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뎁스 인터뷰: 소통하기 위해 길거리에서 헤엄치기

사회생활의 기본은 경청

by 블루잉오렌지



전편: https://brunch.co.kr/@blueingorange/119



길거리 캐스팅. 내가 UX에 입문하고 처음으로 맞이한 난관.


그리고 G 팀장님이 일으킨 맥락의 소용돌이 폭풍까지...







우리는 이 당시 웨어러블 기기와 연동된 헬스케어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유저 리서치를 하기 위해서 직접 사용자들이 있는 현장으로 향했다. 이를 테면 길거리 캐스팅이다. 나는 길거리에서 누가 말을 걸기만 해도 바로 눈살 찌푸리면서 광고인지 도를 믿는 사람인지 의심부터 들어가는 중증 의심병 환자인데, 이런 내가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서 인터뷰를 강요한다? UX 회사는 우리가 사회성 부족한 사람으로 남아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참고하세요.


그런데 나는 '사용자들이 있는 현장'이라고 하길래, 근처의 체육관으로 가는 건가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스케일이 컸다. 그때 마침 코엑스에서 헬스케어 박람회 행사를 하고 있었어서 아예 날 잡고 그곳으로 출장을 갔다. 그래서... 박람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갑자기 붙잡고 모셔서 '실례합니다. 인터뷰 참가하실래요?'라고 말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닥친 것이었다.


다행히 클라이언트의 은혜로 부스 관계자에게 협조를 받을 수가 있어서, 나는 부스 안에서 안전하게 사용자들이 부스로 오기를 기다리면서 길거리 캐스팅을 할 수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생면부지의 무뚝뚝한 클라이언트(그 당시 나는 클라이언트와 얼굴도 모르는 상태였다)와 어색하게 한 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지만...



부스 관계자: 네, 예약 확인되셨구요! 이쪽은 본사에서 오신 직원 분인데, 잠깐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하네요. (손님을 향해 나를 가리킨다)

나: 어... 네! 안녕하세요, 저희가 지금 인터뷰 하나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나는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날 의심하지 못하게 클라에게 직원 이름표도 양도받고, 부스 관계자에게도 왠지 본사 직원으로 오해받으며 캐스팅을 진행했다. 본사 네임값과 사은품의 힘으로, 다행스럽게도 인터뷰 참가자 20명을 모으는데 성공했다. 인터뷰(IDI)는 이틀 안에 20명을 진행한다는 스파르타 계획으로 진행되었고, 나는 인터뷰 자체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리크루팅은 나와 B가 돌아가며 진행했고, 인터뷰는 G와 C 두 명이서 진행했다.


클라이언트는 대리와 과장급 두 명이었는데, 그중 실무자인 대리 쪽이 내 옆에서 어색하게 대기하시면서 내가 캐스팅하는 모습을 지켜보셨다. 안 그래도 나는 프로젝트에 도중에 갑자기 합류한 터라 정식으로 인사도 못 나눈 상태였고, 심지어 클라이언트의 이름도 몰랐어서 어색해 죽을 뻔했다. 현황 보고는 해야 하는데, 이분의 성함도 직급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 난감했다. 이 클라이언트 분도 말이 많은 타입이 아닌지라 더욱.



나: 저기 보고 드릴 게 있는데요.

클라: 네?!

나: ...실례지만 저기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클라: 저어 XXX 대리라고 합니다...



클라 대리: 저기 혹시 목 마르시면 음료라도...

나: 네?! 저 괜찮은데... 어 그럼 생수 한 병만...

클라 대리: 넵 (도망)



내 사회생활 여정의 빛은 오려면 아직 매우 많이 멀었다...




그렇게 길거리캐스팅(인터뷰이 모집)이 끝나고, 나는 인터뷰 현장으로 돌아가 G와 C가 인터뷰 진행하는 것을 도왔다. B는 이미 C의 테이블에서 C가 진행하는 인터뷰 스크립트를 쓰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G 팀장님 테이블로 향해 팀장님이 능수능란하게 인터뷰를 진행하는 걸 감상하면서 인터뷰 스크립트를 작성했다. 현장 상황 상 녹음 환경이 별로 좋지 않아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실시간으로 스크립트를 작성하면서 회사로 돌아가면 빠르게 데이터 분석 단계로 돌입할 수 있게끔, 인터뷰 내용을 따라가며 최대한 많은 내용을 받아적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수십개씩 띄워야 했다. 나는 거의 8장은 되는 질문지를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넘겨가며 팀장님이 지금 대체 뭔 질문을 하고 있는지를 찾아야 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팀장님은 질문을 순서대로 하고 있지 않았다. 이 새끼 질문지를 보면서 질문하지도 않았다. 1페이지에 있는 걸 질문하다가, 6페이지 질문이 떠오르면 그걸 질문하다가, 다시 2페이지로 돌아왔다가, 그냥 본인이 궁금한 걸 물었다가... 나는 스크립트를 작성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정신이 혼미했다.



나: '어디야? 몇 페이지야? 이거 질문지에 있는 질문인가?'



나는 하염없이 질문지를 넘겨가며 도대체 지금 진도가 어디까지 나가있는지를 찾았다. 옆에서 나와 같이 스크립트를 작성하고 계시는 클라 분의 시선이 묘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G: 네, 오늘 인터뷰 고생 많으셨습니다. 인터뷰 참여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나: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용자님: 아 오늘 인터뷰 재밌었어요!



그렇게 대부분의 인터뷰가 G 팀장님의 흐름에 따라 유유히 헤엄치다가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나는 그냥 그 흐름의 파도에 덮쳐지다가 끝이 났다. 나는 이대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용기를 내어 팀장님께 질문했다...


'당신 지금 대체 뭘 질문하고 있는 거야?'라고 물을 수는 없으니, 적당히 돌려말하도록 하자.



나: 팀장님. 팀장님이 생각하시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떤 건가요?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던 클라 대리님이... 내 질문을 듣고 다시 조용히 자리에 착석했다.


아무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품고 계셨던 것 같다. 중간부터 펜을 움직이고 있지 않으셨으니까.



G: 그러니까 실제로 이 사용자분이 어떤 사람인가, 그게 궁금한 거예요. 막말로 이런 박람회 같은 데 올 정도면 우리보다 얼마나 전문가시겠어요? 저희는 뭐 꼴랑 몇주 공부하고 인터뷰하는 건데. 이분들은 몇년을 하셨겠어요? 그러니까 사용자 분의 강의를 듣는다 생각하고. 그래서 듣고 궁금한 게 있으면, 더 깊게 물어보고.


G: 저희가 이것저것 질문을 많이 준비하긴 했지만, 이거를 다 물어볼 수는 없잖아요? 저희가 질문을 정말 딱 정확하게 짰을 거란 보장도 없고, 시간이 없는데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그냥 자연스럽게 사용자분이 자기 이야기를 맘껏 할 수 있게 내버려두는 거죠.



납득이 갔다. 비록 그 데이터를 정해진 틀에 맞게 정제해야 하는 우리 실무자들 입장에선 지옥이겠지만, G 팀장님은 진짜 데이터를 추출하려고 하신 의도가 보였다. 유도되지 않은 말 그대로 날것의 데이터. 우리의 질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클라이언트 요구사항을 덕지덕지 욱여넣어 나열한 정교한 체크리스트나 다름없었으니.



반면 C는 G와 정확하게 반대. C는 모든 질문을 정확하게 전부 물어봤다. 그래서 G 팀장님보다 인터뷰 시간이 30분 정도가 더 걸렸다.


물론, C라고 마냥 질문지를 기계적으로 읽어내려간 건 아니다. 원체 사회성이 좋은 사람이라, 중간중간에 추임새를 넣어가면서 적극적으로 사용자의 말에 경청했다. 그러니까 이거는 질문자의 성향 차이이지, 누가 옳다고 판단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출장에서 돌아와, 회사에서 본격적으로 Raw Data를 정리할 때... 우리는 구글 독스를 켜서 20명의 데이터를 전부 채워서 교정하고 정제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C는 팀장님이 진행했던 인터뷰 Raw Data를 하나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찾아왔다.



C: 아니, 팀장님 거는 왜 이렇게 빠진 질문이 많아요? A 씨 팀장님 인터뷰 때 스크립트 작성 어떻게 했어요?

나: 페이지 막 이랬다 저랬다 넘겨가면서 했죠... 놓친 것도 있을 거고, 질문지에 없는데 즉석에서 한 질문도 많았어요.

C: 이걸 이렇게 인터뷰 진행을 하면 어떡해! 이거 어떻게 정리해? A 씨 고생했겠네... 저는 진짜 하나도 안 빼먹고 다 질문했어요.

나: ...네, 그쵸.



최소한 실무자 편의성 면에서는 C가 무조건 옳다. 나는 G 팀장님의 인터뷰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미래를 생각하며 한숨부터 나왔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 G 팀장님 쪽에 이야기에 신경이 쏠렸다. 이상하게도.




결국 팀장님의 인터뷰는 내가 전부 다 Raw Data를 정리했다. C가 진행한 인터뷰는 C와 B 두 명이서 정리했고. 다행스럽게도 일단 클라 요청사항에 맞게 다 채워넣을 수 있었다. 한줄 한줄 스크립트를 정성스레 읽어가면서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 두뇌를 총동원해야 했지만... 팀장님의 질문 의도와 속뜻을 파악하고 틀에 맞게 올바르게 그룹핑하는 그 정제 과정 자체가 재밌긴 했으니까.


일 배분이 공평하지는 않았다. G 팀장님과 C가 인터뷰를 반반씩 진행했는데, 팀장님 파트는 나 한 명이 정리했고, C 파트는 C와 B 두 명이 정리했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C와 B가 G 팀장님의 데이터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할 것 같았다. B는 변함없이 다른 일 때문에 바빠서 많이 도와주지 못하기도 했고.



B: 죄송해요, 저도 이거 프로젝트 하고 싶은데... 저도 입사하고 처음으로 맡은 프로젝트라서 이거 도와드리고 싶은데... 다른 일이랑 병행하느라...

나: 네? 처음으로 맡았다고요?

C: 아니 B 씨는 죄 없어요. 애초에 일을 두 개 병행하는 게 말이 돼? 진짜 고생이 많아요ㅠㅠ 팀장님이 애초에 PM을 잘 못하네요. 관리를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일 배분도 실력인데.

B: 그니까요! 저는 맨날 다른 거만 하고... 프로젝트도 할 수 있는데 그거 때문에 못하고...



나는 그때 깜짝 놀랐다. B는 나보다 경력이 2년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근데 처음으로 프로젝트를 한다니?



나: 다른 부서에 있다가 오신 거예요? 디자인 쪽?

B: 아뇨... 처음부터 여기였는데. 저는 UX를 잘 모르고... 애초에 제가 면접 볼때는 팀장님이 들어오시지도 않았어요. 그때는 애초에 프로젝트 때문에 채용했던 게 아니라서... 저랑 같이 들어오신 분들도 다 비슷해요. 다들 프로젝트 별로 안 해보셨고, 프로젝트 했던 인력은 다 퇴사했어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거 내가 불평불만할 상황이 아니구나 싶어서. 입사하자마자 프로젝트에 떠밀어지고 있는 이 상황이 얼마나 축복받은 상황인지...


나는 B를 동정했다. 내가 동정하는 것도 되게 주제넘은 이야기일 순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B가 회사의 구조에 되게 무력하게 휩쓸리고 있다고 느꼈다. 실력이 없어서 배제된 것도 아니고, 정말 말 그대로 '우연히 계속해서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함'의 상태에 있는 것 같아서. 나는 B가 다른 일, UX와는 거의 상관없는 기계적인 유지보수 업무만 주구장창 하는 모습을 계속 보았고, 거기에 B의 능력이 희생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B는 그 유지보수 업무에서 관리자를 맡고 있었다. 나이도 신입인 나와 또래 수준인데 벌써 클라이언트와 단독으로 소통하고 구조를 짜고 혼자서 의사결정 하면서 책임을 지고 있었다. 게다가 손도 되게 빠르고, 머리도 좋은 것 같았다. 이런 비정형적인 프로젝트를 해도 잘 적응할 것 같았다. 단순반복 업무에 투입하는 건 내 입장에선 되게 인력 낭비 같았다.



C: 솔직히 B 씨가 하는 그거 잡무 아니에요?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그냥 프리랜서나 다른 부서 아무나 맡기면 되지. 대표님은 지금 상황 알긴 아는 건가?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저희가 지금 하는 프로젝트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니에요?

나: 같이 얘기하러 갈까요?

C: 네?

나: 직접 얘기하러 가요. 대표님한테.


C: 아뇨, 그럴 것까진 없고.






빌런이 될 때까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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