를 시작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나는 정량화 업무 자체에는 꽤 체질인 편이다. 재미없는 통계 밭에서 자란 나에겐 정성 데이터가 너무나도 맛도리였다. 정성 데이터 해석에는 왜냐면 맥락이라는 게 있고, 필연적으로 개인차가 있고, 정답이란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해석하는 사람의 재량에 따라서 데이터의 방향성이 온전히 결정된다는 것.



나: 그래도 데이터 만지는 거 재밌네요.

C: 아 그래요? 저는 너무 지루한데...



살짝 욕심이 생겼다. 뭔가 데이터의 주도권을 내가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나는 내가 데이터에 집착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마침 그때, 우리에게 해야 할 업무가 두 가지가 더 생겼다. 하나는 아이데이션이고, 다른 하나는 UX의 대표 업무인 와이어프레임 및 Flow 짜기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데이터 분석, 아이데이션, 와이어프레임과 기능 플로우 짜기 업무를 동시에 해야 하는 위기에 처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일단 다른 일로 빠져있었던 B가 돌아왔다.



B: 저 혹시 도와드릴 거 있을까요?

C: B씨! 와주셔서 너무 다행이에요~

C: 지금 저랑 A씨가 와이어프레임이랑 데이터 분석하고 있거든요. 어떤 거 하실래요?

B: 오.



나는 왠지 자연스럽게 데이터 분석을 총괄하고 있었고, B는 기획자 출신이니만큼 와이어프레임 제작을 총괄하여 떠맡고 있었다. 아이데이션은 G 팀장님과 한번 회의를 거친 후에 다 같이 진행하기로 했으니, B는 나를 도울지 A를 도울지를 선택해야 했다.


나는 그때 한 가지 깜찍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단 나는 와이어프레임 작업에 참여하기 싫었다. 나는 리서처가 꿈이라서, 리서치와 데이터 업무에는 욕심이 컸지만 화면 구성에는 큰 흥미가 없었다. 이건 지금 생각해보면 꽤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나는 그 당시 와이어프레임 작업에 참여하는 걸 최대한 회피하려고 했다.



나: 와이어프레임이 더 시간이 많이 걸릴 거 같은데, 아닐까요? 플로우도 짜야 하니까..

C: 아, 그럼 B씨 어차피 디자인도 엄청 잘하시니까 저 좀 도와주실래요? 근데 A씨는 괜찮겠어요?

나: 네, 저는 괜찮아요.



그렇게 해서 B는 C의 와이어프레임 업무를 도우러 갔다. 나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래서 데이터 시트 관리를 온전히 혼자서 맡고, 하기 싫은 화면 제작 업무에선 빠졌다. 애초에 B도 나보다 C와 사적으로 더 친한 관계였기에 그런 쪽에서도 아다리가 맞았다. 서로 윈윈. 둘은 바로 서로와 사담과 협력을 사이좋게 해가기 시작했다.



B: 어떤 걸 하면 되나요? 저 잘 몰라서...

C: 아 걱정하지 마요! 제가 다 알려드릴게요. 제가 퇴사하기 전에 두분한테 빨리 이런 스킬을 좀 전수해주고 가려고요.

B: 진짜 저도 빨리 퇴사하고 싶어요... C님 나가시면 저도 바로 나갈 거예요.





입사한지 2달에서 3달차, 나는 입사 초부터 거의 매일 같이 야근을 하고 있었다. 쿨하게 하루 12시간씩.


하지만 나는 야근이 힘들었다고 여기에 쓸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그건 가치가 있는 야근이었으니까. 아직은 나는 입사 초기 버프로 견딜 수 있었다. 심지어 그렇게 야근하면서도 지하철에서 인강을 보면서 "생산성 갓생 타임"을 즐기기도 했다.


아마도 B도 나와 같은 상태였을 것 같다. B는 다른 유지보수 프로젝트의 관리자라 우리가 하는 UX 프로젝트에 개입할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참여할 수만 있다면 힘든 일이라도 솔선수범하며 나서곤 했다. 입사 후 처음으로 맡는 UX 프로젝트이다 보니 동기부여가 많이 됐던 모양이다. 소극적일 것 같았던 첫인상과 정반대로, 엄청나게 책임감이 있는 타입이라 왜 벌써부터 B한테 관리자 역할이 맡겨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C는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점점 태도가 바뀌어갔다. 정확히는 나와 B에게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C는 나와는 조금 업무적으로 마찰이 있었지만 그 외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B와 C는 매우 친했다. C는 여전히 다정한 상사였다.


바뀐 건 회사와, 우리에게 개입하지 않는 팀장 G를 향한 태도 쪽이었다.


바뀐 게 아니라 본심을 이제서야 드러낸 거일지도 모르겠지만.



C: 사실 가끔 보면 저희 회사가 UX 회사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팀장님도 뭔가... 잘 모르는 느낌이고. 그래서 저희가 뭘 하던 내버려두는 건 아닐까요. 잘 몰라서.

C: 저희는 대표님이랑 부딪힐 일이 별로 없어서 모르셨겠지만 제가 2팀 D씨랑 친하거든요. 가끔 그쪽 얘기를 들어요. 거기는 대표님이 엄청 깐깐하게 하나하나 다 간섭한다고. D씨는 대표님 때문에 퇴사할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C: 그런 거 들으면 대표님이 어떤 대학 나오셨는지 궁금해져요.



우리 팀(1팀)의 리드인 C와, 2팀의 실질적 진행자(진짜 PL은 아니다) D는 둘 다 UX 전공자 출신에 대학원 출신이라는 점이 같아서 업무적인 접점은 없더라도 친분을 돈독히 나누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종종 C에게 D 관련한 얘기도 들었다. 나는 우리 팀과 팀장님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과 알지 못하니까.



2팀에 대해서 잊어버리셨을까봐 다시 한번 소개를 해본다면, 2팀도 우리처럼 3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D: 2팀에서 유일한 UXer 출신. 사회생활 연차는 나와 똑같은 신입이지만, 대학원 출신이기 때문에 나와 같은 입장은 아니다. C와 말이 잘 통한다.

E: 나보다 1년 정도 선임이다. 디자인 전공이지만 UX 전공은 아니며, 작은 프로젝트를 해본 경험은 있는 듯했다. B의 동기로 B와 친했다.

F: 2팀의 PL. 연차는 제일 높으나 UX 경력은 별로 없어보였으며 B처럼 유지보수 쪽의 관리자를 맡고 있다. 나랑은 아무런 접점도 없을 것처럼 생겼지만, 의외로 이 사람과 나 사이에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는데... 그건 나중에.



보통은 어느 쪽의 인력이 부족하지 않은 이상 업무적으로 부딪힐 일은 없다. 그래서 나는 2팀과는 사실 인사만 한 번 나눴을 뿐 뭐 얘기도 해보지 못한 상태였다. 내가 그리 친화력이 좋은 사람도 아니고, 애초에 회사에서 사람을 사귀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서... 내 사회생활은 1팀과 팀장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 회사는 단체생활이 많지 않은 개인주의형이라서 그렇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접점이 생겨버렸다.



G: 혹시 시간 괜찮아요?

나: 네?

G: E씨 프로젝트에 사람이 필요해서...



응?


지금?



G: 미안해요. 지금 E씨가 혼자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거든요. UT를 해야 하는데, 보조가 한 명 필요해서요.

나: UT요? 지금 하고 있는 건...

G: 네. 좀 힘들겠지만... 대표님이 걱정이 되게 많으셔서. 이번주만 잠깐 도와주세요.

나: 어... 네, 알겠습니다.



얼떨결에 응했다. 응해버렸다. 그야 난 신입이고, 내가 끼기로 위에서부터 이미 결정이 되었다면 그걸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그 프로젝트는 2팀이 전부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E 한 명이 하는 프로젝트였다. 정확히는 원래 F를 빼고 3명이서 하고 있었던 프로젝트였는데, D는 다른 프로젝트 리드로 빠져버리고, 다른 한 명은 프로젝트 중에 퇴사를 해버려서 E 한 명만 남아버린 것이었다. 규모가 큰 프로젝트는 아니지만, E가 경력자도 아니고 UT를 혼자서 진행하는 건 아무래도 어렵기 때문에 나를 용병으로 부르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나 혼자 데이터 분석을 하고 있는 바쁜 와중에, 여태 한번도 얘기 나눠본 적 없는 E를 도와주러 가야 했다. 평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C는 당연히 노발대발 들고 일어났다.



C: 그러니까 팀장님이 A씨한테 다른 프로젝트 인볼브를 갑자기 시켰다고요? 지금 제일 바쁠 때에? 갑자기 일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주말에? 아니, 우리 프로젝트는 어쩌구요?

B: 납치당하신 거예요...?

나: ...넵.


C: 위에서 하라고 해서 바로 하겠다고 하면 안돼요. 바로 저한테 먼저 알려주셔야 돼요. 알겠죠? 진짜 이게 무슨 고생이야.

나: 네... 어차피 제가 하기로 결정된 거 같아서요 뭔가...

C: 진짜 팀장님이 우리 상황 아예 모르는 거 아니에요? 지금 A씨가 다른 거 할 여력이 없는데? 지금 우리 말고 야근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데요? 우리만 야근하지 않나? 근데 우릴 시킨다고? 우리 프로젝트 인력을 더 보충해주지 못할망정?

나: 전 괜찮아요.



이때 나는 아직 '신입 패기 모드' 상태였는지 몰라도, 다른 사람 프로젝트에도 인볼브된 것에서 묘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연히 주말에까지 풀타임으로 노동을 하는 건 빡쳤지만, 그리고 가장 바쁠 때 날 아무 맥락 없이 납치해가는 건 더 빡쳤지만, 어차피 난 경험이 필요한 신입이었으니까 '에이씨 젊을 때 죽어놓자'라는 마인드로 나 자신을 합리화했다... 애초에 거부한다고 될 일도 아니라 생각했다.


당연히 C와 B는 합리화할 생각이 없었다. 둘은 나보다도 더 빡친 상태였다.



C: 가뜩이나 맨날 점심에도 일하고 야근하고 힘들어 죽겠는데.. 바빠 죽겠는데 왜 자꾸 우리 팀원만 데려가고 난리야? 솔직히 우리 프로젝트가 제일 큰 거 아니에요? 근데 팀장이란 사람은 뭐 일을 하는 게 없네?

B: 말이 안 되는 거 같아요. 팀장님이 나서서 뭘 중재를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자기 일까지 우리한테 떠넘기고. 다른 디자인 팀이나 여기서 인력을 땡겨오던가. 디자인 팀에 기획팀으로 오고 싶어하는 사람들 많거든요. 아니면 같은 팀인 F님도 있고.

C: 맞아. 그러고 보니 F씨는 왜 참여를 안하시는 거래요? 일부러 안 시키나? 솔직히 몇년 다녔으면 다 할 수 있을 텐데.

B: 아마 F님도 유지보수 말고 프로젝트 하고 싶어하실 걸요. 근데 팀장님이랑 저번에 한 번 싸워서 그런가...

C: 에 정말요? 왜요? 아니, 자기보다 한참 어린 여자애랑 싸웠다고 삐져서 프로젝트를 안 시켜?

B: 그렇게 감정적으로 일해도 되나?


C: 으휴... 진짜 빨리 퇴사해야지ㅠㅠ 솔직히 여기, 제가 전에 다니던 회사 연봉이랑 비교하면 진짜 쥐꼬리만큼 줘요. 진짜 어이가 없어서.

B: 전 요즘 맨날 잡코리아 보고 있어요... 어딜 가도 저희 회사보단 나을 거 같아서.



어차피 나서서 실질적으로 구조를 바꿀 생각이 없다면 그냥 받아들이는 게 낫다.


나는 C의 감정적인 위로가 별로 와닿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C가 나서지 않는 걸 봤으니까.



나는 목요일부터 빠짐없이 외근하여 E의 UT를 도와주고 왔고, 쉬는 날 없이 다음주 월요일에 출근하고 돌아왔다. 변하는 건 딱히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고, 난 다시 원래 업무로 돌아왔다.


B가 말을 걸어왔다.



B: A 님은 뭔가 저희랑 다른 거 같아요.

나: 뭐가요?

B: 뭔가 저희랑 다르게 용병 식으로 굴려지는...? 여기 꼈다가 저기 꼈다가... 뭔가 팀장님이나... 대표님이 A님 취급하는 느낌이 저희랑 좀 다르달까...

나: 저는 하나 맡아서 딱 거기에 몰입하는 게 좋은데.

B: 우리 같이 힘내요.



그때 B의 나직한 말 한마디를 듣고 눈치챘어야 했는데.


바보 같이도 나는 내가 이번 한번만 임시로 도와주는 건 줄 알았다.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였지.






빌런이 될 때까지 ???일.



매거진의 이전글인뎁스 인터뷰: 소통하기 위해 길거리에서 헤엄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